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처방전, 정신의 용토제

#음식과 보고서-토(吐)-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처방전, 정신의 용토제



값나가는 한식집은 나오는 음식가지수가 수십 가지다. 잔칫상차림처럼 아줌마가 5~6차례 오가며 차리는 사이에 채 먹지도 못하고 배가 부른다. 음식에 들인 정성을 생각해서 먹어야지 하다가도 부른 배가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으니 할 수 없다. 눈으로 먹는 수밖에. 음식들은 내게 문제를 던지고, 나는 그 앞에서 받아든 문제를 풀지 못하는 형국처럼 보인다. 음식들은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처럼 상 위에 앉아 있다. 온갖 양념에 젖어 있을 도미며 장어들이 갈길 막혀 밥상 위에 갇혀 버렸다. 생각 같아서는 바다로 도로 보내버리고 싶다. 


"음식들은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처럼 상 위에 앉아있다. 온갖 양념에 젖어 있을 도미며 장어들이 갈길 막혀 밥상 위에 갇혀 버렸다."


회사의 기획보고서에서도 똑같은 걸 보게 된다. 보고시간이나 보고상대방을 고려하면 보고서 내용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성자는 좀 더 잘 보이려 하거나, 좀 더 잘 설명하려는 마음에 여러 내용들로 이리저리 치장한다. 결국 그 보고서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까지 집어넣는 바람에, 도리어 핵심적인 사항은 찾기 어려워진다. 게다가 대개 그런 보고서는 문장마저 난삽하기 이를 데 없다. 부장에게 보고하려면 내 가슴이 다 아프다. 예쁘게 치장해주려다 도리어 망쳐놓은 미용사의 민망함이 이런 때 이해가 된다. 음식상도, 보고서도 너무 많은걸 하려다 망쳐버린 셈이다. 언제나 먹고 나서야, 항상 다 작성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는 어리석음이라니.


이런 때는 덜어내야 한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철학에 대해서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그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언어가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서서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철학이라는 밥상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로 가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지금 차려진 철학밥상에는 먹지도 못할 음식들로 가득했다. 다시 말하면 ‘진리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로 철학밥상을 가득 채우다 보니, 정작 좋은 음식들(질문들)은 찾아 먹기 힘들거나, 아예 밥상에 올리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쓸모없는 문제들을 철학에서 싹 몰아내야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우선 문장들을 명료하게 해야 한다. 무의미한 질문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사고가 명료해야 하고, 사고가 명료해지려면 그 사고를 드러내는 문장들이 명료해져야 한다. 사고할 수 있는 것은 말로 담을 수 있는 것이다. 말로 담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논리철학논고』, 7. 이하 괄호 안의 숫자는 같은 책의 명제 번호). 이 의미에서 철학은 말로 담을 수 있는 것만 다뤄야 한다. 그 외의 것은 싹 몰아내야 한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르게 철학을 규정하고 있었다. 그는 칸트와 달리 문제가 ‘생각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 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언어를 구성하는 문장들과 세계를 이루고 있는 사실들 사이에 대응관계가 성립한다. 따라서 문장들을 모두 모아놓으면, 그 자체로 세계의 사실들이 모인 집합이 된다.


그는 모든 철학은 언어에 대한 비판이라고 단언한다(4.0031).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은 언어 탐구일 수밖에 없다. 물론 언어와 세계가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 대응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게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다. 즉 언어를 구성하는 문장들과 세계를 이루고 있는 사실들 사이에 대응관계가 성립한다. 따라서 문장들을 모두 모아 놓으면, 그 자체로 세계의 사실들이 모인 집합이 된다.



훗날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을 '그림이론'(picture theory)이라고 불렀다. 화가가 현실을 본떠서 그림을 그리듯, 철학자는 세계의 사실들을 본떠서 문장으로 써낸다. "그림은 실재와 일치하거나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옳거나 그른 것으로서 참이거나 거짓이다"(2.21) 즉 세계에는 사실들이 발생하고, 사실들은 자신의 모형으로서 문장들을 가진다. 바로 이 문장(sentence)을 명제(proposition)라고 부른다. 여기서 문법적으로 하자 없이 단어들을 단순 배열한 것이 문장이라면, 그 문장들 중에서 참,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것들을 가려서 명제라고 한다. "그림은 실재의 모델이다(2.12) 명제는 실재의 그림이다."(4.01)


