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불염정 회불염세 사의이애 어뇌이육패 불식 색악불식 취악불식 실임불식 불시불식
割不正 不食 不得其醬 不食 肉雖多 不使勝食氣 唯酒無量 不及亂
할부정 불식 부득기장 불식 육수다 불사승사기 유주무량 불급난
沽酒市脯 不食 不撤薑食 不多食
고주시포 불식 불철강식 불다식
祭於公 不宿肉 祭肉 不出三日 出三日 不食之矣
제어공 불숙육 제육 불출삼일 출삼일 불식지의
食不語 寢不言 雖疏食菜羹 瓜(必)祭 必齊如也(鄕黨 8)
식불어 침불언 수소사채갱 과(필)제 필재여야
자른 것이 바르지 않으면 먹지 않으시고, 그 장을 얻지 못하면 먹지 않으셨다. 고기가 비록 많으나 밥의 기운을 이기게 하지 않으시며, 술은 일정한 양이 없으셨으나 어지러움에 이르지 않게 하셨다.
시장에서 산 술과 포를 먹지 않으시며 생강을 먹는 것을 거두지 않으시며 많이 먹지 않으셨다.
나라에서 제사 지낼 적에 받은 고기는 밤을 재우지 않으셨으며, 집에서 제사 지낸 고기는 3일을 넘기지 않으셨으니, 3일이 지나면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을 적에 대답하지 않으시며, 잠잘 적에 말씀하지 않으셨다. 비록 거친 밥과 나물국이라도 반드시 고시레하시되 반드시 공경히 하셨다.
『논어』20편 가운데 「향당(鄕黨)」은 어렵기로 유명하다. 일단 한자만 봐도 그렇다.『논어』가 아니면 생전에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 쓰지 않는 한자들이 마구 등장해 주신다. 더구나 이게 ‘누구’의 이야기인지도 불분명하다. 일설에는『예기(禮記)*』에 있는 것을 편집해서 넣었다고도 하나 확실한 건 아니다. 그래서인지『논어』를 강독할 때면 그냥 건너뛰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만큼 정체를 알 수 없는 편이면서 동시에 가장 하대(下待)받는 편인 것.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선비들에게 「향당」은 가장 인기가 높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뭇 선비들을 잡아끈 「향당」만의 매력은 무엇이란 말이던가.
향당(鄕黨)은 원래 주(周)나라 때의 행정단위였다. 구체적으로 향(鄕)은 12,500호, 당(黨)은 500호를 가리킨다. 그러나 행정단위로서의 의미보다는 ‘자기가 태어난 곳이나 살고 있는 시골 마을, 또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따지고 보면 그저 ‘마을 이야기’ 정도 되는 게 「향당」인 셈이다. 그 주인공이 공자라면 당연히 공자가 마을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여 주는 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향당」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공자는 기존의 공자와는 사뭇 다르다. 가령 패셔니스타 공자, 미식가 공자, 생활인 공자 등이 수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향당」은『논어』내에서도 ‘독특한’ 공자를 만날 수 있으면서 말이 아니라 생활이나 행동으로 공자를 재구성할 수 있는 편이다. 공자를 닮는 것이 선비들이 가진 지상최대의 목표였다면 「향당」이 그 훌륭한 지침서가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록인『논어』에 불현듯 끼어들어 선비들을 열광하게 했던 이질적인 편, 그게 바로 오늘 우리가 만날 「향당」이다.
위에 소개된 문장은 공자의 식(食)시리즈 가운데 완결판에 해당하는 문장이다. 원문만 봐서는 일말의 감조차 오지 않는 글자들 덕분에 어지럼증[亂]이 일어날 정도지만 그래도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바로 불식(不食)이다. 뭘 먹지 않았다는 건지 절대(!) 모르겠지만 등장하는 빈도를 봐서는 아주 많은 것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공자가 不食했던 것들 사이에는 중요한 키워드들이 숨겨져 있다. 바로 시(時)와 중(中)과 재(齊)가 그것이다. 식(食)시리즈라고 해서 그냥 먹는 이야기만 주구장창 등장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먹는 일에도 공자의 철학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우선 시(時). 時란 ‘때에 맞음’이다. 배울(學) 때도 ‘때에 맞게’ 해야 함을 강조했던 공자는 먹는 일에도 ‘때를’ 놓지 않는다. 가장 눈에 띄는 구절은 불시불식(不時不食). 단순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해석은 분분하다. ‘밥때가 아니면 먹지 않았다.’ 혹은 ‘제철이 아니면 먹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때에 맞지 않으면 절대 먹지 않았다는 것. (시도 때도 없이 먹는 우리와는 좀 다르다.) 상한 것이나 부패한 것을 먹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음식을 먹어야 할 ‘때’를 놓쳐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만든 것도 ‘때에 맞게’ 음식을 처리하지 못한 탓이다. 나라에서 제사 지낸 고기나 집에서 제사 지낸 고기를 두고두고 먹고 싶어도 3일 안에 해치워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즉, ‘때에 맞게’ 한다는 것은 상황에 맞게 먹고 잉여를 남기지 않는 지혜나 다름없다.
