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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해완's MVQ

잃어버린 시간의 동네, 할렘 탐방기!

by 북드라망 2015. 1. 30.







1월 19일, 마틴 루터 킹을 기념하는 공휴일에 나는 할렘 탐방에 나섰다. 할렘은 맨해튼 센트럴파크보다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 넓게는 116가부터 160가까지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이곳은 20세기 중반부터 쭉 흑인들의 집중 주거지였다. 현재는 점점 다양한 인종들이 섞이고 있지만 말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할렘 지역에도 가볼 생각이다.’ 작년 1월 뉴욕에 막 도착했을 당시 나는 이렇게 일기를 썼다. 하지만 인성과다인 나, 역시 게을렀다(^^). 그 따뜻한 계절을 다 보낸 후 두 번째 1월에서야 이 계획을 실천할 수 있었다. 이것도 다 이와사부로 코소가 쓴 <뉴욕 열전>(갈무리) 덕분이었다. 이 책에는 저자가 좋아하는 할렘 유람길이 소개되어 있다. ‘가스펠 투어’나 ‘재즈바 투어’ 같은 관광객 코스에 낄 필요도 없다. 튼튼한 다리로 용감하게 걸어다니기만 하면 된다.





할렘과의 거리


하지만 할렘에 오기까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발을 선뜻 떼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웠을까? 일단, 할렘은 내 동선과 거리가 멀었다. 이곳에는 발달한 상업 지구도 없고 학교도 없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할렘은 내 마음과도 거리가 멀었다.




흑인들이 모여 사는 곳. 집값은 싸지만 주거 시설이 낙후된 곳. 언제 범죄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 이것이 내가 작년 동안 할렘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였다. 백인 중산층 계급이 모여 사는 다운타운이 오히려 범죄율이 더 높고, 할렘의 건물들이 200년 전 상류 계급들을 위해 벽돌들로 튼튼하게 지어졌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알았더라도 과연 할렘에 대한 이미지가 내 마음 속에서 바뀌었을까? 이것은 나말고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은연 중에 공유하고 있는 이미지였다. 아직도 기억한다. 한 일본 친구가 할렘에 산다고 밝혔을 때 3초간 우리들 사이에 흐르던 침묵을.


이 침묵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인종 차별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미국에서 인종차별 발언은 교육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나 하는 이야기로 통한다. 그러나 차별은 사라지기는커녕 주거에 대한 이야기에서 되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사람들은 더 이상 “흑인과 히스패닉은 위험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흑인‧히스패닉이 사는)이 구역은 살기에 위험하다”고, “(중국인들이 사는)차이나타운은 더럽다”고 당당히 말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인간’이라는 카테고리 안에는 이미 편파적인 ‘얼굴들의 위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백인 남성인 예수의 얼굴이 영원한 0번이며, 이후로는 인종과 성별, 직업 따라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진다는 것이다. 뉴욕에서 나는 그 이야기를 실사판으로 경험하고 있다. 얼굴에 매겨진 번호를 따라 부동산 가격이 매겨지고 주거 선호도가 매겨진다. 이렇게 노골적일 수가!




새롭지 않은 할렘


이 번호는 내 마음 속에도 있다. 하지만 나는 차별은 본래 존재적 거리감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으로서 나는 흑인과 히스패닉을 만날 때 특별히 더 긴장한다. 아니, 저절로 긴장하게 된다. 그들의 문화도 모르고, 그들의 생김새도 낯설고, 그들의 억양이나 제스쳐도 알아듣지 못하다보니 저절로 신체가 경직되는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 거리감이 경계선(흑인‧백인‧황인)으로 굳어지고 또 위계지어질 때 차별이 생긴다.


할렘 탐방은 이 거리감을 기피하기보다는 즐겨보려는 내 나름의 시도였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내 몸이 낯섦을 한껏 느끼도록 내버려두고 싶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가 본 할렘은 어땠을까?


100가부터 125가까지 내가 더듬었던 것은 할렘 르네상스의 발자취였다. 할렘이 흑인 집중 주거지역으로 변모했던 시기는 세계 1차대전 이후다. 이곳은 질병, 빈곤, 실업 문제가 겹치면서 대표적인 빈민가로 낙인 찍혔지만, 동시에 흑인들의 독특한 문화도 탄생시켰다. 재즈, 힙합, 그래피티, 스트리트 댄스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평소에 이 장르를 즐기지는 않지만 할렘에서는 그 그림자라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래피티로 뒤덮인 학교 운동장, 흑인들이 노예 생활을 하던 시절에 발명한 소울 푸드 식당, 최초로 흑인들에게 무대를 열어준 아폴로 극장, 가스펠의 명성으로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 흑인 교회, 지하철 역에 서서 하릴없이 랩을 중얼거리다가 내게 매표소 기계 고장났다고 알려주었던 흑인 청소년까지. 이것이 다 할렘의 고유한 지표였다.