『논리철학논고』는 "세계는 사실의 총체이다."(1.1)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실들은 이른바 원자사실(사태)이다(2). 원자사실(사태)이란 비가 내리거나, 내가 집에 있는 것 같이 단순한 사실들을 말한다. 사실들 중에 가장 최소 단위를 이루는 사실들이다. 사실 차원에서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사실들. 이런 원자사실들은 대상들이 모여서 생성된다(2.01). 즉 '비'라는 대상들이 모여서 비가 내리는 원자사실이 발생한다. '나'와 '집'이 결합해서 내가 집에 있는 원자사실이 발생한다. 또 이런 원자사실들이 모여서 복합사실이 되기도 한다. 만일 비가 오면, 나는 집에 있게 될 것이다. 대상들이 배열되어 사태를 형성한다거나(2.0272), 그 대상들이 사슬의 고리들처럼 서로 걸려 있다(2.03)는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은 마치 불교의 연기론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이를 그림이론에 따라 명제로 표현하게 되면, 대상은 이름에, 원자사실들은 원자명제(요소명제)에, 복합사실은 복합명제에 대응한다. 비가 내리는 원자사실은 "비가 내린다"는 요소명제로 표현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름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요소명제를 이룬다.(4.22) 이 요소명제들의 합이 바로 언어 전체인 것이다. 앞서 말한 복합사실은 "만일 비가 내리면, 나는 집에 있을 것이다"란 복합명제로 표현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소명제(언어)와 원자사실(현실) 간에 구조적 동일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를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 형식(logical form)이라고 표현했다. "모든 그림이, 그 형식이 어떠하건, 아무튼 현실을-올바르게 또는 그르게-모사할 수 있기 위해 현실과 공유해야 하는 것은 논리적 형식, 즉 현실의 형식이다"(2.18) 이에 따라 "그림은 모사된 것과 모사의 논리적 형식을 공유한다"(2.2) 우리가 산을 그린 그림을 보고, "와, 산이 정말 높네"라고 감탄하게 되는 것은 현실의 산과 그림의 산이 구조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과 명제 간에도 똑같다. 비가 내리고 있는 현실의 사실과 "비가 내린다"는 언어적 명제는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무언가 구조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명제만 보고도 웅장한 산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명제는 사실의 재현 혹은 표상(represent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명제가 사실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명제와 사실은 서로 재현의 형식을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재현 형식(=모사 형식)을 논리적 형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논리적 형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내 눈이 세상을 보고 이해하고 있지만, 정작 내 눈이 내 눈을 바라볼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또 내 손이 온갖 사물을 만지지만, 정작 나의 손을 내 손이 만질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이거 당연한 노릇 아니던가! 명제는 사실을 재현할 뿐, 명제와 사실 간에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그 논리적 형식(=구조적 동일성) 자체는 재현하지 못한다. "명제는 논리적 형식을 묘사할 수 없다"(4.121) 논리적 형식을 묘사하려면, 우리가 그 논리적 형식 밖에 서야 하기 때문이다. 산을 그리려면 화가는 산 밖에 서야 한다. 이는 눈이 자기 눈을 보기 위해 자기 눈 밖에 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논리적 형식은 단지 명제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낼 뿐이다. 다시 말하면 명제와 사실이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은 명제를 보고 우리가 느끼는 수밖에 없다.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6.522) 이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세계에는 많다. 철학은 그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7) 그 외의 것은 철학으로부터 몰아내야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 외의 것은 철학으로부터 몰아내야 한다."


한의학에서도 병이 생기면 몸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이 쌓여 있다고 보고, 우선 이를 내보내는데 주력한다. 그 방법에는 땀을 내고(汗) 설사시키고(下) 토하게(吐) 하는 3가지가 있다. 특히 상초에 병이 있을 때는 토하는 것이 좋다. 『내경』에도 "병사(病邪)가 상부에 있는 경우는 월(越)하게 한다." (『동의보감』 잡병편 권일 토문)고 씌어 있다. 여기서 '월'(越, 넘긴다)은 토하게 한다는 말이다.


