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에피쿠로스, 숙명을 거스르는 운동


씨앗문장, 에피쿠로스

숙명을 거스르는 운동


  “원자들은 영원히 운동한다. 원자들 중 어떤 것은 아래로 곧장 떨어지고 어떤 것들은 비스듬히 떨어지고 다른 것들은 충돌해서 위로 튕긴다. 그리고 튕겨나가는 것들 중 어떤 것들은 서로 멀리 떨어지게 되는 반면, 어떤 것들은 다른 원자들과 엉키거나 주위를 둘러싼 원자들에 갇혀서, 한곳에 정지해서 진동한다. 왜냐하면 각 원자들은 허공에 의해 다른 원자들과 구분되며, 허공은 원자의 운동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원자들의 단단함은 충돌 후에 원자들이, 얽어매는 원자들에 의해 붙잡힐 때까지, 멀리 튕겨나가게 한다. 이러한 운동은 출발점(archē)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자와 허공이 그 운동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 『쾌락』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오유석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8, 56~57쪽

Charles Demuth 「sail in two movements」1919

 

 [사려 깊은 사람] 그는 어떤 이들이 만물의 여주인이라고 부르는 숙명(운명)을 비웃는다. 그는 우리의 행동을 결정할 힘이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행동들 중 어떤 것은 필연에 따라 생겨나며, 어떤 것은 우연에 의해서, 또 다른 것은 우리의 힘에 의해 생겨난다. 왜냐하면 사려 깊은 사람은 다음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필연에는 아무런 책임도 없으며, 우연은 유동적이며, 우리 힘에 의해 생겨나는 일은 다른 주체를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행동에 대해서는 칭찬이나 비난이 따라붙도록 되어 있다” 정말로 자연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숙명(운명)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신에 대한 신화를 따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화에 따르는 것은 신들을 존경함으로써 달랠 수 있다는 희망을 암시해주는 반면, 숙명의 노예가 되는 것은 달랠 수 없는 필연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사려 깊은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우연을 신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의 행동에는 무질서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사려 깊은 사람은 우연을 모든 것들의 불확실한 원인이라고 간주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해 좋은 것 또는 나쁜 것이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큰 선 또는 악을 위한 기회가 우연에 의해 주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 『쾌락』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오유석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8, 49~50쪽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BC 460? ~ BC 370?)라는 자연철학자는 "온갖 형태(원자)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왔다."(탈레스 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2005, 559쪽.)라고 하면서, 이 세계가 애초에 원자 회오리로부터 형성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계가 텅 비어 있는 것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뭔가 존재하는 것에서 생겼다는 말이다. 그것을 데모크리토스는 원자 회오리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회오리가 어떻게, 왜 그렇게 발생하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저절로, 그리고 우연히 생겨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에피쿠로스

이를 이어받아서 에피쿠로스도 같은 생각을 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는 어떤 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에피쿠로스, 『쾌락』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오유석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8, 54쪽) 그도 그럴 것이, 뭔가가 존재하려면 그에 앞서서 씨앗이든 뭐든 그것을 존재하게 한 또 다른 존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존재하는 것들이 없어지지 않으려면 뭐라도 항상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완전히 사라져버리면 이제 더 이상 존재하는 것들이 생길 수 없을 것이니까. 따라서 더 이상 사라지지 않을 어떤 것이 필요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원자이다. 이렇게 되면 애초에 원자 회오리가 있었고 그 회오리 안에 있었던 원자들로만 세계가 구성될 것이다. 그 원자들의 수가 몇 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 원자들이 배열되는 방식에 따라서만 세계가 구성된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유물론이라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우주는 관념적인 무에서 나오지 않았고, 반드시 '앞서서 있는 것'으로부터 생성되었다. 오로지 그것들의 배치에 따라서만 우주는 바뀔 뿐이다. 에피쿠로스는 그 우주가 배치되기 위한 최소 단위를 원자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실험을 통해 검증하다기 보다, 배치를 위해 요청되는 개념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에피쿠로스가 이런 방식의 유물론을 이야기한 이유가 있다. 비를 예로 들어보자. 비가 내린다. 이때만 해도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물방울들이 서로 만나지 않으면 그저 무료하게 떨어지기만 할 것이다. 이렇게만 진행되면 이 세계는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 아주 무료한 평행선의 세계만 무한히 펼쳐진다.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다. 숙명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게다. 이런 세계에서는 원래 정해진 대로만 세상이 돌아간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어떤 물방울이 비스듬히 방향을 바꾼다. 그 방향 전환은 아주 우연히 발생한다. 정말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돌발적인 운동이다. 이 미세한 움직임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바로 이 순식간의 비껴남이 예기치 않은 충돌을 일으킨다. 그 이후에 충돌과 충돌이 연쇄적으로 생기면서 사건들이 생긴다. 마침내 이 사건들로 인해서 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숙명(운명)이 깨진다. 그래서 에피쿠로스의 충실한 제자 루크레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반문하면서 이를 분명히 하였다. "비껴남으로써 운명의 법을 깨뜨릴 운동의 어떤 시작을 이루지 않았다면, 대체 어디에서 이 자유의지가 온 땅에 걸쳐 동물들에게 생겨나 있는 것일까?"(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2권 254~260, 강대진 옮김, 아카넷, 2011, 128쪽.)


