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왈 생이지지자 상야 학이지지자 차야 곤이학지 우기차야 곤이불학 민사위하의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놈. 열나게 배워서 아는 놈. 인생의 쓴맛을 봐야 배우는 놈. 쓴 맛을 보고도 배우지 않는 놈. 하나같이 ‘강적’들로 이루어진 ‘놈들’이다. 천재에서 바보까지. 이들을 한데 몰아넣고 자유자재로 분류해 내는 공자의 내공도 보통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을 겪어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하기 힘든 분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문장은 가만히 보고 있는 우리마저도 선택하도록 만든다. 나는 어디에 속할 것인가!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속하든 그것이 모든 것을 결정하리라는 기대. 천재는 천재대로 바보는 바보대로 결정해 버린 그 기대. 우리는 이것을 철저하게 내려놓고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이 문장의 제대로 된 맛을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문장은 실로 암담하기 그지없는 문장이다. 특히 자신이 ‘곤이불학자’(困而不學者)에 속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 문장은 유가(儒家)에서 상지(上智)·중지(中智)·하지(下智)를 말할 때 자주 인용되곤 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上智와 下智는 절대 바뀔 수 없다는 것. 공자도 단언한 바 있다.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와 ‘곤이불학자’(困而不學者)는 서로 바뀌지 않는다고. 천재는 바보가 되지 않고 바보는 천재가 되지 않는다는 이 참담한 선언.^^ 그렇다면 왜 이토록 끔찍한(!) ‘결정론’을 발동하게 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困而不學者는 곤란에 처해도 그 현실을 돌파하거나 개선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이 곤란을 겪어도 거기서 배우는 자가 있는 반면 이들은 삶을 그냥 내팽개쳐 버린다. 곧 下智란 누가 가라고 등 떠밀어서 간 길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로지 스스로 선택해서 간 길일 뿐! 이 길을 가려는 자를 어느 누가 바꿀 수 있단 말인가.
흥미롭게도 공자는 이들을 민(民)이라고 표현한다. 民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백성이라는 뜻과는 전혀 다른 기원에서 출발한다. “民은 끝이 뾰족한 무기와 눈을 본뜬 글자로, 포로의 한쪽 눈을 까서 저항력을 무디게 한 뒤 노동력을 착취하던 노예제 사회의 살벌한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글자이다.”* 즉, 그들은 노예다.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자들. 자신의 운명이 철저하게 외부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도록 방관하는 자들. 곤란한 상황을 회피하고 비껴가려고 할 때 그들이 짊어져야 할 짐은 바로 노예라는 굴레다. 이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곤(困)이라는 글자도 아주 재밌다. 困은 나무(木)가 틀(口) 안에 갇혀 있는 모양이다. 뻗어 나가야 하는 나무의 운명이 좌절되어 있는 모습. 이것을 그대로 참고 살아간다는 것은 곧 나무이기를 포기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공자는 이들이 갈 길이 바로 여기라고 예견한다.(이 살벌함!)
길은 오로지 두 가지뿐이다. ‘공부하거나 공부하지 않거나!’ 우리는 누구나 다 곤란한 상황에 직면한다. 그것에 면죄부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곤이학지자(困而學之者)는 부단히 노력해서 그 곤란한 상황을 넘어가는 사람이다[이들을 피곤(困)한데도 배우는 자들로 해석하기도 한다^^].
