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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백수는 고전을 읽는다

스승 공자의 '미친 존재감'

by 북드라망 2012. 2. 6.
무상사(無常師)의 길

류시성(감이당 연구원)

衛公孫朝問於子貢曰 仲尼焉學
위공손조문어자공왈 중니언학
子貢曰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자공왈 문무지도 미추어지 재인 현자식지대자 불현자식기소자 막불유문무지도언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子張 22)
부자언불학 이역하상사지유

위나라의 공손조가 자공에게 물었다. “중니*는 어디서 배웠는가?”
자공이 말했다. “문왕과 무왕의 도가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남아 있다. 어진 사람은 그 근본적인 것을 알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그 지엽적인 것을 안다. 문왕과 무왕의 도가 있지 않는 곳이 없으니 선생님께서 어찌 어디서인들 배우지 아니하시며, 또 어찌 일정한 스승이 있겠는가?”

* 중니 : 공자의 자를 뜻함


공자 사후(死後). 노나라의 한 관리로부터 자공은 이런 말을 전해 듣는다. ‘자공이 중니보다 낫다.’ 그러자 자공은 즉각 답한다. ‘내 담은 어깨 정도 높이여서 집안의 좋은 것을 다 들여다볼 수 있지. 그런데 선생님의 담은 몇 길이나 돼서 문을 얻어서 들어가지 않으면 그 안을 볼 수 없지.’ 자신은 밖에서 봐도 훤히 다 보이는데 스승은 문으로 들어가야만 그 진경(眞境)이 보인다는 화려한 찬사! 좀 심한 거 아니냐 싶을 정도지만 빈말이 절대 아니다. 실제로 제자들에게 공자는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은 존재였다.『장자』에서 공자보다 뛰어난 인물로 그려지는 안회 또한 선생님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늘 하소연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문장도 사실 그런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가득 담고 있다. 요즘 말로 하면 ‘니 선생 어디 대학 출신이야?’라는 질문에 제자는 ‘선생님의 배움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라고 답하는 식이다. 무슨 통신사 광고에서나 들릴 법한 시도 때도 없이 배운다는 이 배움-지상주의. 더구나 공자도 스스로를 늘 배우기 좋아하는 자(好學者)라고 선언해 주신 바 있으시다. 그만큼 ‘배움’[學]에 대한 열정은 남부러울 것 없었던 게 공자였던 셈이다. 제자들이 공자를 높이 평가하는 것도 다른 게 아니다. 학문적 성과도 성과지만 언제 어디서나 발휘되는 이 초인적인(!) 열정. 공자가 제자들을 자유자재로 후릴(?) 수 있었던 가장 큰 무기도 바로 이것이었음은 분명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말은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은 말한 바를 고려한다"고 말한 공자는 제자들에게 스스로가 군자의 도리 네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도 잘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스승의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대화의 중심인물 자공도 열정에 관한 한 공자에 뒤지지 않는다. 일단 자공은 공자의 3000 제자 가운데 베스트 오브 베스트 10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정도로 유능한 제자였다. 한번은 노나라가 전란의 위기에 휩싸이자 자공은 순전히 ‘말빨’로 그 전란을 피하게 만든다. 공자 또한 사태를 진정시킬 유일한 인물로 자공을 지목했다. 그만큼 공자에게도 인정받는 제자였던 것. 거기다 자공은 엄청난 갑부이기도 했다. 돈과 명예. 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완소남(?)의 이미지. 뭐 이 정도면 굳이 공자에게 배우지 않아도 한 세상 살 만 했을 터인데 자공은 스승을 놓지 않았다. 돈과 명예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엇, 그것을 스승이 채워주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무튼 공자에 대한 자공의 열정은 공자 사후에도 계속된다. 공자가 죽자 자공은 공자의 3년상에 필요한 어마어마한 비용을 다 자비로 부담한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3년상을 치르고 다른 제자들이 떠나 버린 공자 옆에서 3년을 더 머문다. 도합 6년상을 치르고서야 스승을 떠나는 제자. 이 제자가 스승에 대한 ‘사랑과 정열’을 표하는 문장이 바로 이 문장인 것이다.

일단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무지도(文武之道)가 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문무(文武)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문(文)과 무(武)가 아니다. 여기서의 문무(文武)란 주나라를 세운 문왕과 무왕을 가리킨다. 이들은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을 죽인 인물들이다. 당시 문왕과 무왕은 은나라의 신하였지만 역성혁명을 통해서 새 왕조를 건립한다. 신하된 자로서 왜 하극상까지 해가며 왕을 죽을 수밖에 없었냐고? 여기도 다 이유가 있다. 주왕은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유명한 왕이다. 주지육림이란 쉽게 말해서 지극히 음탕한 파티문화라고 보면 된다. 여자들은 옷을 훌러덩 다 벗고 서빙을 하고 커다란 호수에는 술이 가득하고 안주는 숲을 이루고! 왕이 이 파티 삼매경에 빠져 있으니 나라꼴이 말이 아닌 건 당연한 일. 더구나 충신들이 간언을 하면 그 충신의 심장을 산 채로 꺼내서 회를 쳐주시니 누가 그를 말릴 수 있겠는가. 때문에 이후 주왕은 동아시아 폭군의 대명사로 자리 잡는다.
 
