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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주역서당

겸손은 힘들어! 주역에서 배우는 겸손의 지혜 - 지산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4. 24.

주역에서 배우는 다섯 가지 겸손의 지혜


-지산겸-


얼마 전, 회사원을 대상으로 직장생활에서 가장 힘든 게 무엇인지 조사한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다양한 직장생활의 고충 가운데 영예의(?) 일위를 차지한 것은 과중한 업무도, 잦은 야근도 아닌 대인관계였다. 조사에 참여한 많은 직장인들은 조직 내에서 원활한 대인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았다. 그래서인지 요즘 시중에는 대인관계의 매뉴얼이 적힌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온라인상에서는 유명인의 이름을 단 각종 처세술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게 없다는 말처럼 정작 그 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항상 웃는 얼굴로 상대를 대하라’, ‘명령하기 보다는 부탁하는 말투를 사용하라’ 등등. 잘못하면 억지가식이라고 인복 달아나기 십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별의별 처세술이 다있지요.


하지만 어떤 책, 어떤 처세술을 보더라도 공통되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겸손이다. 겸손은 대인관계는 물론이고 세상을 살아나가는데도 반드시 필요한 미덕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 겸손이라는 단어는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사람들은 쉽게 열등감으로 인한 자기비하나 속에는 오만함이 가득한데 입으로만 겸사를 내뱉는 이중적인 매너(?)를 겸손이라고 오해한다.


이번 주역서당에서는 왜곡되어 버린 겸손의 본래 의미를 되찾는 시간을 마련해보고자 한다.^^ 그 방법은 물론 주역서당의 바이블! 『주역』에 들어있다. 『주역』에는 겸손에 대하여 설명한 ‘지산겸괘’가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참고로 할 것이다. 겸손이 너무너무 어려운 우리시대, 과연 지산겸괘는 겸손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지산겸 괘사


謙은  亨하니 君子 有終이니라.(겸 형 군자 유종)
겸은 형통하니 군자가 마침이 있느니라.


彖曰 謙亨은 天道 下濟而光明하고 地道 卑而上行이라
(단왈 겸형 천도 하제이광명 지도 비이상행)
단전에 이르길 ‘겸형’은 하늘의 도가 아래서 건너서(내려서) 광명하고, 땅의 도가 낮은 데서 위로 행함이라. 


天道는 虧盈而益謙하고 地道는 變盈而流謙하고
(천도    휴영이익겸       지도    변영이유겸)
하늘의 도는 가득 찬 것을 이지러지게 하며 겸손한데는 더하고, 땅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변하게 하며 겸손한데로 흐르고,


鬼神은 害盈而福謙하고 人道는 惡盈而好謙하나니
(귀신    해영이복겸       인도    오영이호겸)
귀신은 가득 찬 것을 해롭게 하며 겸손함에는 복을 주고, 사람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미워하며 겸손한 것을 좋아하나니,


謙은 尊而光하고 卑而不可踰ㅣ니 君子之終也ㅣ라.
(겸    존이광       비이불가유       군자지종야)
겸은 높아도 빛나고 낮아도 넘지 아니 하니 군자의 마침이라.


象曰 地中有山이 謙이니 君子ㅣ 以하야
(상왈 지중유산    겸       군자    이)
상에 가로되 땅 가운데(속에) 산이 있는 것이 겸이니, 군자가 이로써


裒多益寡하야 稱物平施하나니라.
(부다익과 칭물평시)
많은 것을 덜어서 적은 데에 더해서, 물건을 저울질하여 베풂을 고르게 하느니라.


지산겸은 주역 64괘 중 15번째에 위치한다. 와.. 64괘를 배운다는 기대와 함께 언제 64괘를 다 공부하지라는 막막함으로 첫 번째 중천건괘를 시작한 게 엊그제 같다. 그런데 벌써 15번째 지산겸괘를 하다니 이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이 부푼 마음을 앉고 오늘의 지산겸괘도 활기차게 공부해보자! 지금까지 <주역서당>에서 다룬 14개의 괘(중천건-화천대유)를 착실하게 읽은 독자라면 64괘의 순서가 중구난방이 아니라 나름의 스토리라인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모두 다 살펴보기에는 시간도 지면도 부족하니 앞의 두 괘(13, 14번째 괘)와 오늘의 지산겸의 스토리만 대략적으로 파악해보자.