자른 고기에 마블링(?)이 선명하지 않고(割不正) 적당한 소스가 없으면(不得其醬) 먹지 않았다는 대목도 그렇다. 얼핏 너무 까다로운 거 아니냐고 생각될 정도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일단 요리를 만드는 사람이 고기를 정성스럽게 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는 건 쉽게 이해가 된다. (세상에 그 어느 누가 일말의 정성도 보이지 않는 음식을 먹고자 하겠는가.) 그런데 좀 거시기한 건 소스(醬)다. 이 소스라는 말 때문에 만들어진 설도 부지기수다. 고기의 종류에 따라 찍어먹는 소스가 다 따로 있었다는 설, 위생을 위해서 적합한 소스를 곁들여 먹었다는 설, 고기와 소스 사이에 음양(陰陽)의 조화를 맞춰서 먹었다는 설. 물론 정설은 없다. 그러나 중요한 건 고기가 급하다고(!) 막 아무 것에나 찍어 먹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 음식에도 ‘때’가 있듯이 그것을 먹는 상황도 그 ‘때에 맞게’ 준비하는 것, 이것이 곧 시(時)의 의미다.
다음은 중(中). 中은 원래 ‘마을(口)의 한가운데 세운 깃발(丨)’에서 유래했다. 흔히 ‘화살(丨)이 표적(口)의 가운데에 들어맞’은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라고도 한다. 기원이야 어찌 됐건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정확하게 그 중심에 가 있는 상태를 말하는 글자임엔 분명하다. (이래서 中이 무진장 어렵다.) 그런데 음식도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재료들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맛의 중심(中)을 만드는 기술이 요리라면 그 구체적인 산물은 음식이 아니던가. 그러니 재료들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맛있는 요리를 해내는 것이야말로 이 中의 기술이나 다름없다. ‘요리를 잘못’했다는 것은 바로 이 中에서 벗어날 정도로 음식의 맛이 치우쳐 있다는 것. 고기를 구울 때 덜 익히거나 태우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우리들의 마음도 곧 이 中이라는 말이다. (失飪不食: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中은 고기와 술을 먹는데도 부단히 발휘되어야 할 기술이다. 고기 하면 환장하고 술 하면 늘 선을 넘어가는 나 같은 이들에게 中은 그야말로 중요한 실천이다. 그냥 적당히 먹으라는 게 아니다. 주객이 전도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 고기는 기본인 밥 기운을 넘지 않게 먹고 술은 어지러움을 일으키지 않고 즐거울 정도로 마시고. 이것을 넘어가는 건 다 음란(淫亂)한 일이다. 과식 혹은 과음 조금 했다고 해서 무슨 淫亂이냐고? 흔히 우리는 음(淫)을 성적 코드로 읽어낸다. 하지만 淫은 원래 정도(正道)나 중(中)을 넘어가 버린 상태를 말하는 글자다. 그러니 술을 마시고 어지러움에 이르는 것, 고기를 주식인 밥보다 많이 먹는 것, 이거다 淫亂한 것들에 해당한다. (따지고 보면 우린 대부분 淫亂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셈이다.) 먹고 마시는 일에도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게(過猶不及) 하는 것, 더 먹겠다는 탐심(貪心)을 버리는 것, 이것이 ‘생활인’ 공자가 일상에서 보여준 中이다.
마지막은 재(齊). 齊는 그 글자의 뜻만 해도 20가지가 넘는다. 여기서 쓰인 齊는 ‘공손하다’는 뜻. 그럼 뭘 공손하게 한다는 말인가. 그 답은 마지막 구절에 있다. 일단 食不語. 원래 語는 대꾸하는 것을 의미하는 글자다. (스스로 알아서 말하는 言과는 다르다.) 그러니 거칠게 해석하면 밥 먹는데 물어보면 대꾸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꽤나 들어 봤을 이 한마디. 그런데 이것도 단순히 밥을 먹을 때는 밥알이 튀어나오니까 입 닥치고 밥 먹으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내 앞의 음식에 감사하는 태도를 가지고 그 음식을 대하라는 뜻이 더 강하다. (요즘은 밥을 먹는데 말도 없이 먹으면 정말 밥맛없는 인간 취급을 당하지만.) 아무리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도 ‘고시레’를 하고 먹었다는 공자의 모습도 그렇다. 당장 내 앞에 놓여있는 음식의 화려함이 아니라 음식을 탄생시키는 데 동참한 수많은 것들에 대해 답례하는 것. 까다롭게 음식을 고르고 그것을 먹기 위해 음식 앞에 앉은 자가 가져야 할 마음. 공자가 齊라는 글자를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건 바로 이런 마음이다.
이 문장은 흔히 공자의 식생활 웰빙 프로젝트로 읽힌다. 그러나 공자가 이러저러하게 먹었다는 게 포인트가 아니다. 오히려 매일 먹고 마시고 자야 하는 일상에서도 지극히 까다롭게 지키려고 했던 것들, 거기에 우리는 더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시사해 주는 바도 크다. 때에 맞게 하는 것, 치우치지 않게 하는 것, 공손한 마음을 갖는 것. 이건 단지 음식 이야기가 아니라 음식을 통해 드러나는 공자의 생활윤리에 관한 에피소드나 다름없다. 선비들이 열광했던 것도 스스로 말한 바를 일상에서 지켜나는 공자의 모습 때문이리라. 공자에게 웰빙이란 다른 게 아니다. 자기 스스로의 일상에서 시(時)와 중(中)과 재(齊)를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 이것이 공자 웰빙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 『예기(禮記)』 중국 고대 유가의 경전. 음악·정치·학문 등 일상생활의 사소한 영역까지 예의 근본정신에 대하여 다방면으로 서술하고 있다. 공자(孔子)와 그 제자를 비롯하여 한(漢)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을 거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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