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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주역서당

내 몸의 소리를 관통하라 - 풍지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7. 3.

내 몸의 소리를 관통하라, 내 몸의 정치학 - 풍지관



지난 주 몸살을 심하게 앓았다. 봄부터 이어져온 피로가 한계치에 도달한 듯 병은 급작스럽게 닥쳤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억지로 일어나 걸으려고 하니 무릎이 삐걱거렸다. 허리도 아팠다. 이렇게 잘 움직이지 못하는 신체가 되자, 몸은 침대와의 뜨거운 포옹을 학수고대한 듯 잠이 쏟아졌다. 자고 먹고 싸기만을 한지 삼일 째, 시리던 무릎에 물기가 차오르고 다리에 힘이 붙었다. 식은땀이 흐르던 몸도 온기가 돌면서 순풍이 불었다. ‘격렬한 몸살’로 몸이 한 매듭을 짓고 리셋된 것이다. 이제 내 몸은 예전의 내 몸이 아니다. 가깝게는 올 봄을 마무리 짓고 닥쳐올 여름을 통과할 몸으로, 좀 더 멀리 보면 사십대 후반, 인생 장년기를 통과할 몸으로 리셋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올해 대운이 바뀐다. 그래서 이번 몸살은 한바탕 살풀이를 벌이고 내 몸의 지도가 다시 그려진 듯하다. 일명 ‘몸살 살풀이’라고나 할까?


이젠 쉬어야 해.....


‘몸살 살풀이’를 하는 동안 나는 내 몸을 면밀히 관찰했다. 몸살하기 전, 나의 생활은 어땠는지, 몸살을 하는 동안 몸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몸의 온도와 호흡, 맥박, 통증의 움직임까지. 내 몸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몸은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몸은 자신에게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구한다. 하여 몸은 스스로 복원된다. ‘내 몸의 정치학’은 이런 것이 아닐까? 정치의 제일 덕목이 ‘듣는 것’이고, 무릇 정치하는 것을 ‘청정(聽政)’이라고 하였으니 ‘내 몸의 소리를 듣는 것.’ 이것이야말로 수신(修身)을 넘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할 수 있는 정치의 첫 번째 윤리가 아닐는지.

『주역』의 괘들을 보면 정치적인 언사들이 많다. 오늘 볼 풍지관괘 또한 그렇다. 손하절(☴) 바람괘가 위에 있고 곤삼절(☷) 땅괘가 아래에 있어 땅 위에 바람이 불고 있으니 바람소리를 들으라, 곧 민심의 소리를 들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풍지는 ‘들을 청(聽)’이 아니라 ‘볼 관(觀)’자의 관괘다. 왜 풍지가 관일까?


땅 위에 바람이 불면 모든 것이 움직인다. 움직이면 소리가 나는데, 움직임을 본다는 것은 그 소리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풍지관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고, 그 움직이는 것을 보고 무엇을 구하는 소리인지 아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보는 관세음(觀世音)보살의 괘가 풍지관인 것이다.



풍지관 괘사


풍지관은 높은 데 올라가 아래를 조망하면서 세상을 살핀다. 그렇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넓은 시야가 확보되어 있어 아래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금세 알아차린다. 아래에서 뭘 구하는지 알아차렸으니 이제 그것을 들어주는 일만 남았다. 그걸 누가 하냐고? 당연히 임금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觀 盥而不薦 有孚 顒若(관 관이불천 유부 옹약)
관은 세수를 하고 (제사를) 올리지 아니하면, 믿음을 두어서 우러러보리라.


이 괘사는 구오 인군을 보고 하는 말이다. 관(盥)은 제사 지낼 때 술을 땅에 뿌려 신(神)을 영접하는 의식을 말한다. 이때 세수를 하고 손을 깨끗이 씻는 것으로 정성을 다했다. 구오 인군이 이러한 정성스러운 마음을 다하면 그 마음이 백성에게 전해져 믿음을 두게 되고, 백성의 마음과 인군의 마음이 서로 관통하게 되는 것이다.


彖曰 大觀 在上 順而巽 中正 以觀天下(대관 재상 순이손 중정 이관천하)
단전에 이르길 크게 봄으로 위에 있어서, 순해서 겸손하고, 중정으로 천하를 봄이니,

觀盥而不薦有孚顒若 下 觀而化也(관관이불천유부옹약 하 관이화야)
‘관관이불천유부옹약’은 아래가 보아서 화함이라.