그러나 이런 디테일들에도 불구하고, 할렘 전체의 인상은 실망스러웠다. 공간이 풍기는 인상은 신체적으로 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약간 과장하자면 축소된 맨해튼 미드타운 같았다. 할렘의 중심 지구인 125가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형 마켓과 각종 브랜드 숍이 들어서 있었다. 비누나 향수에 섞는 향기 나는 오일을 파는 노점상이 신기하긴 했지만, 재개발 열풍 탓에 거리에 몇 개밖에 남지 않았다. ‘할렘’이라는 명성을 쌓아온 고유한 활동들은 그 활기를 잃거나, ‘아폴로 극장 투어’ 및 ‘가스펠 투어’처럼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상품화되었다.


21세기, 할렘은 달라졌다. 요새 할렘은 잠재적인 부동산 가치가 가장 높은 곳으로 손꼽힌다. 재개발이 가장 열정적으로 진행되는 ‘핫 플레이스’다.





잃어버린 시간의 동네


헌데, 150가 위로 넘어 가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정말 오래된 집과 거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집들은 19세기 말 주택 붐이 일면서 지어진 주택들이라고 한다. 주택 양식들은 하나하나가 다 특이했다. 아스팔트가 아니라 돌로 닦인 거리에는 차분함이 감돌았다. 할렘이라는 이름과 활기 없는 거리만 아니었다면 유럽의 한 민속촌에 온 줄 알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공간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대형 마켓들과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한 동네에 무려 2세기를 아우르는 시간이 주름 접혀 있는 것이다.


아직도 기억에 뚜렷이 남는 아파트 단지가 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단지는 굉장히 컸고 또 낡았다. 한국의 전형적인 단지 모양과 다른 것이 몹시 인상 깊었다. 일렬로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블록의 가장자리를 둘러싸면서 단지 내에 정원과 여러 샛길들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상복합단지처럼 럭셔리한 정원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정원의 식물들은 정돈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사람들이 오고 갔다. 빨래 하러 가는 사람들, 장 보고 온 사람들, 놀고 있는 아이들….




공간을 실제로 만들어가는 것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다. 할렘 거주민들의 고유한 제스쳐, 억양, 웃음소리를 들을 때, 나는 내가 할렘에 와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이 있기에 할렘은 여전히 특이한 공간이다. 그러나 최근에 흑인 거주민들이 할렘을 떠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재개발로 인해 집값이 계속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빈자리는 할렘 르네상스에 자부심을 느끼는 흑인 중산층, 혹은 색다른 것을 쫓아온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채우고 있다.


늘 그렇듯, 길 위에 서면 이전에 품었던 예상들은 빗나가게 된다. 할렘은 ‘낯선 흑인 동네’를 넘어서서 ‘낯선 시간의 화석’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할렘이 거쳐온 역사의 기념비화로, 다른 한편으로는 맨해튼이 잃어버린 오래된 시간으로.





경계의 문제


할렘의 시작은 흑인 게토였다. 빈곤, 질병, 실업의 중심지였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흑인들만 이곳에 정착했다. 그러나 할렘은 스스로 르네상스를 일으켰고, 그 독창적인 문화가 흑인에 대한 자부심을 낳았다. 이제 할렘은 개발 열풍으로 깨끗하게 단장되는 중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오히려 토박이 사람들은 밀려나고 있다. 아이러니다. 슬럼화와 문화 창조의 공존, 개발화와 공동체 파괴의 공존. 이런 할렘의 역사에 정말 백인과의 ‘평등’이라는 게 있었는가?


할렘에 대한 이 질문은 내 개인적인 고민과 연결된다. 한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다양한 기준이 필요 없다. 주류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선택지가 몇 개 없다. 그게 늘 답답했고, 삶의 여러 선택지가 공존하는 곳에서는 더 나은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수많은 기준들이 공존하고 또 충돌하는 이곳 뉴욕에 오니 다종다양한 것이 좋다고 단정지을 수가 없다. 인종 평등이 도대체 어떤 식으로 가능한 것인지는 더더욱 헷갈린다.


뉴욕에 오니 내가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느낀다. 김치 냄새에 코가 반응하고 한국식 발라드에 귀가 사로잡히는데 어쩌겠는가. 문제는,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다른 문화의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이 한국 문화에 관심이 전혀 없을 때 친구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나는 자연스레 고립된다. 또, 내가 무조건 상대방의 문화를 쫓아가기만 한다면 그것은 포장된 우정에 불과하다. ‘모든 인종과 국적을 불문하고 사람들은 평등하다’라는 명제는 친구를 사귀는 실전에서는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평등은 철저하게 감각적으로 터득해야 하는 가치다. 답은 따로 없다.


경계에는 꽃이 핀다. 피고, 또 진다. 보기 흉한 일도 놀라운 일도 모두 경계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이는 생각을 멈추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다종다양한 경계들’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것에도 탐방을 떠나는 것에도 게을러지지 않는 노력이(^^).



/사진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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