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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백수는 고전을 읽는다

나도 말을 잘하고 싶다!! - 막말쟁이의 고민

by 북드라망 2012. 1. 9.
논어로 만난 말의 달인, 공자

류시성(감이당 연구원)

“선생님! 전 언제쯤 천왕동이처럼 될 수 있을까요?”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

“있잖아요, ‘그거’.『임꺽정』에 보면 천왕동이가 ‘문자’를 막 쓰면서 말을 하잖아요. 백두산에서 굴러먹다가 내려와서는 사람들하고 말을 섞는데, 어휘가 딸려서 매번 말끝을 흐리잖아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왕후장상이 영유종호아’(王侯將相 寧有種乎: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라는 문자를 쓰면서 말을 하잖아요. 저도 언제쯤이면 그렇게 말을 잘할 수 있을까요?”

“으이그! 너는 그래서 안 돼! 문자 쓰는 게 말을 잘 하는 거냐? 맥락에 맞아야지. 만날 맥락하고는 상관없는 말만 하는 너랑 천왕동이가 비교가 돼? 제발 맥락을 좀 파악하고 말을 해라!”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을 읽고 고미숙 선생님과 나눈 대화다. 그렇다. 나는 막말쟁이다. 연애를 하면서도 세미나를 하면서도 막말을 일삼는다. 그렇다고 어휘가 풍부한 것도 아니다. 항상 어휘가 딸려서 말끝을 먹는다. 처음엔 뭔가 거창한 걸 말하려는 듯이 시작하지만 끝으로 가면 갈수록 그 창대함(?)은 온데간데없다. 일순간 흐르는 적막. 거기다 말까지 느려 터져서 사람들 속을 새까맣게 태우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말을 좀 똑바로 해라!’라는 주문(注文)을 정말 ‘주문’(呪文)처럼 달고 사는 이유다. 그런데 이 정도면 다행이다. 하는 말도 대부분 맥락과는 거리가 멀다. 세미나 도중에 주제와는 상관없는 ‘샛길’로 빠지기 일쑤고 열띤 토론에 찬물을 끼얹는 말을 날리는 게 다반사다. 그러니 천왕동이처럼 말의 ‘진화’를 경험하고 싶다는 강력한(!) 욕망은 내 나름의 실존적 고민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 질문마저 ‘뜬금없는’ 말이 되어 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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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子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자왈 군자욕눌어언이민어행).

군자는 말에는 어눌하고자 하고, 실행에는 민첩하고자 한다. 문장만 봐서는 나 같은 말-젬병이들이 환호할 만하다. ‘그렇지. 성인은 잘난 놈만 보살피는 건 아니지. 나처럼 말 못하는 인간들을 위해서 공자님도 한 말씀 남겨 두셨군! 어눌하게 말하는 게 군자란 말이지?’(정신승리법은 사람을 늘 유쾌하게 한다?^^) 하지만 문장의 의미를 알면 이런 오만은 눈 녹듯이 녹아 버린다. ‘말을 어눌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말을 신중하게 가려서 하는 것을 이른다. 상황에 맞는 말을 하려고 고심하는 모습이 어눌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정도로 삼가고 갈고닦아서 말을 내야 군자라 할 만하다.’ 말이 나온 ‘맥락’을 놓치지 않는 센스, 군자의 필수요건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도 맥을 짚는 데 완전 실패!

그런데 위의 문장은 말 잘하는 ‘것들’을 겨냥한 공자의 질타다. 공자의 제자들 가운데 말 잘하는 인간들은 부지기수였다. 나처럼 항상 나서기를 좋아하는 자로(子路)나 언술에 뛰어나 가끔 공자를 ‘들뜨게’ 했던 자공, 자유, 자하. 이들은 그야말로 청산유수처럼 말 잘하기로 소문난 제자들이다. 그런데 왜 부럽도록 말 잘하는 이들을 공자는 경계했을까? 그건 말이 행동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기도 하지만 말의 힘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공은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가 전쟁의 위험에 처하자 순전히 ‘말빨’로 그 위기를 넘어가게 한다. 그만큼 말의 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엇이다. 천왕동이처럼 백두산에서 외따로 지내던 인간이 ‘속세’에서 우정을 나누고 사랑하고 그 무시무시한 꺽정이에게 대들 수 있었던 것도, 청석골 원조 화적 오가가 무지막한 힘의 소유자들 사이에서 당당히 7두령으로 뽑힐 수 있었던 것도 이 말의 힘이다.(궁금하면 소설『임꺽정』을 읽어 보시라.^^) 소통하고 존재를 표현하고 삶의 비전을 섞는 말! 그러니 이 말을 두서없이 쏟아내는 건, 좀 부끄러운 일이다.

