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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해완's MVQ

밀당 대신 솔직함 - 뉴욕의 국제 연애 이야기

by 북드라망 2014. 12. 26.



국제 연애 이야기




 갑오년을 떠나보내며


망나니 같았던 청마의 해.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은 갑오(甲午)년이 이제 거의 다 지나가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한국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었다. 또 무슨 일이 터질까 하고...


그렇지만, 사실 자질구레한 내 새 일상을 챙기기에도 바빴다는 게 더 솔직한 심정이다. ‘갑’의 시작하는 기운을 따라 나의 뉴욕행 또한 시작되었었다. 하지만 이 한 해는 내게 시작 그 이상을 의미했다. 사주명리학에서 나 자신을 뜻하는 나의 ‘일간’은 을목(乙木)이다. 을목에게 갑(甲)은 동료들의 기운을 뜻하는 비겁, 오(午)는 언어와 음식의 기운을 뜻하는 식상이다. 신기하게도 내 대운 역시 이년 전부터 비겁과 식상으로 바뀌었었다. 이 세운과 대운의 교차는 아주 강력했다. 올 해 동안 나는 참 원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밥상을 함께 하고, 술을 마셨다. 내 2014년은 ‘(외국)친구들’과 ‘(외국)말’로 요약되는 한 해였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할 것이 있다. 식상은 성욕을 뜻하기도 한다. 내 안의 숨겨진 성욕이 고개를 삐죽 내민 것인지(;;) 나는 여기서 3년 만에 연애를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이 연애, 내가 그 이전에 경험했던 것과는 약간 다르다. 뉴욕의 기운인 걸까? 아니면, 국제 연애의 특수성인 것일까?




 ‘밀당’이 불가능한 연애


내 현 남자친구는 한국인이 아니다. 애초부터 국제 연애를 하겠다고 작정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뉴욕의 ESL 코스에서 친구로 만나 우여곡절 끝에 사귀게 되었다. 외국인과 연애하는 게 도대체 어떤 기분이냐는 질문을 많이 듣는다. 음, 일단은 그냥 연애하는 기분이다. 사실, 내 남자친구는 대만인으로 나와 같은 동아시아 권에 속해 있다. 한국인과 대만인의 차이 쯤이야 인종의 샐러드인 뉴욕에서 ‘국제 연애’ 급으로 쳐지지도 않는다.




이 연애가 내게 특별하다면, 그것은 국적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바로 언어의 이질성 때문이다. 나는 중국어를 모르고 남자친구는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제2외국어인 영어를 써야 한다. 둘 다 영어를 곧잘 하는 편이어서 의사소통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하지만 의사소통만으로 연애를 할 수는 없다! 간접적으로 말하기, 의인화해서 말하기, 미묘하게 감정 표현하기 등등이야말로 연애의 필수 요소다. 관계의 묘미는 물 밑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힘겨루기 아닌가. 문제는 내 짧은 영어로는 이런 고급 기술을 구사할 수 없다는 것. 내 표현은 언제나 의도치 않게 노골적이었다. 어쩌랴, ‘Yes/No’ 빼고는 달리 대답할 말을 모르는데. 속된 말로 우리는 ‘밀당’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우스꽝스러운 사건이 있었다. 고샘과 길쌤이 뉴욕에 오셨을 때, 남자친구가 선생님들을 뵙고 싶어했다. 하지만 쌤들이 영어도 중국어도 모르시는 통에 이 친구와 만나기를 부담스러워 하셨다. 결국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남자친구에게는 선생님들을 뵙기에는 우리의 관계가 아직 짧다고 설명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문제는 이 오묘한(?) 메시지를 영어로 어떻게 전달할지 내가 몰랐다는 것이다. “짧다(Short)”라는 표현을 직설적으로 하자니 미안한 마음에 다른 표현을 고르려고 했는데, 그 와중에 나는 엉겁결에 “일시적(temporary)”이라는 말을 고르고 말았다. 결국 “네는 이 관계를 정말 일시적으로 생각하고 있느냐”라는 아주 심각한 질문이 되돌아왔다.


이처럼 언어의 모자란 공백을 채우려면 신체적인 표현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신체와 신체가 부딪혀야 하는 연애다. 이런 연애스타일이 오히려 타인의 감정에 무딘 내게는 더 맞는 것 같다. 이 복잡한 연애를 그나마 단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복잡한 말로 의도를 숨기는 것도 불가능하고, 번지르르한 말로 나를 그럴 듯하게 꾸미는 것도 불가능하다. 계산하지 않고 일단 진심을 부딪혀보는 수밖에. 국제 연애는 이 긴 과정을 매일 매일 견뎌낼 수 있는 강한 체력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너무 먼 당신 - 스킨쉽의 다른 철학


나의 예시는 약과다. 말했듯이, 우리 둘 다 동아시아권에서 자랐기 때문에 관계를 맺는 기본 감각은 비슷하다. 하지만 내 한 콜롬비아 친구가 태국 남자친구를 사귀었을 때는 정말 답이 없어 보였다. 평화를 사랑하는 아시아의 태국과 화끈한 남미의 나라 콜롬비아. 이 두 나라 사이의 간극은 참 깊고도 넓었다. 그래도 둘 다 끈기 있는 친구들이어서 결국은 타협점을 찾아냈다.