우선 13번째 천화동인은 천지만물이 모여서 함께 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만물이 모이면 필연적으로 무엇이 생성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골목에 모이면 온갖 기발한 놀이를 만들어내고, 남녀가 만나면 아이가 태어난다. 하물며 만물이 모인 자리에서는? 무엇이 만들어져도 ‘크게’ 만들어진다. 이것이 바로 화천대유였다. 그렇다면 화천대유와 지산겸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응?? 그럼 형통하지도 않을텐데??


옛 말에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다. 곳간이 그득해야 남에게 베풀 여력도 생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디 그런가? 곳간 가득 그득한 재물(대유)을 보고 인심은커녕 도리어 욕심과 오만함이 생기기도 한다. 하여, 『주역』에서는 화천대유한 이후에 생기는 오만함을 경계하기 위해 겸손을 얘기하는 지산겸괘가 놓은 것이다. 재물이나 소유에 대한 태도는 그 사람의 인간됨을 잘 보여준다. 곳간을 걸어 잠그고 욕심을 채우는 사람이 있는 반면, 곳간을 열어서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주는 겸손한 사람도 있다. 괘사에서는 이런 사람을 군자라고 한다. 여기서 군자란 황제나 왕 같은 권력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겸손한 군자는 자기 자신을 잘 단도리하기에 모든 일에 형통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 편안하다.


괘사를 풀어쓴 단전에는 이러한 군자의 도리를 천도(天道), 지도(地道), 신도(神道), 인도(人道)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런데 천도, 지도, 신도, 인도란 바로 이 세상을 구성하는 천지자연을 말하는 게 아닌가! 하늘에 사는 것, 땅에 사는 것, 귀신과 인간. 이 분류를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고로, 군자의 겸손한 태도는 곧 천지자연의 이치와 합치되는 것이다. 그럼 천지자연은 어떻게 겸손할까? 우리에겐 너무도 생소한 천지자연의 겸손에 대해서 들어보자.


괘사의 첫 번째 구절은 이러하다. ‘하늘의 도가 아래로 내려와서 광명하고, 땅의 도가 낮은데서 위로 행한다.’ 뭐가 내려오고 뭐가 올라가? 흠... 쉽사리 이해할 수 없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동양의학의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는 개념을 빌려오자. 동양의학에서는 인간의 가슴(상초)에 있는 심장을 불로 보고, 아랫배 척추 앞(하초)에 있는 신장을 물로 본다. 이 심장과 신장 다시 말해, 불과 물은 끊임없이 교류한다.


심장의 불은 아래로 내려가고, 신장의 물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승화강으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운동이다. 그런데 만약 심장이나 신장이 ‘나는 내 성질과 자리를 고수할래!’라고 오만과 독선을 떤다면? 인간은 제명에 살지 못할 것이다. 물과 물이 겸손하게 상승, 하강운동을 하여 조화를 이룰 때 인간은 생명을 영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천지자연도 하늘의 도가 아래로 내려오고 땅의 도가 하늘로 올라갈 때 그 운행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가득찬 것을 이지러지게 하며 겸손한 데는 더 더하는” 태도. 만물을 저울질하여 태과와 불급을 조화롭게 하는 이치가 바로 천지의 도리이며 군자의 도리다. 이제 지산겸괘의 효사를 통해 ‘겸손’을 좀 더 심도 있게 살펴보자. 각 효사마다 출현(?)하는 ‘겸 시리즈’가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지산겸 효사


初六은 謙謙君子니 用涉大川이라도 吉하니라.
(초육 겸겸군자       용섭대천          길)
초육은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니, 써 大川을 건너더라도 길하니라.