"어떤 물방울이 비스듬히 방향을 바꾼다. ... 바로 이 순식간의 비껴남이 예기치 않은 충돌을 일으킨다."


  바로 이 우연성이야말로 우리의 자유의지를 자극한다. 우리는 운동이 이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씨앗문장의 마지막 문장, "큰 선 또는 악을 위한 기회가 우연에 의해 주어진다."는 말이 이 뜻이다. 지루하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숙명이 아주 순식간에 깨지는 기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꾸려는 자유의지도 가질 수 있게 된다. 결국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적 자연학은 바로 이 자유의지를 옹호하기 위해서 발명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에피쿠로스가 자연철학자들의 숙명론적 태도(헤이마르메네, heimarmene)를 극도로 비판하는 것이다. 숙명을 따르느니, 차라리 신화를 더 믿겠다! 신화는 우리 마음이라도 달래지 않느냐! 가슴이 다 후련해지는 조롱이다.


  그런데 이런 반문이 있을 것 같다. 필연적인 자연 법칙이 우선이지, 우연은 그저 예외적인 것일 뿐이지 않은가? 사실 숙명이라는 것은 전혀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법칙’과도 같다. 숙명, 필연, 법칙이 다 비슷한 말들이다. 원래 정해진 대로, 남들이 가던 대로만 가는 것이다. 대개 가던 대로 가는 것이 법칙이고, 필연이다. 근대 과학이나 근대적 조직행위론에서는 어느 하나가 그 법칙을 따르지 않고 다르게 움직이면 그냥 ‘예외’로 처리한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구도로 본다면 오히려 ‘필연’은 ‘우연’에 종속된다. 필연은 우연 이후에나 생성된다. 순식간에 우연히 발생한 충돌, 즉 마주침 이후에나 법칙은 구성된다는 말이다. 그때부터 비로소 법칙은 영원히 그렇게 될 것처럼 작동한다. 마치 바뀌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법칙도 새로운 마주침이 생기면 바뀌고 만다. 따라서 영원한 법칙도, 영원한 필연도 없는 셈이다. 우연이 필연을 이끈다. 우연이 필연을 뭉갠다. 급기야 에피쿠로스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한편 우리의 세계(kosmos)와 유사하거나 유사하지 않은, 무한히 많은 세계들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미 증명된 것처럼 수적으로 무한한 원자들은 아주 먼 곳까지 이동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원자들은 하나의 세계나 제한된 수의 세계들-우리의 세계와 같건 다르건 간에-내에서 모두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세계가 무한히 많음을 방해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 『쾌락』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오유석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8, 57~58쪽)


  세계는 원자들의 배치에 따라 계속 바뀐다. 원자는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들은 아래로 떨어지는 운동을 하며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기원을 알 수 없는 때부터 그래왔던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따라서 원자들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원자들끼리 마주침이 생기면 무한히 많은 사건과 함께, 그만큼의 '세계들'이 존재하게 된다. 마주침은 이를테면 우주자궁인 셈이다. 결국 원자-마주침은 단 하나의 세계라는 숙명을 깨고 무한히 많은 세계를 긍정하기 위해 발명한 개념들이다. 즉 숙명을 거스르는 운동이다.



글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다만 원자들끼리 마주침이 생기면 무한히 많은 사건과 함께, 그만큼의 '세계들'이 존재하게 된다."


쾌락 - 10점
에피쿠로스 지음, 오유석 옮김/문학과지성사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