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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해완's MVQ

미국판 [비정상회담], 연극반을 들다!

by 북드라망 2014. 11. 28.



연극반 이야기



연기와 나는 그 인연이 징글징글하다. 중학생 때, 매 연말마다 학년 프로젝트로 학급 연극을 했어야 했던 게 시작이었다. 친구들과 영화를 찍었는데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어쩌다보니 배우를 하고, 남산강학원에서 학술제 때 딱히 할 게 없어서 연극을 하고... 결론은 언제나, 다시는 연기하지 말자(^^)였다. 내가 봐도 손발이 오그라들게 어색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 뉴욕에서, 영어를 배우러 온 헌터 칼리지에서, 나는 또 다시 연극반에 들고 말았다! 





연기와 외국어


이번에도 과정은 ‘어쩌다보니’ 였다. 지난 학기, 나는 뉴욕판 글쓰기 스승님 미쉘을 만났다. 그녀 덕분에 지난 학기 엉망진창이었던 내 영어 문법은 환골탈태(?) 했고, 이건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스승님을 만났으면 계속 따르는 게 당연지사. 헌데, 알고 보니 미쉘이 전담하는 반은 연극반이었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미쉘의 글쓰기 크리틱을 받으려면 연극반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 결과는? 내 누더기 같은 영어 문법이 연기에 대한 거부감을 이겼다. 현재 나는 연극반 소속이다.


왜 영어를 배우는 데 연극을 해야 하느냐고 갸우뚱할 수도 있다. 의외로, 연기와 외국어에는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 외국어로 의사소통 하는 것은 마치 불편한 의상을 입고 낯선 배역을 연기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내가 실제로 체험했다. 뉴욕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가 가장 어려웠던 것은 영어로 감정 표현을 하는 것이었다. 특히, 짧은 영어 감탄사는 건널 수 없는 강과 같았다. 한국어 “우와”와 영어 “Wow”는 보기에는 비슷해 보여도 각각 신체적 반응은 딴판이다. 억양도, 운율도, 감응도 다르다. 한국어와 영어 자체가 이질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낯선 이 ‘소리’가 이 땅에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면? 이게 나에게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계속 반복하는 수밖에. 이 시간을 거치면서 내 입이 영어를 연기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연기는 몸에 대사가 자연스럽게 밸 때 나온다. 외국어도 마찬가지다. 음율과 억양 뿐만이 아니라, 단 한 문장을 배워도 적시적소에 써먹을 수 있는 응용력이 필요하다. 영어의 특수한 표현력이 내 진짜 삶과 얼마나 결합하느냐, 이것이 영어 일상 실력을 판가름하는 주요 척도다. 외국어를 쓰는 것은 일상의 연기자가 되는 것이다(^^).





‘Almost, Maine’


이번에 우리가 공부한 연극은 <Almost, Maine>이라는 제목의 코미디다. 정통 희극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사랑 이야기를 엉뚱한 방식으로 표현해서 웃음을 주는 그런 따뜻한 이야기다. 장소는 ‘Almost’라는 허구의 마을. 이 마을이 위치한 메인(Maine) 주는 전체 영토의 90%가 산으로 덮여 있는 산골짜기다. 특히 이곳은 혹독한 겨울과 오로라가 유명한데, 이 배경은 사랑의 마법 같은 순간을 불러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 연극은 같은 마을, 같은 시간에 벌어지는 8개의 짧은 이야기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여 있다.




현재 우리는 맹연습 중이다. 처음 한 달 동안 우리는 대본을 차근차근 읽고 의미를 해석했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심각한 발음들을 교정했고, 음율을 살짝 변화시키는 것만으로 같은 문장이 어떻게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지도 보았다. 그 후에는 각자가 좋아하는 씬과 파트너를 결정해 배역을 나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캐릭터의 심정 상태를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대사를 할 때 내 영어도 정확히 느는 것이 보인다. 그 순간에 영어가 뇌가 아니라 가슴에서 나오기 때문이 아닐까? 최소한 자기 대사를 읽을 때만큼은 다들 영어가 그럴 듯하게 들린다(^^). 한 달 후, 실제 개봉일을 기대하시라!




우정이라는 선물


뭐니뭐니 해도 연극반의 제일 큰 장점은 친구들과의 우정이다. 선생님들은 연극을 지휘하지 않는다. 학생들 모두가 감독이고 모두가 배우다. 그런 까닭에, 연극을 완성하려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친구들과 함께 의논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다들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된다.




가끔은 모국어보다 외국어로 ‘의논하는 것’이 더 강렬한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든다. 수업시간에 우리는 모두 영어를 쓴다. 그런데 영어로 '대충' 듣고 말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한 순간이라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수업시간 대화에서 도태되고 만다! 본의 아니게 소통을 하기 위해서 다들 열심히 발버둥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밀당' 혹은 '한 입으로 두 말하기'를 잘 못한다. 모자란 영어 때문에 서로를 오해할까봐 대개 직설적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때 서로에 대한 편견이 있다면 이것을 무조건 들이대서도, 감춰서도 안 된다.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쉽게 설명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열린 마음을 유지하도록 훈련 받고 있다.


선생님들 눈에는 우리가 일종의 미국판 <비정상회담>으로 보이지 않을까? <비정상회담>의 외국인들은 모자란 한국어실력으로도 할 말 못 할 말은 기똥차게 다 해낸다. 게다가 서로 싸우고 설득하고 화해한다. 하긴, 생각해보면 언어가 소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지붕 아래 살지만 나와 내 룸메이트는 서로를 유령 취급한다. 연기를 할 때 가장 짜릿한 순간도 바로 이 소통의 순간이다. 상대방의 눈에서 내 존재감을 읽고, 상대방의 대사에 진심으로 반응하고, 정확한 사인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톱니바뀌가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은 순간.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다른 감각을 사람들 사이에서 ‘뭔가’가 통했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이 힘 때문에 나는 손발이 오그라들지언정 여전히 연기 주위를 맴도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사진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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