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고대에서 배우는 네트워크의 윤리! - 천화동인

네트워크의 윤리 - 천화동인



바야흐로 네트워크의 시대다. 컴퓨터가 탄생한 이후, PC통신 동호회를 중심으로 소소하게 자기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던 것이,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네트워크는 거역할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이제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너 실시간으로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


인터넷에 접속하는 전 세계의 친구들과 사귀고, 정보를 교환하고, 각자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수많은 동호인을 만난다. 인터넷은 이러한 사람들이 마음껏 뭉치고 만날 수 있는 장을 펼쳐 놓았다. 세계 최대의 소셜 네트워크 페이스북을 비롯하여 트위터, 카카오톡, 밴드, 카페, 그 밖의 커뮤니티들…. 이와 같이 인터넷상에서 이뤄지는 커뮤니티도 많지만, 오프라인에서도 각종 모임에다, 무슨 무슨 공동체들이 얼마나 많은지.


현대는 그야말로 네트워크의 시대!


셀 수 없이 많은 네트워크들이 난무하지만 우리는 이 네트워크들에 대한 윤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네트워크에 가입은 하는데 내가 거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은 생무시한다. 그래서 네트워크는 밝은 면으로 작동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어두운 면으로 작동할 때는 가히 폭력적인 무기가 된다. 이것이 이른바 네트워크의 흑역사다. 네트워크는 횡행하고 있는데 그 윤리는 허수아비 신세. 그러다 보니 무슨 일이 생기면 허겁지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떠들다가, 고작해야 제도에 의지해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수준이다. 그러고 보면 21세기 눈부신 현대문명은 어쩌면 이렇듯 무력하고 대책 없는 문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고대문명에서 천지자연의 이치를 그려 보인 책, 주역에서는 네트워크의 커뮤니케이션 윤리를 괘로 설명하고 있다. “요즈음 사람들은 복희가 역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천지조화의 리(理)를 보여 주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그들이 어떻게 복희의 의도를 알 수 있겠는가? 더구나 복희가 역을 그렸을 때도 그에게 의도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그때 자연의 도리를 알았지만, 그 도리 쪽이 그의 손을 빌려 팔괘로 나타났을 뿐이다. 그러므로 점을 치면 반드시 응한다.”(『주자어류선집』, 243쪽)


주역은 천지자연의 이치를 복희씨의 손을 빌려 밝힌 책이다. 천지자연의 산물인 사람이 그것에 다가가 감(感)하면 반드시 응해 그 이치를 드러낸다. 그 이치는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로 작동된다. 자연의 이치가 살아감의 원리로 변주되는 것. 그것은 곧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 삶의 윤리로 발현된다. 그렇다면 천지자연이 펼쳐 보인 커뮤니케이션 윤리는 과연 어떤 괘일까? 그것은 바로 천화동인(天火同人)이다. 자, 이제 그 지혜 속으로 풍덩 서핑을 떠나 보자.       



천화동인 괘사


同人于野 亨 利涉大川 利君子 貞(동인우야 형 이섭대천 이군자 정)
사람을 같이하는 것을 들에서 하면 형통하리니,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로우며, 군자의 바름이 이로우니라.

건괘와 이괘로 이루어진 천화동인괘!


천화동인괘는 하늘에 해당하는 건괘(☰)가 위에 있고 불에 해당하는 리괘(☲)가 아래에 있다. 아래에 있는 불은 훨훨 타올라 위로 올라가니, 위에 있는 하늘괘인 건괘와 같이한다. 이렇게 불이 타올라 하늘과 같이하는 모습을 뜻하여 천화동인(同人)이라 했다. 하여 천화동인은 천지만물이 같이하는 것을 대표한다.


사람이 같이하는 것(同人)은 힘을 합해 막힌 것을 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너와 내가 서로 기대어(人)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고, 네트워크를 만들어 서로의 관심사를 나누고 의견을 나누고 교류한다. 이렇게 동인(同人)하는 것은 인간존재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괘사에서는 이 동인을 만인이 볼 수 있는 들에서 해야 형통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공공연하게 볼 수 있는 데서 동인한다면 힘이 모아져 형통할 것이고, 그 힘으로 대천을 건너는 큰일이나 어려운 일을 해내는 이로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천지만물이 볼 수 있는 들에서 동인해야 한다고 했을까?

彖曰 同人 柔 得位 得中而應乎乾 曰同人(단왈 동인 유 득위 득중이옹호건 왈동인)
단전에 이르길 동인은 유가 위를 얻으며 중을 얻어서, 건에 응하니 이르길 동인이라.

(同人曰)同人于野亨利涉大川 乾行也(동인왈 동인우야형이섭대천 건행야)
(동인에 이르길) ‘동인우야형이섭대천’은 건장하게(건의) 행하는 것이요,

文明以健 中正而應 君子正也(문명이건 중정이응 군자정야)
문명해서 굳세고 중정해서 응함이 군자의 바름이니,

唯君子 爲能通天下之志(유군자 위능통천하지지)
오직 군자라야 능히 천하의 뜻을 통하느니라.