觀天之神道而四時 不忒(관천지신도이사시 불특)
하늘의 신비한 도를 봄에 사시가 어긋나지 아니하니,

聖人 以神道設敎而天下 服矣(성인 이신도설교이천하 복의)
성인이 신비한 도로써 가르침을 베풂에 천하가 복종하느니라.


구오 인군이 양(陽)의 자리에 바르게 있고 내괘에서 중을 얻었다. 그러니 큰 정치를 하고 있다. 안으로는 곤삼절 땅괘의 덕으로 순하게, 밖으로는 손하절 바람괘의 덕으로 공손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큰 정치를 펼치니 백성들도 그 정치를 보고 감화를 받는다. 이러한 정치는 하늘의 도(道)와 함께 운행되는데 사계절의 운행이 한시도 어긋남이 없는 것과 같다. 하늘의 도와 성인의 도가 서로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象曰 風行地上 觀 先王 以 省方觀民 設敎(상왈 풍행지상 관 선왕 이 성방관민 설교)
상전에 이르길 바람이 땅 위를 행하는 것이 관이니, 선왕이 이로써 방소를 살피고 백성을 살펴서 가르침을 베푸느니라.


옛날의 우임금과 탕임금은 관괘의 상을 보고 가르치기 좋은 장소를 먼저 살폈다고 한다. 그리고 백성들을 살펴 『소학』이나  『대학』 등의 적절한 과목을 정해 가르침을 베풀었다. 여기서 바람은 가르침을 베풀어 백성들을 고무진작 시키는 것을 말한다. 하늘의 마음과 성인의 마음, 그리고 백성의 마음이 관통하는 자리에 ‘신바람 교육’이 펼쳐졌다니 참으로 놀랍다. 이로써 풍지관 괘사를 짧게 정리해보면, 관은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은 정치하는 것이고, 정치하는 것은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고로 관은 아는 것이다. 앎이 베풀어지는 곳, 알아차림이 관통될 때 정치는 비로소 땅 위에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풍지관 효사


初六 童觀 小人 无咎 君子 吝(초육 동관 소인 무구 군자 인)
초육은 아이의 봄이니, 소인은 허물이 없고 군자는 인색하니라.

象曰 初六童觀 小人道也(상왈 초육동관 소인도야)
상전에 이르길 ‘초육동관’은 소인의 도라.


음이 맨 처음에 있어 초육이다. 맨 아래에 있고 음의 자리이니 보는 것이 어린애 같다. 그래서 ‘동관(童觀)’이다. 사물을 보는 관점이 어린애같이 유치하다는 것이다.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소인에게는 이런 것이 허물이 되지 않지만, 적어도 남을 이끌어 가는 군자라면 어린애처럼 사물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


六二 闚觀 利女貞(육이 규관 이녀정)
육이는 엿보는 것이니 여자의 바름이 이로우니라.

象曰 闚觀女貞 亦可醜也(상왈 규관여정 역가추야)
상전에 이르길 ‘규관여정’이 또한 추함이라.



육이는 두 번째에 있고 음이라서 육이다. 음이 음자리에 바르게 있고 내괘에 중을 얻었지만, 구오와 멀리 떨어져 있어 틈으로 엿보는 정도다. 그래서 ‘규관(闚觀)’이다. 마치 규방에 있는 여자가 문틈으로 바깥을 살피는 것과 같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매우 좁다는 것을 말한다. 장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롱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을 가졌더라도 여자(소인)라면 문제될 것이 없지만, 군자라면 추잡한 일이다.  


六三 觀我生 進退(육삼 관아생 진퇴)
육삼은 나의 생김새를 보아서 나아가고 물러나도다.

象曰 觀我生進退 未失道也(상왈 관아생진퇴 미실도야)
상전에 이르길 ‘관아생진퇴’하니 도를 잃지 아니함이라.


자신의 꼬라지를 살펴라!