학이지지자(學而知之者)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공부하면서 만나는 곤란을 매 순간 넘어가야 한다. “배운 다음에야 부족함을 알고 …… 부족함을 안 뒤에야 스스로 돌이켜 볼 수가 있다.”**(공부해서 아는 것이 곧 부족함이라는 이 절망적인 사실^^)
그럼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는 어떠한가. 흔히 우리는 生而知之者는 천재이기에 배울 필요가 없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이 세상의 모든 곤란으로부터 그를 무사하게 할 거라는 건 지극한 망상에 불과하다. 오히려 천재들은 자기 앞에 닥친 곤란을 돌파하고 타고난 재능까지 발휘해야만 '천재소리'를 듣는다. 그들 역시 열나게 공부하지 않으면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조차 없다. 도리어 그 재능은 짐이 되어 돌아오기까지 한다. 우리는 그런 천재들을 숱하게 보아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여기 아주 흥미로운 문제 하나가 던져져 있다. 生而知之者, 學而知之者, 困而學之者 모두 지(知)에 이르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
혹생이지지, 혹학이지, 혹곤이지지 급기지지 일야
여기서 앎이란 동일한 차원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자가 처해 있는 조건과 환경 속에서 제약이 되는 것들을 깨고 나가야 한다는 점. 서로가 뚫고 나가야 할 길은 서로 다를지언정 그것들이 앎의 차원에서는 하등 다를 게 없다는 점. 이것만이 그들의 공통분모다. 그러니 공부해서 얻는 건 상·중·하의 등급이 아니라 내 삶을 향한 上智·中智·下智뿐이다. 스스로 타고난 것을 공부를 통해 노예상태로 가지 않게 만드는 앎. 이 앎을 구성하는 것. 이게 生而知之者, 學而知之者, 困而學之者가 터득하고 도달하는 앎의 경지다.
그렇다면 공자는 이 가운데 어디에 서 있었는가. 후대 유학자들은 대부분 공자를 生而知之者로 추앙했다. 맹자나 한유 같은 유학자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이 공자를 生而知之者로 만들어야 했던 건 정치적 선택이었다. 확실한 기초가 없는 유가의 성립을 위해서는 공자를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려놓아야 했던 것이다. 요순우탕문무주공으로 이어지는 성인의 계보에 공자를 집어넣은 것도 바로 맹자였다. 실제로『논어』에서 공자는 生而知之한 사람같이 보이기도 한다. 뛰어난 제자들도 하나같이 따라갈 수 없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면 이건 그냥 찬사만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공자는 스스로를 生而知之者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자왈 아비생이지지자 호고민이구지자야
공자는 스스로를 學而知之者라고 규정한다. 옛 것을 부단히 배워서 아는 자. 공자를 신성시하는 유학자들은 성인의 ‘지극한’ 겸양(謙讓)이라고 말하지만 공자는 스스로를 學而知之者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냥 막살기에 딱 좋은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배우겠다는 일념 하나를 가지고 산 공자의 일생만 봐도 그렇다. 배운 것을 현실에서 구현해 보기 위해 천하를 주유하고 반란군에 가담하려고도 하고 녹봉을 두둑이 준다고 해도 거절하고 떠나고. 남들은 모두 그런 공자를 스스로 곤란(困)을 자초하는 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공자가 생각한 學而知之者, 곧 지식인의 몫은 이 길이 아니었나 싶다. 배워서 내 삶뿐만 아니라 세계를 평안하게 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삶을 사는 것. 이 길을 가기 위해 묵묵히 배우고 현실과 무수히 대립해야 했던 공자. 공자는 이 길 위에서 ‘공부’한 존재였다.
배움과 행동은 서로 불화하지 않는다. 배운 자들의 특권은 배운 것을 행(行)으로 옮길 수 있음에 있다고 믿는다. 배우지 않는 자는 절대 이 행(行)으로 나아갈 수 없다. 배웠다고 해도 모두 그 길로 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행(行) 없이 삶은 변화하지 않는다. 그냥 계속해서 피곤(困)할 뿐이다. 행(行) 없이 아는 것, 이것도 곤이불학(困而不學)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생지(生知)건 학지(學知)건 곤지(困知)건 앎은 스스로 삶을 변화시키고 구원할 수 있을 때만 가치 있다.
* 김언종,『한자의 뿌리』, 문학동네, p.330
** 學然後知不足 …… 知不足然後能自反也(학연후지부족 …… 지부족연후능자반야) 『禮記』「學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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