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여행기
여름 방학, 뉴욕을 뜨다
8월, 헌터 칼리지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지 만 6개월 만에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일주일에 열여덟 시간 밖에 공부를 안 한다 해도 숙제, 출석, 학점이 있는 이상 학교는 학교다. 단 사 주 밖에 안 되는 이 기간이 어찌나 달게 느껴지던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전 세계 사람들이 피서 철을 맞이해 뉴욕으로 몰려 드는 이 시기, 우리는 이 뉴욕을 탈출하기로 작심했다. 어디가 좋을까? 처음에는 플로리다를 노렸다. 겨울이 없다는 미국 남부의 꽃, 마이애미의 해변과 올랜도의 디즈니랜드로 유혹하는 플로리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중 누구도 면허증이 없다는 것이었다(-_-). 남부 하면 로드 트립인데, 차가 없이 어떻게 움직이겠는가. 결국 우리는 마음을 바꿨다. 도시로 가자. 도시라면 한 곳에 오래 머물러도 좋고 차가 없어도 좋다.
우리의 최종 선택지는 어디였을까? 미국에서 세 번째로 유명한 도시, 뉴욕에서 1시간 50분이면 도착하는 시카고였다.
예술적 빌딩, 압도적 도시
시카고! 재즈, 스캔들, 범죄의 도시. 한 번도 발 딛은 적 없으면서 내가 이처럼 쉽사리 단언해버린 이유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시카고’를 봤기 때문이다. 이 뮤지컬은 1930년대 시카고를 배경으로 하는데, 어떻게 범죄 사건이 언론을 통해 흥미진진한 예능으로 재포장되는지 보여준다. <다크나이트>(2008)에서 배트맨이 지키기 위해 애쓰는 ‘고담 시티’ 역시 시카고를 배경으로 탄생되었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시카고의 거리에는 음습한 범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 게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시카고에 가기 전 내가 허공 위에 그리던 이미지였다.
시카고 공항에서 다운타운에 도착하는 순간, 내 얄팍한 상상력은 흩어지고 말았다. 시카고는 첨단 빌딩의 도시였다. 크기, 높이, 디자인, 상상력까지, 이 모든 면에서 시카고의 빌딩들은 내가 믿어왔던 빌딩의 모습을 비껴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기막힌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런 기상천외한 마천루를 인간의 두 손으로 지을 수 있었을까? 빌딩들 한 채 한 채가 나를 압도했다. 그리고 그 빌딩들이 함께 모여 이루고 있는 도시의 모습은,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1871년, 시카고는 ‘시카고 대화재(The Great Chicago Fire)’를 겪었다. 이 화재는 19세기 미국에서 벌어진 가장 거대한 참사 중 하나로, 이로 인해 9㎢의 도심이 불탔고 십 만 명 이상의 홈리스들이 생겼다. 참사를 딛고 일어서기 위해 시카고 정부는 전 세계의 유명한 모던 건축가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시카고 자체 내에서 건축 인재들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한 세기 동안 각고의 노력을 들인 끝에, 시카고에는 질서정연한 거리들과 세계 어디에도 없는 특이한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구 시가지가 싹 쓸려나가고 일명 ‘모던 파리’가 세워지는 광경을 지켜보던 19세기 파리 시민들이 바로 이런 심정이었을까? 역시, 이 도시의 깔끔함은 뼈대부터 다시 설계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카고가 범죄로 유명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도 그 명성은 이어지고 있다. 시카고 다운타운 어디를 가나 ‘총기 금지’ 포스터가 붙어 있다. 밤 열 시만 넘어도 온 거리가 조용해진다. 무엇보다, 낮에는 그처럼 위엄 있던 마천루들이 밤만 되면 온 거리를 스산한 느낌으로 채운다. 이 거대한 빌딩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를 것 같다는 느낌 말이다. 빌딩과 빌딩 사이의 공터 역시 위험한 사각지대다. 건물이든 사람이든, 뭐든지 스물 네 시간 내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뉴욕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뉴욕 차이나타운 vs 시카고 차이나타운
그런데 시카고에 대한 나의 경탄은 차이나타운에 방문하면서 사그라들었다. 이게 왠 일인가? 우리는 두 눈을 의심했다. 도로를 꽉꽉 채우고 있는 중국인들도, 시도때도 없이 경적을 울려대는 차들도,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허름한 가게들도 없다. 그 대신 잘 닦인 보도블럭과 깨끗한 간판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가 놀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딱 하나, 우리가 뉴욕에서 왔기 때문이다. 뉴욕의 차이나타운은 혼잡과 혼란 그 자체다. 길들은 대각선 방향으로 꼬여 있다. 그 길들을 따라, 잡초들이 공터에서 들쑥날쑥 자라는 것처럼 온갖 종류의 가게들이 아무데나 불쑥불쑥 나타난다. 고급 레스토랑 옆에 버블티 가게가, 수산시장과 잡화점 사이에 절이 있다. 사람들은 또 얼마나 북적이는지 어깨를 부딪히지 않고 길을 걷기란 불가능하다. 이곳에 질서란 없다. 느낌 따라, 경험 따라 단골 식당을 찾아가는 것만이 답이다(^^). 이런 풍경을 예상했건만, 웬걸 시카고는 차이나타운까지도 깔끔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시카고의 차이나타운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 공간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시간과 특이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뉴욕 차이나타운에서는 이 이국땅에서 어떻게든 뿌리내리고 살아보겠다는 집념이 거리마다 팍팍 느껴진다. 난잡하고 정신없긴 해도 또 한편으로는 아주 역동적이다. 그에 비해, 시카고의 차이나타운은 외국인들을 위해 리모델링 된 ‘차이나 레스토랑’처럼 보였다.
그러자 문득, 화재 전후를 모두 지켜 본 시카고 사람들이라면 이 도시의 새로운 모습에 대해 어떻게 느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처럼 마냥 경탄만 했을까. 아니면 그때에도 역시 신식 건축 자재들 아래로 완전히 묻혀버렸던 옛날 삶의 흔적들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시카고의 밤
시카고의 두 번째 밤. 친구들과 함께 야경으로 유명한 존 행콕 빌딩의 꼭대기에 올라갔다. 손톱만한 점에서 시작해 시카고 시내를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쫙 모여드는 수만 개의 불빛들.
창문으로 내 잔영이 비쳤다. 불빛들에 둘러싸인 내 모습이 마치 우물 안 개구리 같았다. 서울에서 자랐고 방콕을 여행했고 뉴욕에서 살고 있는 이 정도의 경험이라면 ‘도시’에 대해서 알기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메트로폴리탄 도시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느냐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 문명에 압도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 앞에서 어떤 기분이었을지, 이곳 시카고가 나로 하여금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매끈한 시카고의 빌딩 숲 속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은 다름 아 뉴욕이었다. 모던의 최첨단이라는 쿨한 이미지 ‘뉴욕’이 아니라, 백 년 묵은 건물들 사이로 끝없는 발들이 때 묻히는 도시, 싫어도 서로 섞이고 부딪힐 수밖에 없는 도시, 사람들의 열기로 식을 줄 모르는 그 뉴욕. 그 열기 속에서야 나는 내가 정말로 뉴욕 안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 이곳 사람들의 열기를 느껴보지 못했다면, 나는 아직 시카고를 모르는 것이리라. 결국 도시의 진짜 에너지는 사람들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글/사진_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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