象曰 謙謙君子는 卑以自牧也라.
(상왈 겸겸군자    비이자목야)
상에 이르길 겸겸군자는 낮춤으로써 스스로 기르느니라.


음이 맨 처음에 있어서 초육이라고 한다.(가장 아랫자리에 위치한 효를 초(初)라고 하고 음(- -)은 육(六), 양(−)은 구(九)를 붙인다) 초육은 군자이긴 군자인데 겸겸군자다. 지산겸괘에 등장하는 다섯 개의 ‘겸 시리즈’ 가운데 첫째가 바로 겸겸이다. 그 뜻을 풀어보면 ‘겸손하고 겸손하다’인데 같은 한자를 두 번 반복해서 강조할 만큼 겸손한 군자다. 왜 그럴까? 『주역』에서는 효의 위치나 조건에 따라서 효의 상황이 결정되는데 초효는 지산겸괘의 가장 아래(혹은 앞)에 자리 잡고 있다. 하여 스스로를 낮춘다고 본 것이다. 겸손으로 도배(?)되어 있는 지산겸 안에서 또 자신을 낮추니 얼마나 겸손한가! 이런 겸겸군자는 그 인물의 마음 씀씀이나 능력을 볼 때 큰 내를 건너는 것과 같은 큰일을 잘 해쳐나갈 수 있기에 길하다고 한 것이다.



六二는 鳴謙이니 貞코 吉하니라.
(육이    명겸       정    길)
육이는 울리는 겸이니 정하고 길하니라.


象曰 鳴謙貞吉은 中心得也ㅣ라.
(상왈 명겸정길    중심득야)
상에 이르길 '鳴謙貞吉'은 중심을 얻음이라.


음이 두 번째에 있어서 육이라고 한다.(가장 아랫자리와 윗자리를 제외한 나머지 효는 그 음,양에 따라서 육(음), 구(九-양)라고 하고 그 뒤에 순서에 해당하는 숫자를 붙인다) 육이는 명겸이라고 했다. 명겸은 ‘겸 시리즈’ 중 둘째로 그 뜻이 특이하다. 보통 명(鳴)은 ‘울다’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울리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육이가 마음과 행동거지를 바르게(貞)함으로써 그가 겸손하다는 명성이 널리 울려 퍼진다는 것이다. 그럼 육이가 겸손하다는 것은 어디서 알 수 있을까? 친절하게도 육이 효사의 도움말인 상전은 육이가 중심을 얻었기 때문에 명겸할 수 있다는 힌트를 준다. 중심이라니? 지산겸괘를 자세히 살펴보라 그럼 답을 알 수 있으니.


지산겸괘는 두 개의 소성괘(주역 팔괘를 말한다)로 이루어져있다. 위(상괘)의 곤괘와 아래(하괘)의 간괘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서 볼 것은 간괘의 중앙에 우직하니 자리하고 있는 육이효다. 『주역』에서는 이 자리를 중(中)이라고 한다. 중은 그 자릿값을 톡톡히 하는데 다른 괘에서도 이 자리에 위치한 효는 길(吉)한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태과와 불급이 아닌 중도를 지키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육이는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지키며 겸손하니 그 칭송이 울려 퍼진다는 말이다.


九三은 勞謙이니 君子 有終이니 吉하니라.
(구삼    노겸       군자    유종       길)
구삼은 수고로워도 겸손함이니, 군자가 마침이 있으니 길하니라.


象曰 勞謙君子는 萬民의 服也라.
(상왈 노겸군자     만민   복야)
상에 이르길 노겸군자는 모든 백성이 복종함이라.


양이 세 번째에 있어서 구삼이다. 하괘인 간괘의 마지막이기도 하다. 구삼은 ‘겸 시리즈’의 세 번째인 노겸이 나온다. 노겸이라 이건 또 무슨 뜻일까? 노(勞)는 ‘수거롭다’, ‘힘쓰다’라는 뜻이 있으니 노겸은 ‘수고로워도 자랑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겸손하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구삼은 지산겸괘에서 유일한 양효로 그 존재만으로도 든든한데 성품 또한 외양에 걸맞게 믿음직스럽다. 구삼은 수고롭게도 다섯 음들을 위해 헌신한다. 하지만 그 위치는 하괘인 간괘로 낮은 자리에 임한다. 자기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하면서도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진국인 사람. 구삼이야말로 괘사에서 말하는 군자다. 이런 매력덩어리(?) 구삼에게 사람들이 모여들고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닐까.


