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허구에 대한, 허구에 의한, 허구의 매혹적인 글쓰기, 『픽션들』

'사실 같은, 그럴듯한 거짓말’에 대한 매혹, 픽션들


이러한 일원론 혹은 관념론은 모든 과학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하나의 사건을 설명(또는 판단)한다는 것은 그것을 다른 사건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틀뢴에서 그런 결합은 주체 이후의 상태이며, 이전의 상태에 영향을 끼치거나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각각의 정신적 상태는 축약이 불가능하다. 그런 정신적 상태에 이름을 부여하는, 즉 분류하는 단순한 행위는 왜곡과 편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뢴에는 과학, 나아가 체계적 사고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틀뢴에도 이런 체계적 사고가 존재하며, 그것도 거의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존재한다. 북반구에서 명사가 그러하듯 철학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난다. 모든 철학이 오직 하나의 변증법적 유희, 즉 의제 철학이라는 사실이 철학의 무한한 자기 증식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여기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체계들이 넘쳐흐르지만, 그것들은 흔쾌히 동의할 수 있는 구조나 감각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틀뢴의 형이상학자들은 진실, 심지어 그럴듯한 진실조차 추구하지 않고, 오직 놀라움만을 찾는다. 그들은 형이상학을 환상 문학에서 파생된 하나의 가지로 생각한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 24쪽


복권의 상징적인 도식은 그러하다. 현실적으로 ‘추첨의 횟수는 무한’하다. 그 어떤 결정도 최종 결정이 될 수 없고, 모든 결정은 다른 결정들로 가지를 치게 된다. 무지한 사람들은 무한한 추첨에는 무한한 시간이 요구된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거북이와의 경주’ 비유가 보여 주듯이, 시간은 사실상 무한하게 세분화될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 무한성은 ‘우연’의 복잡한 숫자들과 플라톤주의자들이 사랑했던 복권의 ‘천상의 원형’과 놀라우리만큼 일치한다.


「바빌로니아의 복권」, 85쪽


무엇이 허구이고 무엇이 진짜인가, <픽션들> 에서는 종종 길을 잃곤 한다.


남미 소설은 다른 소설들과 크게 차이가 있다. 보르헤스의 작품은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보르헤스 소설의 특성들 가운데 단연 흥미로운 것은 그가 허구를 제시하는 방법의 특이성이다. 즉 허구를 보여주는 방식 자체가 다른 소설들의 방법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보르헤스 소설의 차이점들에 주목할 때 우리의 관심은 이런저런 차이점들을 이곳저곳에서 가능한 한 많이 찾아내서 분석적으로 기술하는 것보다 그가 허구들을 보여주고 다루는 방식의 특이성을 잡아내야 한다. 비유를 든다면, 그것은 스케치북에 색칠을 할 때 그 고유의 색깔이 빨강인가 파랑인가를 알아내서 그것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색깔들이 어떻게 섞이고 배열되어, 보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유혹하고 있는가를 눈여겨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색깔들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고, 그 배열이 어떤 효과를 낳는가에 대한 것으로서, 소설에서 보자면 허구 그 자체보다는 그것의 제시 방법에 관한 것이다. 색깔들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그림의 효과가 크게 달라지는 것처럼, 허구가 배열되는 방법은 소설의 효과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보르헤스 소설에서 발견되는 것은 ‘사실 같은, 그럴듯한 거짓말’에 대한 매혹이 글쓰기를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픽션들』에서 보여주는 경향은 특히 그렇다. “틀뢴”이라는 행성은 인간 지성이 만들어 낸 허구적 체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허구의 행성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 지성이 만들어 낸 현실의 다른 물건들처럼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이것은 그림으로 치자면 마치 마그리트의 그것과 같은 것인데, 모든 이야기는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서술 속에서 진행되어야 하고, 또 보르헤스는 그렇게 하지만, 읽는 이들을 부지불식간에 빗장이 풀린 지대, 즉 허구의 세계로 아주 자연스럽게 들어서게 만든다. 그 허구가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면서 말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게 가능한 것은 마치 “틀뢴”의 세계처럼 우리의 마음 그 자체가 “존재의 체계는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르헤스는 우리의 마음이 이미 세상의 모든 가능한 체계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화자는 객관적인 위치에서 대상과 사건들을 사실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은 흔히 들어왔던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와 같다. 뭐랄까, 아주 객관적이면서도 어쩐지 포근하여, 어느 순간 우리들의 분석적인 태도를 해체시키는 것이다. 그냥 빠져들고 만다. 무장해제 당하는 것이다. 마침내 그 순간 극사실들이 허구를 만든다. 극사실들이 바빌로니아의 복권처럼 무한히 많은 세계를 만들어 버린다. 또한 거기서 생긴 사건들이 사실인지 허구인지 경계가 흐릿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말하길, 어쩌면 당신이 다른 곳에서 무한히 존재하고 있을 사람들 중 어떤 한 사람이 꾸는 꿈일지 모른다고 한다. 당신 자체가 허구라는 것을 사실인듯, 허구인듯 솜씨좋게 주장해낸다. 그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게 하면서 말이다.



글.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픽션들 - 10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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