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담이 잘 작동하면 온몸이 즐겁다! -담(膽)과 운명애

#운명애-담기주승(膽氣主升)-세네카


운명을 사랑하는 방법



(膽)은 ‘쓸개’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웅담(熊膽)은 곰의 쓸개를 말한다. 오래전 곰의 몸에 관을 꽂아 쓸개즙(담즙)을 빨아먹다가 쇠고랑 차는 뉴스를 본적 있다. 정말이지, 나이든 아저씨들이 함께 모여서 즙을 빨아먹는 모습은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했다. 이 장면을 엘 그레코의 방식으로 그림 그리면, 그 어떤 그림보다 초현실적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좀비의 세계가 바로 이런 모습 아닐까 싶다. 아, 지옥이란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TV에 있구나. 이제 나도 그 아저씨가 되었다. 나는 어떤 즙을 빨아 먹고 있을까.


그러나 지옥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은 것처럼, 천국도 그리 멀지 않다. 담은 간 아랫부분에 붙어 있는 배 모양의 주머니다. 담은 기본적으로 간에서 만든 담즙을 저장한다. 이 담즙은 아주 맑고 깨끗한 액이다. 그래서 담은 “사물이 비칠 정도로 밝으므로 청정지부(淸淨之府)”(『동의보감』, 424쪽)다. 원래 담이 오행으로는 목(木)에 해당되어서 그럴 것이다. 나무는 봄에 싹이 나고 하늘로 솟아오른다. 생동하는 기운인 것이다. 이 의미에서 담은 본성상 밝다. 어떻게 보면 담이야말로 천국에 가장 가까운 장부일 것이다. 그런 담을 지옥에서처럼 빨아먹고 있으니, 몹쓸 세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담은 자기 자신만 밝은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밝음을 다른 장부에도 전이시킨다. 이것을 담기주승(膽氣主升)이라고 한다. 다른 11개 장부 운동이 모두 이 담기의 승발에 달려 있다. 즉 담기가 인체 기기들의 승강출입 운동을 원활하게도, 삐거덕거리게도 한다. 담기가 잘 작동하면 온몸이 즐겁다. 봄기운이 많아지면 만물이 편안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그런 담이 허하면 무서워서 혼자 자지 못할 정도이고, 거꾸로 담이 실하면 성을 잘 낸다(『동의보감』, 423쪽). 담 하나가 몸 전체의 기분을 좌우한다. 그래서 담주결단(膽主決斷)이다. 담은 도래하는 사건들에 대해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언제나 결단은 최적의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그렇다. 담은 도래하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일차적인 신체적 표상인 셈이다.
 

레메디오스 바로, <채식 뱀파이어>


철학에서 사건들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람들은 스토아주의자들이다. 여기서 스토아(stoa)란 신전이나 체육관 벽에 붙여서 지은 지붕 달린 주랑(柱廊, 기둥만 있고 벽이 없는 복도)을 말하는데, 주로 산책하고 대화하는데 이용되었다고 한다. 스토아학파는 이 주랑을 거닐며 토론했던 철학자들을 말한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4 추정~AD65)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어떻게 도래하는 사건들을 돌파했을까? 먼저 스토아주의자들은 세상을 물체와 비물체적인 것으로 나눈다. 물체는 공간을 점유하는 것들 모두이다. 여기에는 성질, 상태도 포함된다. 심지어 영혼, 표상도 우리 육체를 점유하고, 우리 영혼에 각인된 물체라고 말한다. “영혼도 물체이고, 인간의 선도 필연적으로 물체이네. 생각해보면 감정이 물체라는 것은 자네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네.”(세네카, 『세네카 인생론』, 606쪽) 반면, 비물체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물체와 물체가 능동-수동 작용에 의해 맞부딪치면서 발생한 효과들이다. 이를테면 “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린다.”는 회초리라는 물체(능동체)가 엉덩이라는 물체(수동체)에 작용을 가하여 “때리다”는 효과가 발생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때리다”는 물체가 아니다. 그것은 물체들이 서로 작용하여 발생시킨 부대적인 효과다. ‘사건’이 발생했다고 할 때, 우리는 이 효과를 두고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건이란 기묘하다. 사건은 절대 현재에 머물 수 없다. 우리가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을 인지하자마자, 아니 인지하려고 하면 바로 그 순간, 과거로 흘러 가버린다. 아울러 미래에 다시 반복될 지도 모르는 상태로 스며든다. 즉 사건은 순간 반짝 생성되었다가 과거와 미래로 사라진다. 따라서 흘러가는 사건들을 현재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 언어가 필요하다. 좀 거칠게 말하면 언어로 포획될 때에야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만일 언어로 포획되지 않으면 그냥 흘러가는 흐름일 뿐인 것이 된다. 심지어 스토아주의자인 크뤼시포스는 이렇게도 말한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 그것은 당신의 입을 지나간다. 따라서 지금 당신이 짐수레라고 말하면, 어떤 짐수레가 당신 입을 지나간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그리스철학자열전』, 505쪽) 우리가 ‘짐수레’라고 말로 표현하는 순간, 짐수레라는 물체가 순식간에 우리 입을 지나간다는 말이다. 놀랍게도 언어가 사건을 몰고 온다. 언어는 사건을 발생시키는 하나의 변수다. 언어야말로 사건인 것이다.
 

삶은 항상 비극적인 사건들로 가득하다. 그것들은 우리들의 표상에 맺힌다. 우리는 그 표상으로 괴로워하고 슬퍼한다. 그러나 그 표상들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사건의 색깔은 갖가지로 바뀐다. 스토아철학은 이를 익살의 언어로 비틀었다. 예컨대 이렇다.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가 수많은 군사를 사열하고 있었다. 왕은 갑자기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고 한다. 백년이 지나면 저토록 많은 젊은이들 가운데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러나 세네카가 평한다. 웬걸, 전쟁을 일으킨 그 자신이 그들을 더 빨리 죽게 하지 않았는가? 또 이런 이야기도 소개한다. 어떤 노인은 카이사르에 의해 고위직에서 면직된다. 그는 집에 돌아가서 자신을 침상에 누이고 가솔들에게 죽은 것처럼 둘러서서 울라고 했다. 세네카가 평한다. “죽을 때까지 분주한 것이 그렇게도 즐거운가요?”
 

언어가 사건을, 운명을 만든다!



이런 식이다. 그 순간 사건들은 완전히 낯선 것이 된다. 다른 사건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익살로 어떤 사건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건이든 욕망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도래하든 그 사건을 내가 욕망하는 사건으로 만들어 버린다. 매번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살아왔던 것처럼 지금을 산다. 이른바 운명애다. 지금 이 사건은 내가 원하던 바다! 이 모든 것이 표상으로부터 시작된다. 표상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운명은 달라진다. 운명을 돌파하려면, 아니, 사랑하려면 표상과 대결하여야 한다. 표상이야말로 정신계의 담기주승인 것이다.



글.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세네카 인생론 - 10점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김천운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그리스철학자열전 - 10점
전양범 지음/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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