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사랑하는 법, 영어로 사랑하는 법
뉴욕 행이 결정되었을 때,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참 좋은 기회라면서 자기 일처럼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영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학교 다닐 때도 학교를 나와서도, 나는 도통 외국어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일본어, 중국어, 한문과 영어가 자유롭게 섞이는 연구실에서 5년을 붙어 있었지만 그 동안 제대로 익힌 외국어는 하나도 없다.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본 경험도 없다. 가진 거라곤 내 영어 실력에 대한 불신 뿐이다.
이렇다보니, 출발하기도 전에 내 머릿속에서는 하찮은 걱정거리들이 끊이질 않았다. 내가 과연 학교를 찾아갈 수 있을까? 은행 업무를 처리하고, 핸드폰 계약을 하고, 병원에서 증상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을 만나고 친구를 사귈 수나 있을까?
영어 울렁증
그때 고미숙 선생님(곰샘)께서 말씀하셨다. 어차피 시간이 걸릴테니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6개월 정도 있으면 귀가 뚫린다고. 그때는 그 말에 안심했으나, 그 6개월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은 몰랐다. 벌써 7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귀가 뚫렸는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여러 경험들을 통하면서 영어 울렁증에서는 벗어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중학교 밖에 졸업하지 않고 연구실에 눌러 앉아 무작정 책들을 읽어갔던 것도 일종의 ‘외국어’ 익히기였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베껴쓰고, 반복해서 읽고, 암송하기도 하면서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 외국어를 익히는 것이 과연 이것보다 더 어렵겠는가? 게다가, 암만 영어 공부에 게을렀다 해도 나는 영어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덕분에 다섯 살에 알파벳을 떼고, 열 살부터 영어학원에 등록되었으며, 중학교 때는 남들 다 하는 필리핀 연수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데도 영어에 대한 자신감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내 실제 영어 실력과는 무관하게 늘 ‘영어울렁증’이 올라왔다. 이 비정상적인 반응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영어를 바라보는 관점이 ‘잘 한다’ ‘못 한다’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하든, 내가 입을 열면 ‘모자란 영어’가 나오게 된다. 결국 나는 영어가 아니라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이 마음 밑바닥에는 영원한 1등, 완벽한 영어가 전제로 깔려 있다.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ker)의 영어.
완벽한 관계도, 완벽한 언어도 없다
이 해묵은 애증관계는 뉴욕에 와서야 청산되었다. 바로 영어로 친구들을 사귀면서부터다. 세계의 수도 뉴욕답게, 이곳에서 나는 일본, 대만, 중국, 태국, 남미, 러시아 등등 여러 국적의 친구들과 만나는 중이다. 그리고 외국어에 빈곤한 내가 이 친구들과 함께 놀 수 있는 건 순전히 영어 덕분이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가 영어를 굉장히 잘하는 것 같지만(ㅋㅋ) 딱히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서로 사용하는 패턴은 몇 가지밖에 안 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이어가는 데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문장은 몇 번씩 되물어보면 어떻게든 알아 들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로의 괴상한(?) 발음, 화법, 농담 스타일에 점점 익숙해진다. 말을 캐치하고 대꾸하는 속도도 빨라지고, 영어 표현들도 따라하게 된다.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서로의 영어 역시 물리적으로 섞인다.
무엇보다도, 말의 정확함이 관계를 좌우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 알아들을 수 없어도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기질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때 즐거워하고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런 정보는 언어 뿐만이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교류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그때 나는 집에 더 일찍 들어온다는 이유로 내게 전기세를 더 물린 룸메이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영어를 쓴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영어를 사용하는데 어떤 망설임도 불편함도 없었다. 영어가 내 분노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내 몸의 분노가 친구를 향해 내 영어를 끌어올린다는(?) 기분이었다.
모국어를 쓸 때조차 완벽한 의사소통을 하는 관계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서로에게 모자란 외국어를 쓰는 것을 꺼려할 이유도 없다. 과거에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영어를 좋아할 수 없었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그 영어는 관계를 떠난 죽은 영어였다. 실제 관계에서 중요한 건 영어 그 자체가 아니다. 이 빈곤한 영어를 통해 서로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느냐, 어떤 관계를 맺어가고 있느냐다. 친구들끼리 한바탕 웃고 난 후면 내가 이런 덜떨어진 영어라도 할 수 있어서 참 좋고, 아시아인의 발음이 섞인 잡탕 영어라도 ‘괜찮다’는 기분이 든다. 책읽기와 글쓰기가 아무리 고되도 지난 5년이 즐거웠던 이유는 연구실 사람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결국 영어를 사랑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영어로 친구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수많은 문법들 속에서
그렇다고 내가 영어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상과는 달리, 나는 현재 스피킹과 리스닝이 아니라 라이팅에서 힘을 못 펴고 있다. 연구실에서 오 년 동안 글쓰기를 전수받은 것이 무색하게도!
처음에는 엉망진창인 문법이 문제였다. 에세이의 절반 가까이 되는 비문 속에 내 원래 의도는 묻혀버렸다. 하지만 수업은 영어 문법만이 아니라 글쓰기 문법도 요구했다. 우선 주제에 대해 무조건 ‘찬/반’의 입장을 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주장을 ‘원인-결과’의 순서에 따라 증명해야 한다. 문제는 내가 이 앞에서 완전 무력하다는 것. 글의 시작부터, “Yes” 혹은 “No”를 선언해야 하는 그 지점부터 입이 잘 안 떨어진다. 문제를 칼로 무 자르듯이 반토막내고 나면 갑자기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된다. 혹시 나는 학교를 안 다닌 게 아니라 ‘못 다닌’ 게 아닐까? 그렇다, 이거야말로 참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내가 아카데믹한 글쓰기를 안 쓰는 게 아니라 사실은 못 쓰는 것이다!
이건 영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단순한 영어 문법말고도, 영어라는 매트릭스 속에는 삶과 직결된 여러 종류의 문법들이 존재한다. 미국 학교에서 가르치는 생각의 문법, 까칠한 뉴요커들이 요구하는 대화의 문법, 대형 슈퍼마켓이 간직한 물건 분류의 문법(익숙해지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미국 뉴스가 보여주는 국제사회에 대한 문법 등등. 이것들 역시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 이 문법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답을 찾지 못했지만, 이 문법들까지 넘어서게 될 때 영어를 좀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본다(^^).
글·사진. 김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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