六四는 无不利撝謙이니라.
(육사    무불리휘겸)
육사는 謙을 엄지손가락으로 하니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


象曰 无不利撝謙은 不違則也라.
(상왈 무불리휘겸    불위칙야)
상에 가로되 무불리휘겸은 법칙에 어긋나지 않음이라.


음이 네 번째에 있어 육사라고 한다. 상괘인 곤괘의 첫 번째이기도 하다. 육사는 ‘겸 시리즈’의 네 번째인 휘겸이 있다. 휘는 ‘엄지손가락’이라는 뜻이다. 풀이하면 엄지손가락의 겸손이 된다. 『주역』에는 이처럼 그 뜻만으로는 도저히 풀이할 수 없는 말들이 등장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멘붕에 빠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중지곤의 ‘누런 치마면 크게 길하리라’혹은 천태릭괘의 ‘호랑이 꼬리를 밟아도 물지 않으니 형통하다.’를 떠올려보라!) 하지만 그 의미를 세세히 따져보면 너무도 적절하고 재밌는 예시라 기억에 오래 남는데 휘겸도 그런 예가 되겠다.



자 두 손을 쫙 펴서 열 손가락을 서로 마주쳐보자. 만약 열손가락이 모두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고무인간이거나 외계인이다! 보통 아니 거의 모두는 오직 엄지손가락만이 다른 손가락을 마주칠 수 있을 뿐이다. 나머지 손가락은 뻣뻣해서 다른 손가락과 마주할 수가 없다. 이처럼 엄지손가락은 손의 기능의 40%를 차지할 만큼 주된 위치에서 나머지 네 손가락을 돕는다. 덕분에 우리는 자유자재로 손을 사용할 수 있다. 육사의 휘겸이란 엄지손가락의 막중한 역할과 유연성을 착안해서 만든 것이다. 『주역』에서는 육사를 육오 임금을 모시는 신하의 자리 보는데 엄지손가락을 닮은 출중한 능력과 겸손함을 겸비하고 있다. 즉, 육사는 위로는 임금을 모시고 아래로는 백성을 돌보는 현명한 신하다.


六五는 不富以其隣이니 利用侵伐이니 无不利하리라.
(육오    불부이기린       이용침벌       무불리)
육오는 부하지 아니하고 그 이웃으로써 함이니, 써 침벌함이 이로우니 이롭지 않음이 없으리라.


象曰 利用侵伐은 征不服也라.
(상왈 이용침벌   정불복야)
상에 가로되 '利用侵伐'은 복종치 않는 것을 바룸(침)이라.


음이 다섯 번째 있어서 육오다. 『주역』에서 육오는 임금의 자리다. 밝고 강건한 태양과 같은 군주의 자리.(『주역』에는 효 각각의 위치에 음양이 배당되어 있는데 초-양, 이-음, 삼-양, 사-음, 오-양, 상-음이 그것이다.) 하지만 지산겸에서는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유약한 음이 임금의 자리에 있다. 이처럼 자리와 음양의 관계가 부합되지 않을 때를 부정(不正)이라고 한다.(반대로 자리와 음양의 관계가 부합될 때는 정(正)이다)


육오 왈 : 저 가엾은 오만한 자를 정벌해야 하나?