象曰 天與火 同人 君子 以 類族 辨物(상왈 천여화 동인 군자 이 유족 변물)
상전에 이르길 하늘과 불이 동인이니, 군자가 이로써 유와 족으로 물건을 분별하느니라.

천화동인의 효를 보면 육이효 하나만이 음이고 초구, 구삼, 구사, 구오, 상구의 다섯 양이 모두 음효 하나와 같이한다. 이렇게 뜻을 같이하니 동인의 의미가 되는데, 음인 유(柔)는 중정한 자리에 있어 중을 얻었고 하늘괘에 있는 구오와 응하고 있다. 즉 육이가 제자리를 얻어 자리를 잘 지키면서 중도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중도를 행한다는 말은 하늘이 모든 만물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사로이 대하지 않듯, 육이도 다섯 양에게 공정하고 굳세게 대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단전에서는 건행(乾行)이라고 하였다. 하늘이 만물을 대하듯 지공무사(至公無私)하게 동인하는 것. 숨김이나 거리낌 없이 그대로 드러나 사사로움이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건행이다. 


이렇게 건행하는 군자만이 천하의 뜻에 통할 수 있다. 사사로움을 등진 군자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밝힌다. 그리고 동인의 무리가 갈 방향을 지시(類族)한다. 건행하여 모든 것이 훤히 밝혀진 뒤라야 동인은 같은 방향을 보고 길(道)을 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건행하면서 동인하라는 괘사는 네트워크의 투명한 공통감각을 다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네트워크의 흑역사 키보드워리어여! 동인하고 건행하라!


하지만 요즘 소셜 네트워크들을 보면, 천화동인에서 제시하는 투명한 공통감각과는 거리가 멀다. 폐쇄적 익명성을 담보로 음담패설과 욕설이 난무하고 특정한 사람을 따돌려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다. 네트워크가 가진 익명성의 폐해를 천화동인은 건행하면서 동인하라는 말로 아프게 꼬집고 있다.



천화동인 효사


初九 同人于門 无咎(초구 동인우문 무구)
초구는 동인을 문에서 함이니 허물이 없으리라.

象曰 出門同人 又誰咎也(상왈 출문동인 우수구야)
상전에 이르길 문에 나가서 동인하는 것을 또 누가 허물하리요.

동인함에 있어 첫 출발을 알리는 초구. 문밖에 나가 동인하란다. 처음부터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떳떳하게 하라는 것. 이것은 앞서 본 건행과 일맥상통한다. 이로써 네트워크의 첫 번째 윤리는 모든 것을 오픈해서 투명하게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공명정대하게 동인하면 허물이 없다는 말씀.

六二 同人于宗 吝(육이 동인우종 인)
육이는 동인을 종친에서 함이니 인색하도다.

象曰 同人于宗 吝道也(상왈 동인우종 인도야)
상전에 이르길 ‘동인우종’이 인색한 도이다.


육이는 음으로써 양들과 동인해야 한다!


두 번째 효는 음으로 육이다. 앞서 괘사에서 보았듯, 음이 음자리에 있어 바르고 내괘의 중을 얻어 중정하다고 했다. 헌데 그 자리를 놓고 말할 때는 설명이 달라진다. 육이는 저 혼자 음이니 모든 양과 동인할 위치에 있다. 초구와 구삼은 이웃이라 넘보고 구사는 멀고 상구는 더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육이는 이 상황에서 유독 구오 인군과 직접 응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과 공평하게 동인해야 할 위치에 있는 육이가 구오하고만 동인하니 인색하다는 것이다. 이로써 두 번째 네트워크의 윤리는 끼리끼리 동인하지 않는 것이다. 

九三 伏戎于莽 升其高陵 三歲不興(구삼 복융우망 승기고릉 삼세불흥)
구삼은 군사를 숲에 매복시키고 그 높은 언덕에 올라 3년을 일어나지 못하도다.

象曰 伏戎于莽 敵剛也 三歲不興 安行也(상왈 복융우망 적강야 삼세불흥 안행야)
상전에 이르길 ‘복융우망’은 적이 강함이요, ‘삼세불흥’이니 어디를 가리요.


구삼은 욕심을 내서 불란을 만들어 말아야 한다.


다음 세 번째 효는 구삼이다. 구삼은 강하기만 하고 중을 얻지 못했다. 육이로 말할 것 같으면 구오와 응하는 천정배필(天定配匹)의 자리이다. 그런데 구삼은 육이와 동인하려고 욕심을 내고 육이와 천정배필인 구오와 일전을 불사한다. 군사를 매복시켜 대적하려 하나 3년 동안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니 어찌되겠는가?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구삼의 강함은 부러지고 마는 것이다. 이로써 세 번째 네트워크의 윤리는 욕심을 내서 불란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九四 乘其墉 弗克攻 吉(구사 승기용 불극공 길)
구사는 그 담에 오르되 능히 치지 아니하니 길하니라.