다음은 세 번째에 있고 음이라서 육삼이다. 육삼은 음이 양의 자리에 있고 중을 얻지 못해서 부당하므로 다른 괘라면 좋지 않다. 하지만 관괘에서 육삼은 내괘가 끝나는 자리에 있어 외괘로 나아갈 것인지, 내괘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전환점에 처해 있다. 육삼이 나아가고자 하나 음효라 추진력이 부족해 섣불리 나아갈 만한 처지가 못 된다. 그렇다고 물러나고자 하나 맨 꼭대기의 상구와 정응하니 뿌리치고 물러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방법은 스스로를 살피는 수밖에 없다. 나의 생김새, 내 꼬라지를 살피는 것이다. 육삼은 자기를 발견할 정도는 된 것이다. 그래서 ‘관아생(觀我生)’이다.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아 진퇴를 결정하는 것. 육삼은 자신의 재주와 덕을 잘 살펴 외부 상황에 주체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九四 觀國之光 利用賓于王(육사 관국지광 이용빈우왕)
육사는 나라의 빛을 봄이니, 왕에게 손님대접을 받는 것이 이로우니라.

象曰 觀國之光 尙賓也(상왈 관국지광 상빈야)
상전에 이르길 ‘관국지광’은 손을 숭상함이라.


음이 네 번째에 있어 육사다. 육사는 음이 음자리에 있어 바름을 얻었고, 위로 중정(中正)한 구오 인군과 친밀한 관계다. 육사와 구오는 각기 음효와 양효로서 바름을 얻었으니, 제대로 된 신하와 군주의 만남이다. 군주가 빛나는 정치를 하니 육사는 그 빛을 본다. 여기서 관광(觀光)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관광의 본래 뜻은 그 나라의 정치가 잘되고 있는지 어떤지를 보는 것이다. 따라서 육사는 인군의 손님이 되어 명군주의 통치를 지켜보는 것이 이롭다.


九五 觀我生 君子 无咎(구오 관아생 군자 무구)
구오는 나의 생김새를 보되, 군자면 허물이 없으리라.

象曰 觀我生 觀民也(상왈 관아생 관민야)
상전에 이르길 ‘관아생’은 백성을 봄이라.


관아생은 자기 스스로를 살피는 것


양이 다섯 번째에 있어 구오다. 구오는 중정을 얻었고, 아래로 육이와 정응하니 군주의 자리에서 갖출 것을 다 갖추었다. 육삼은 진퇴를 결정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그런데 구오는 인군의 자리이므로, 여기서 ‘관아생(觀我生)’은 자기가 한 정치를 돌아보는 것이다. 군주의 정치는 백성을 보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백성은 인군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백성이 편안하면 군주 자신도 편안하고, 백성이 편안치 못하면 군주 자신도 편안치 못하다. 그러니 백성을 잘 살피는 것은 곧 자기 스스로를 잘 살피는 것이다. ‘자기로부터의 정치.’ 정치의 첫 단추는 항상 자기로부터 시작된다.


上九 觀其生 君子 无咎(상구 관기생 군자 무구)

상구는 그 생김새를 보되, 군자면 허물이 없으리라.

象曰 觀其生 志未平也(상왈 관기생 지미평야)
상전에 이르길 ‘관기생’은 뜻이 평안치 않음이라.


양이 맨 위에 있어 상구다. 상구는 구오와 같이 양으로 군자다. 구오의 ‘관아생(觀我生)’은 나를 살핌으로써 결국 백성을 살피는 것이었지만, 상구의 관기생(觀其生)은 살피는 주체가 내가 아닌 타자다. 즉 나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살핌을 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살핌의 주체였던 구오가 상구로 옮아가면서 살핌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상구는 이처럼 모든 사람으로부터 살핌을 당하니 평안치가 않다. 그러나 군자라면 공명정대하여 허물이 없겠지만, 군자가 아니라면 어떨까? 아마도 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만신창이가 되고 말 것이다. 요즘 매스컴에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정치 인사들의 낙마가 그 좋은 예다. 남을 이끌어 갈 군자라면 백성들을 잘 살펴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동시에 백성들로부터 철저히 살핌을 당해 그 자질을 검증받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백성들을 이끌어가는 자리에 임할 수 있는 것이다.  

몸살을 앓고 난 후 풍지관을 만났다. 내 몸의 소리를 듣고, 관찰하고, 이해하는 가운데 몸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복원시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것은 풍지관의 ‘관아생’과 다르지 않다. 구오 인군이 자기 자신을 잘 살피는 것이 바른 정치를 구하는 첫걸음이듯, 내 몸의 소리를 듣고 그 움직임을 보고 기운을 통하게 하는 것 역시 바른 정치를 펼치는 것이다. 하여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 몸의 소리를 관통하라.’ 내 몸의 정치학이 곧 성인의 정치, 하늘의 정치다.  



이영희(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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