토하게 도와주는 약을 '용토제'(涌吐劑)라고 하는데, 여기서 용(涌)이라는 말도 토하게 한다는 뜻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과체산'(瓜疵散)이 있다. 어릴 적에 체하면 할머니가 흰 가루를 먹여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 가루가 과체산이다. 뭐 별거 아니다. 참외꼭지를 가루로 갈아 만든 약이다. 과체는 70년대 서유석이란 가수가 불러 잘 알려진 민요 <타박네>에도 나오는 그 개똥참외를 말한다. "우리 엄마 무덤가에 기어 기어 와서 보니/빛깔 곱고 탐스러운 개똥참외 열렸길래/두 손 으로 따서들고 정신없이 먹어보니/우리 엄마 살아 생전 내게 주던 젖맛일세" 시골길을 걷다보면 흔히 보는 그 개똥참외가 우리들 병에는 즉효였던 것이다.


한의학에서 토(吐)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몰아낸 것과도 같다. 『동의보감』에서는 이런 치료를 위해 '도창법'이라는 독특한 외래치료법을 소개한다. 먼저 장(腸)과 위(胃)는 시장과 같아서 없는 것이 없다. 그래서 이를 창고란 의미로 창(倉)이라고 한다. 창고에 재고가 많이 쌓이면 썩을 수 있다. 있어서 안 되는 것들이 쌓이는 것이다. 마치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철학의 그릇에 기만적으로 쌓이듯 장과 위에 적취가 쌓인다. 오랫동안 쌓여 있으면 몰아내고 잘 씻어서 깨끗하게 해야 한다. 이를 도(倒)라고 한다. 결국 도창(倒倉)이라는 것은 창고에 있는 묵은 것과 썩은 것들을 가려서 버린다는 뜻이다. 방법은 고깃국물이 점차 물엿처럼 되도록 끓여서 고약을 만들어 먹는 것이라 한다. 기록에는 서역(西域)에서 전해졌다고 하니, 아마도 인도나 중동에서는 쉽게 관찰되는 치료법인가 보다.


『동의보감』은 토문(吐門) 첫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경(仲景)의 대법으로서, "봄에는 토하게 한다"는 것은 봄에 만물이 싹터 나오는 것을 본뜬[象] 것인데, 토하게 하면 울체[鬱]되었던 양기(陽氣)를 쉽게 통하게[達] 한다. [동원]  (『동의보감』 잡병편 권일 토문, 1000쪽.)


음식을 지나치게 먹어서 가슴이 막힐 때, 이상하게도 폐를 관장하는 촌맥(寸脈)은 뛰는데, 척맥(尺脈)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가슴은 폐에 속하기 때문에 가슴이 막히면 상식적으로 촌맥이 뛰지 않을 것 같은데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동의보감』은 이를 상생상극으로 풀어낸다. 폐는 수태음폐금(手太陰肺金)이다. 금(金)은 상극관계에 따라 목(木)을 친다.[金克木] 그래서 목에 배속된 간을 약하게 한다. 다시 말하면 간목(肝木)의 생발지기(生發之氣)가 폐금 때문에 땅 속으로 들어가 버린 꼴이다. 바로 목울(木鬱)이다. 여기서 『동의보감』은 새로운 화학물질을 만들어 간을 고치는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동의보감』의 의술은 간목을 감싸고 있는 땅[陰土]을 걷어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즉 토(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음토 때문에 힘을 못 쓰던 간의 목기운이 퍼지면서 뭉친 것이 없어진다.


토하는 것은 일종의 쇄신이다. 몸과 정신을 비워내고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출발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토(吐)하는 것은 일종의 쇄신이다. 몸과 정신을 비워내고,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출발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봄에 만물이 싹 터 나오는 것과 같다. 봄의 출발에 맞춰 꽉 차서 막혀있던 양기가 통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에도 이런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청진기 없이도 철학 속의 시뻘건 허파가 숨가빠하고, 정신의 주름진 내장이 꼬인 것을 본다. 철학과 정신에 난삽하게 뭉쳤던 문제들을 토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조개처럼 닫혀 있는 철학의 입을 벌려 토하게 하여야 한다. 『논리철학논고』의 1부터 7까지 명제들은 비트겐슈타인이 내린 철학의 처방전, 정신의 용토제라고 할 수 있다. 



글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논리 - 철학 논고 - 10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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