앞으로 보게 될『논어』는 이런 말의 세계다.『논어』는 혼자 조용히 앉아서 고심하며 만들어 낸 텍스트가 아니다. 같이 공부하고 생활하고 사건이 벌어지는 구체적인 ‘현장’에서 공자와 제자들이 나눈 ‘말의 기록’이다. 한마디로 대화록이라는 말이다. 문제적인 건 그 말의 세계가 2500년간 동아시아의 사상적 지반이었다는 점이다. 일상에서 길어 올린 말이 2500년 동안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문제적 ‘사건’이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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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 사건의 핵심인물인 공자는 얼마나 말을 잘했을까. 말 잘하는 것들을 극도로 싫어했던 공자지만『논어』에서 공자는 그야말로 ‘말의 달인’이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감동적인 말부터 정말 따분해서 견디기 힘든 말까지, 공자가 넘나드는 말의 영역은 실로 무제한이다. 뒷담화에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주신다. 좋은 말이건 나쁜 말이건 이미 공자가 다 해버렸다는 푸념을 늘어놓게 만들어 주신다. 그런데 공자만 그런 게 아니다. 부처도 예수도 그랬다. 사실 이들이 구름떼 같은 사람들을 몰고 다닐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들이 말의 달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을 장악하고 삶의 지평을 넓혀 주는 지혜를 전하는 말을 하기로 이들을 따를 자들이 없다. 화술계의 天上天下 唯我獨尊(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나 할까.(여기에 이런 ‘말’을 써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헌데 왜 ‘저들’의 말은 그토록 강력하고 우리의 말은 이토록 비리비리하기만 한가. 저들도 우리처럼 사람들 속에서 먹고 자고 싸고 말하며 살아가지 않았던가. 여기에 도대체 뭔 차이가 있다고 이처럼 극심한(!) 격차를 보이는가 말이다. 저들이 타고난 성인이어서? 훌륭한 제자들을 만나서? 그렇다면 할 수 없다. 하지만 오히려 자기 삶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걸 회피하지 않고 돌파하려고 할 때 그런 말들은 생산되는 게 아닐까? 그 삶의 밀도가 삶의 문턱들을 넘게 하는 말로 주어지는 건 아닐까? 그렇다. 차이는 이것뿐이다. 문제가 생기면 대충 얼버무리고 회피하고 돌아가려고 하는 우리와는 완전 다른 삶의 태도! 공자나 부처나 예수나 모두 사람들을 감복시키는 말의 달인이 될 수 있었던 건 다 이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불경이나 성경,『논어』를 읽는다는 건 단순히 말들의 세계와 접속하는 것만이 아니다. 가장 범속한 세계에서 가장 범속하지 않은 방식으로 살다간 삶과 접속하는 일이다. 한편의 시트콤에서 수많은 뒷담화 시리즈, 삶과 인생에 대한 통찰을 담은 말의 향연을 뚫고『논어』에서 우리가 만나야하는 건 공자의 치열한 삶이다.

『논어』는 공자의 저서가 아니다. 공자 사후 공자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제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책이다. 전체가 20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체가 500문장이 넘는다. 각 편의 이름도 알고 보면 재밌다. 그 편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문장에서 앞의 두 글자로 편명을 달았다. 「學而」편은 첫 문장인 ‘子曰 學而時習之’에서 따왔다. 다른 편명들도 다 이런 식이다. ‘무슨 경전이 이래?’라고 비웃을 만하다. 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재밌다. 뭐 경전이란 게 처음부터 경전이었나? 뭔가 조악해 보이면서도 뭔가 꾸미지 않은 담백한 느낌이랄까. 그 내용도 이런 문장이 경전에 들어가도 되나 싶은 문장들도 많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너무 당연한 말만 하는 책들, 그림 없는 책들 우리는 미워하지 않는가.^^ 인물들도 다양하다. 공자의 제자들부터 당시 지배계급, 은자들, 다른 학파의 사람들 등등. 그 인물들만 살펴봐도 상당히 흥미롭다. 몇 명이 나오는지는 아직 세어 보지 않았다. 아무튼 많이 나온다.^^

나머지 이야기는 차차『논어』를 읽어가며 계속...

류시성  지리산 자락에서 나고 자랐다. 어릴 때 집이 목장을 한 덕분에 나도 소들과 함께 ‘방목’되었다. 그 영향으로 20대 내내 집밖을 떠돌았다. 알바하고 술 마시고 여행했다. 뭘 얻었냐고? 병과 무지! 그럼 지금은? 내 병은 손수 고치려고 <감이당>에서 사람들과 한의학을 공부하고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양고전을 읽는다. 같이 지은 책으로 『갑자서당:사주명리 한자교실』, 『몸과 삶이 만나는 글, 누드 글쓰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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