꼭 부정이라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다. 지산겸괘 자체가 워낙 형통한 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육오의 행실 또한 임금의 역할에 합당하다. 육오는 화천대유에서 곳간 가득 부를 채우자 그것을 백성들과 나누는 겸손을 행한다. 부드러운 음효 군주답게 주위 사람들과 연대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겸손하고 무조건 퍼주는 것은 아니다. 육오는 그것이 나약함을 숨기기 위한 가짜겸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가짜겸손이 자신은 물론 백성들까지 궁지로 몰아넣을 것도. 그래서 육오에는 ‘겸 시리즈’가 없다. 군주는 마냥 겸손하기만 해서는 안 될 자리기 때문이다. 겸손하게 정치를 하는데 자신을 따르지 않는 그른 무리가 있다면 가차 없이 정벌하여 바로잡는다. 이것이 바로 군주의 자리에 위치한 음효. 강(剛)과 유(柔)를 동시에 겸비한 육오의 모습이다.


上六은 鳴謙이니 利用行師하야 征邑國이니라.
(상육    명겸       이용행사       정읍국)
상육은 우는 겸이니, 써 군사를 행하여 읍국을 침이 이로우니라.


象曰 鳴謙은 志未得也ㅣ니 可用行師하야 征邑國也ㅣ라.
(상왈 명겸    지미득야       가용행사       정읍국야)
상에 이르길 명겸은 뜻을 얻지 못함이니, 가히 써 군사를 행하여 읍국을 침이라. 


음이 여섯 번째 있어서 상육이다. 지산겸괘의 마지막 효사기도 하다. 상육에도 “명 시리즈” 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명겸이라는 말이 나온다. 육이 효사에서 봤었는데 여기서는 그 뜻이 완전히 다르다. 육이에서 명겸은 육이가 중도의 겸손을 행하니 천지에 명성이 울려 퍼진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상구에서 명겸은 남들이 자신의 겸손을 알아주지 않아서 원망하며 울고 있는 것이다. 같은 단어가 이렇게 다른 뜻으로 사용되다니. 이것이 매번 변하는! 그때그때 다른! 주역의 매력이며 관전 포인트기도 하다.


상육은 지산겸괘의 맨 위에 위치하고 있다. 임금보다도 높은 자리. 이것만으로도 이미 겸손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논어』 「학이편」에는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이라는 구절이 있다. 풀이하자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는 뜻이다. 그렇다. 우리가 이제껏 살펴봤던 효들은 모두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고 내면에 겸손의 덕성을 잘 닦아 나가는 군자였다. 하지만 상육은 자기를 좀 봐달라고 칭찬해달라고 울고 있으니 군자라고 할 수 없다. 결국 상육은 위치로 보나, 그 행실로 보나 여러모로 소인이다.


그런데 명색이 겸손을 말하는 지산겸괘가 막내 상육을 이대로 버려둘 리가 있겠는가. 바로 이어 소인의 작태를 버리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군사를 써서 읍국을 치라고 말이다! 엥? 우리는 여기서 또 한 번 멘붕을 경험한다. 겸손을 회복하는 솔루션이 전쟁이라니.. 자자 정신을 수습하자 이제 『주역』의 황당무계한 말들에 면역될 때도 되었다. 사실 군사를 써서 읍국을 치라는 말은 고도의 비유다. 여기서 읍국이란 내 마음속에 똬리 틀고 있는 욕심과 인정욕망을 말한다. 즉 마음을 잘 수양해서 내 마음속에 삿된 망상을 쳐부수라는 말이다. 


겸손은 힘들다는 노래까지 등장!!


지금까지 지산겸괘를 통해서 ‘겸손’의 참된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제 알겠지만 지산겸괘가 말하는 겸손은 남에게 자기를 비하하고 남에게 아부하는 것도, 사람들과 사귀기 위해 알랑방구를 끼는 것도 아니다. 꾸준히 자신을 수양해서 삿된 욕심이나 오만함을 걷어내는 군자의 수행! 이것이야말로 겸손의 본래면목인 것이다. 언젠가부터 자신을 내세우고 과시하는 게 미덕인 시대가 되어 버렸다. 자연히 겸손의 미덕은 퇴색되어 버렸다. 모두가 자기를 알아달라고 명겸하는 요즘 지산겸괘가 말하는 겸손을 다시금 되새겨보자. 



곰진(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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