象曰 乘其墉 義弗克也 其吉 則困而反則也(상왈 승기용 의불극야 기길 즉곤이반칙야)
상전에 이르길 ‘승기용’은 의가 이기지 못함이요, 그 길한 것은 즉 곤해서 법에 돌아옴이라.

다음은 구사. 구사는 구양이 네 번째 자리에 있어 강유(剛柔)를 겸비했다. 구사도 욕심을 가지고 있지만 음자리에 있기 때문에 구삼처럼 나가지 않는다. 구사가 강유를 겸비해 구오와 싸우지 않으니 길하다. 이것은 구사가 싸움을 포기하고 자기 원칙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네 번째 네트워크의 윤리로 삼을 만하다. 구사가 현명하게 욕심을 버리고 자기 중심을 찾았듯이 자기 위치, 자기 자리에서 원칙을 찾는 것. 이것이 네 번째 윤리다.

九五 同人 先號咷而後笑 大師克 相遇(구오 동인 선호조이후소 대사극 상우)
구오는 동인이 먼저 부르짖어 울고 뒤에는 웃으니, 큰 군사로 이겨야 서로 만나도다.

象曰 同人之先 以中直也 大師相遇 言相克也(상왈 동인지선 이중직야 대사상우 언상극야)
상전에 이르길 ‘동인지선’은 중을 하고 곧음으로써요, ‘대사상우’는 서로 이김을 말함이라. 


구삼은 공감무능력자?


구오는 육이와 서로 잘 응한다. 누가 뭐래도 천정배필이다. 구삼이 군사를 매복시켜 싸움을 걸어오니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싸워 이긴다. 구오와 육이의 만남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방해물을 물리치고 만난다.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건 두 사람(구오와 육이)의 마음이 서로 통해 그 어떤 난관도 뚫고 이겨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천지만물이 감응하는 것과 같이 서로가 공감하는 능력이 남다른 것이다. 이로써 다섯 번째 네트워크의 윤리는 공감의 능력을 배양하라는 것이다.

上九 同人于郊 无悔(상구 동인우교 무회)
상구는 동인을 들에서 함이니 뉘우침이 없느니라.

象曰 同人于郊 志未得也(상왈 동인우교 지미득야)
상전에 이르길 ‘동인우교’는 뜻을 얻지 못함이라.

마지막 효는 상구다. 상구는 정치하는 자리를 떠났다.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면서 산다. 그래서 상구는 들에서 동인한다. 들은 들인데 앞의 초구는 들야(野)이고 상구의 들은 성 밖의 들(郊)이다. 이것은 의도가 없는 천지만물처럼 그 어떤 목표도, 목적도 없이 천지만물과 사귀는 동인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한 점 후회가 없다. 이것이 마지막 네트워크의 윤리다. 천지만물과 자연스럽게 동인하는 경지, 네트워크의 최고 경지라 할 수 있다. 먹은 마음 없이 텅 빈 상태, 그때라야 천지만물을 받아들여 사귈 수 있지 않겠는가? 


유느님 동인하세요!!


새롭고 거대한 동인의 시대가 열린 지금, 네트워크의 윤리를 차근차근 짚어봐야 할 때다. 천화동인괘는 어울림의 지혜를 알려 준다. 그 지혜들을 요약하면, 첫번째는 모든 것을 오픈해서 투명하게 하라는 것, 두번째는 끼리끼리 동인하지 말라는 것, 세번째는 욕심을 내서 불란을 만들지 말라는 것, 네번째는 자기 위치, 자기 자리에서 원칙을 찾으라는 것, 다섯번째는 공감의 능력을 배양하라는 것, 마지막은 그 어떤 의도 없이 천지만물과 사귀라는 것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천금 같은 말씀이다. 이 어울림의 지혜를 실천하다 보면 그 어떤 것과 동인해도 한 점 후회가 없는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아, 들에 나가 바람을 맞으며 천지만물과 동인하고 싶다. 


이영희(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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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014.03.27 11:55 답글 | 수정/삭제 | ADDR

    비밀댓글입니다

    • 북드라망 2014.03.27 12:13 신고 수정/삭제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내용과 <투명사회>에서의 '투명성'은 맥락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투명사회>를 읽지 않아서, 이 부분은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천하동인괘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 중 하나로
      '모든 것을 오픈해서 투명하게 하라는 것'을 이야기했는데요,
      이것은 관계맺기, 어울림의 측면에서 적용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네트워크 상에서 익명의 이름 아래에서 다른 이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장면들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이러한 폐쇄적이면서도 공격적인 방식의 관계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나온 이야기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사생활의 역사>라는 책이 있는데요
      이 책에서는 사생활에 대한 개념이 시대적으로 어떻게 변하는지 나오므로
      시간이 되실 때 한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 2014.03.27 14:23 답글 | 수정/삭제 | ADDR

    비밀댓글입니다

    • 북드라망 2014.03.27 14:09 신고 수정/삭제

      네, 말씀해주신 내용 글쓴이에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한 오후 되시길 바랄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