남미의 연애스타일은 아시아와 천지차이다. 그들은 성(性)에 대한 내 상상력을 아예 뒤집어 놓았다. 한국의 문화가 반드시 사귀는 것을 전제한 후에 키스와 섹스가 허용되는 것이라면, 이쪽 문화는 가벼운 대화부터 신체적 교합까지 모두 경험한 다음에야 교제 혹은 결혼을 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일례로, 내 콜롬비아 친구는 13살 때 아버지에게 농담으로 ‘나는 결혼하기 전에는 절대 섹스를 하지 않겠다’ 라고 말했단다. 아버지는 이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여 충격을 받으셨다. 그리고 내 친구에게 진지하게 일렀다. “안 된다, 반드시 결혼하기 전에 확인해라. 만약 네가 결혼한 다음에 네 남편과의 잠자리를 싫어한다면 어떻게 하겠니?” 부녀간에 이런 대화가 가능한 것도 놀랍지만, 남미의 상식을 대변하는 아버지의 대답도 놀랍다.




이런 남미 문화가 단순히 섹스를 좋아한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관계에 대한 그들의 철학이 깔려 있다. 이 사람들은 서로의 연인 혹은 배우자가 되기로 결정하는 것은 굉장한 타협이며 또 많은 것을 양보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 최대한 모든 것(!)을 경험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성 관계를 갖는 여부보다 일상을 함께 보내는 쪽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사람들. 나름대로 합리적이지 않은가? 신체적인 제스쳐 하나에도 성과 관계에 대한 한 문화의 입장이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을 제대로 듣기 전까지, 스킨쉽을 조절하는 것은 연애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가장 잦은 오해를 낳기 때문이다. 내 콜롬비아 친구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런 차이 때문에 피곤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짜릿하다!” 이 짜릿함을 즐기는 사람들이 굳이 국제연애를 하는 것일 테다.




 아시아 여자는 쉽다? - 추측은 금물


연애 이야기는 국적 불문하고 만인의 관심사다. 그래서 술자리에 할 이야기가 없으면 종종 성별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는데, 바로 여기에서 상식 같은 편견이 생긴다. 이탈리아 남자들은 바람둥이라던가, 아시아 여자들은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던가, 남미 사람들은 성적으로 무조건 개방적이라던가.


이런 이야기들은 다 시시껄렁한 잡담일 뿐, 신빙성은 없다. 작년 딱 이맘 때 즈음, 내가 한국에서 많이 들었던 경고는 미국 사람들이 아시아 여자들을 쉽게 보니 부디 몸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오호 통재라, 아시아 여인들이 이국 땅에서 그리 인기가 많단 말인가? 반은 경계심 반은 흑심을 품고 뉴욕 땅을 밟았으나 결과는 무(無)였다. 아무도 나에게 작업을 걸지 않았다. 이 뉴욕 땅에서 나는 몹시도 안전했다. 역시 아시아 여성도 여성 나름. 설령 아시아 여자들만 쫓아다니는 미국인이나 유럽인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아시아인을 얕잡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미리 화낼 필요는 없다. 자기 나라에서 먹히지 않아 여기서 열심히 노력하는구나, 이렇게 넓은 마음으로 봐주면 된다. 이 친구들도 솔로 탈출을 위하여 나름 발버둥치는 중이니까.


추측은 추측일 뿐이다. 국적에 의거한 특성 분류는 사람과 사람이 일대일로 마주해야 하는 그 마지막 순간에는 도움을 줄 수 없다. 연애의 세계에서 룰은 단 하나,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느냐 마느냐 뿐이니까. 에너지 들끓는 뉴욕에서 젊은이들은 짝을 찾아 헤맨다. 찔러 보고, 차이고, 노력해서, 또 유지한다. 세계 어디에서나 청년들이 하는 일은 똑같다. 다만, 이 국제 연애가 조금 더 설렌다면 사고가 끊이지 않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리 계산할 수 없고 몸으로만 부딪혀 배울 수 있는 사건. 그런 의미에서 국제 연애는 연애의 맨 얼굴이다(^^).




글/사진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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