폭군을 죽인 게 뭐 잘못이랴만은 이게 발단이 되어 향후 2500년 동안 박 터지게 싸우기에 이른다. 우리가 잘 아는 백이․숙제가 등장하는 것도 이때다. 그들은 무왕이 주왕을 치기 위해 출전하자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서는 말한다. ‘신하가 왕을 죽이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이오?’ 하여 신하로서 왕을 정벌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한 무왕이 옳으냐 아니면 끝까지 신하로서의 정절을 요구한 백이․숙제가 옳으냐의 문제는 동아시아 유학자들이 풀어야할 영원한 숙제였다. 공자는 이 숙제에 대한 답으로 문왕과 무왕의 손을 들어줬다. 백이․숙제도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한 의인(義人)이긴 하지만 백성을 구한 문왕과 무왕에겐 미치지 못한다는 것. 즉, 공자에겐 명분 따지기보다 백성을 먼저 살리는 정치를 펴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던 셈이다. 이후 공자가 요순우탕으로 이어지는 성인(聖人)들의 계보에 이들을 포함시킨 것도 다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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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맥락에서 보자면 文武之道란 곧 성인의 도(道)다. 자기 뱃속 불리기에 바쁜 인간들이 아니라 자기를 수양하여 백성들의 삶을 평안하게 만드는 성인의 길. 공자가 어디서든 배우고자 했던 건 다름 아닌 이 삶의 기술이었다. 성인의 도(道)로 다스려지던 주나라 초기와는 다르게 전쟁과 살육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공자가 주장한 것도 이 지혜의 회복이었다. 헌데 이걸 단순히 과거 성인들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복고적 퇴행’으로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공자가 이들에게서 배우려고 했던 건 인간이 인간과 살아가는 데 있어서 조화로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 삶의 공간을 ‘지금, 여기’서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질문이었다. 공자는 이 문제들을 돌파할 지혜의 보고(寶庫)가 요순우탕문무가 살던 시대라고 믿었다. 그러니 어찌 그들의 삶에서 배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놀라운 건 현자(賢者)든 불현자(不賢者)든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린 보통 현자에게만 배우려고 하지 불현자에게서는 절대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허나 공자는 다르다. 현자에게는 현자만이 줄 수 있는 배움이 있고 불현자는 불현자로서 줄 수 있는 배움이 따로 있다. 그러니 그 둘 사이에 위계가 없음은 물론이다. 배움이라는 차원에서는 둘 다 내 스승일 뿐이다. 더구나 아직 성인의 道가 그 사람들에게 있으니 누굴 가린단 말인가. 그 성인의 길 혹은 군자(君子)의 길을 가기 위해서 매순간 ‘제자’이기를 자처하는 자.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 자기 존재를 다 거는 자. 그가 바로 공자였고 공자 삶의 중심이었다. 공자가 그 많은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배움이라는 고집스러운 길을 갈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때문이다. 바람만 불면 휙휙 날아가는 중심이 아니라 이걸 통해 내가 세상과 한판 맞짱 뜨겠다는 삶의 중심. 그리고 그것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열정. 스승 공자가 제자들에게 줄 수 있었던 가장 커다란 선물은 아마도 이런 ‘열정의 길’이 아니었나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앎의 크기가 내 존재의 크기를 결정한다. 주류적 척도로부터 벗어나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열정, 자본과 권력의 외부를 향해 과감하게 발을 내디딜 수 있는 내공. 공부는 무엇보다 이 열정과 내공을 쌓아가는 과정이다.
—고미숙,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18쪽


정해진 스승은 없다. 어디서나 배움의 장은 열린다. 당나라 때 유학자 한유는 이 문장을 성인무상사(聖人無常師)라는 말로 멋지게 정리했다. 성인에게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는 것. 대신 이 무상사의 길은 엄청난 스승들로 넘쳐나는 길이라는 것. 삶을 살아가다가 어디서든 배우고 어디서든 그것을 내 삶의 현장과 연결시키고. 여기서 공자는 스스로 살아갈 삶의 중심과 기술을 터득하라고 말한다. 그게 곧 배움의 전부다. 자기 삶을 가장 고귀하게 만들겠다는 의지. 자기 삶을 지극히 사랑하지 않은 자에게서는 분출될 수 없는 열정. 공자가 성인들의 길을 가고자 그들의 지혜를 간절히 좇았듯이 우리도 우리의 길을 가야 한다. 스승은 따로 없다. 우린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 되어 줄 수 있을 뿐!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述而 21)
자왈 삼인행 필유아사언 택시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세 사람이 길을 가는데 반드시 거기에 내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자를 가려서 따르고 선하지 않은 사람을 가려서 잘못을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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