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진액-에피쿠로스
마주침의 유물론
회사원이라면 처음 만난 사람끼리 악수를 주고받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다. 물론 명함을 교환하는 것도 빠트릴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 마다 약간 망설여진다. 땀이 많은 손 때문이다. 특히 상대가 외국인이나 여자라면 민망함이 커져, 회의 내내 안절부절못할 때가 부지기수다. 어느 정도냐 하면, 심할 때는 명함이 단 몇 분 만에 홍건이 젖을 때도 있다. 어쩌면 나는 전생에 물고기가 아니었을까. 사방이 물로 뒤덮인 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그리 엉뚱한 말도 아니다. 춘삼월 강변 바람이 산불을 더 강렬하게 키우듯, 회의 내내 안절부절못하는 내 긴장은 손을 익사 상태로 몰아넣는다.
몸속을 돌아다니는 물을 동의보감에서는 ‘진액’이라고 한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진액이 다빠졌어!”라고 푸념할 때 그 진액이다. 그런데 이 진액이 사실은 하나가 아니다. 진과 액으로 구분된다. 주리(살가죽 겉에 생긴 작은 결)가 열려서 새면 땀이 줄줄 나는데, 이것을 진(津)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진이 구멍으로 스며 나와 머물러 있으면서 돌아가지 못하면 그것은 액(液)이 된다. 몸속의 물은 대략 다섯 가지로 나뉜다. 입으로 들어온 음식물이 다섯 가지 물로 변하는 것이다. 오줌과 피, 땀, 눈물, 침이 그것이다. 땀이 날 때 척부(팔꿈치와 팔목 사이의 안쪽 살갗)를 잡아 맥을 짚어보자. 아마 거칠고 헐겁게 움직이는[滑] 경우가 있을 것이다. 동의보감은 그 이유를 몸에 피가 마르며 진이 많이 빠졌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결국 땀이 피라는 말과도 같다. 입으로 들어온 음식물이 피가 되어 내 손으로 흘러 나간다. 나의 피가 땀으로 위장하여 나가는 것이다. 이 기막힌 둔갑술이라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진액이 생기는 걸까? 다섯 가지 액은 오장과 관련된다. 간으로 들어가면 눈물이 되고, 심으로 들어가면 땀이 되며, 비로 들어가면 군침이 되고, 폐로 들어가면 콧물이 되며, 신으로 들어가면 침이 된다. 땀은 심(心)에서 나오는 액이다. 심이 동하면 갑자기 땀이 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동의보감은 아주 묘한 마주침을 이야기한다. 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심은 군화이고 비위는 토에 속하므로 습과 열이 서로 부딪쳐서 땀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몸 안에서 화(火)와 토(土)가 마주쳐서 땀이 생긴다는 말이다. 화의 길과 토의 길은 물론 다르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 서로 돌발적으로 마주치면서 액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습과 열이 마주치면 혈이 손상될 수도 있고, 땀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더 들어가 보면 혈과 땀 이전에 액이 들어가는 방향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군침이 되기도, 콧물이 되기도, 눈물이 되기도 한다. 물론 모든 길이 그렇듯이 엇길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마주침이 쥐도 새도 모르게 발생한다. 즉, 이 순간적인 마주침이 현실태의 모습을 좌우하는 것이다. 그 순간은 돌발적이다. 이는 자한(自汗, 시도 때도 없이 땀이 축축하게 나는 것)을 설명할 때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된다. 땀이 많이 나오면서 몸이 연약한 것을 습증이라고 한다. 심은 열을 주관하고, 비는 습을 주관하는데, 습과 열이 부딪히면 마치 땅의 증기가 구름, 비, 안개, 이슬이 되는 것과 같이 된다. 이것을 『동의보감』은 음양의 마주침으로 설명한다.
습과 열이 부딪치는 이 순간!
『내경』에서는 “심에서 땀이 되어 나온다”라고 하였고, 또한 “양기가 음에 가해지면 땀이 난다”고도 하였다. … 『내경』 주석에서는 “양기가 위로 치밀 때 음이 고수하면 훈증되기 때문에 땀으로 된다”라고 하였다. 또한 『내경』에서는 “사람의 땀은 천지간의 비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동의보감』, 진액)
주자(朱子)는 양이 음과 합쳐질 때 처음에는 물과 불이 생긴다고 말한다. 물과 불은 흐르고 번쩍거리며 타오르기는 하지만 형체는 없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무와 쇠가 생겨나는데, 이때 비로소 형체를 띠게 된다. 심의 화와 비의 토가 마주쳐 물을 만든다. 그것은 몸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마주침이고, 이 마주침이 바로 땀이고 콧물이고 침이다.
두 개가 부딪혀 뭔가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다보면 에피쿠로스(Epicuros, BC341년경~BC270년경)가 떠오른다. 알튀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만년에 서구 철학사를 마주침의 유물론으로 재구성하려고 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물론은 정통 공산주의자들의 그것만으로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를 에피쿠로스로 소급하여 정통 맑스-레닌주의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유들을 유물론의 장에 재출현시킨다. 에피쿠로스, 마키아벨리, 루소, 스피노자, 하이데거, 데리다가 그에 의해서 모두 유물론자로 탈바꿈된다. 이 출발에 바로 에피쿠로스가 있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우주가 물체와 허공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했다. 물체들은 자신들의 무게 때문에 허공을 가로질러 아래로 떨어진다. 즉 물체들의 행로는 각자의 행로가 있으며, 그것들은 서로 평행한다. 서로 만날 일이 없는 것이다. 마치 별똥별이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과 비슷하다. 1시간에 1만개 이상의 별똥별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른바 ‘별똥비(유성우)’다. 비처럼 떨어지는 물체들. 르네 마그리트라는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 중 <겨울비(Golconde)>(1953)라는 작품이 있는데, 바로 그 그림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신사들 모습이야말로 에피쿠로스가 상상하는 그 낙하 물체들이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무수한 충돌이 만들어낸 연기적 존재들이다.
비가 아주 빨리 떨어져서 그렇지, 이 비의 세계도 속을 들여다보면 아주 다이내믹하다. 물론 처음에는 직선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하나가 살짝 비틀며 비스듬히 떨어지기 시작하면, 다른 물방울들과 부딪히기 시작할 것이고, 급기야 그 영향으로 물방울들이 연쇄 충돌이 일어나면서 작은 폭발들이 발생할 것이다. 우리에게 떨어지는 빗방울은 그런 무수한 충돌이 있은 후에야 떨어지는 것들이다. 바로 폭발이 만들어낸 연기적(緣起的) 존재들인 것이다. 우리는 항상, 언제나 이미, 대폭발 이후의 물방울을 만난다. 부딪힘은 우연이지만, 우리를 만난 것은 필연이다.
에피쿠로스는 원자들도 이렇게 비처럼 운동한다고 설명한다. 원자들은 항상 아래로 떨어진다. 자기 경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원자들은 아래로 곧장 떨어지지 않고, 무슨 이유에선지 비스듬히 떨어진다. 바로 그 유명한 클리나멘(clinamen)이다. 그 때문에 다른 원자들과 충돌하게 되고, 그래서 위로 튕긴다. 튕기는 순간 다른 원자들과 엉키게 되는데, 바로 그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물체, 새로운 복합체가 구성된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고체가 되기도 하고, 다른 원자들에 갇혀서 액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주침의 유물론이다. 세계는 애당초 물질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물론 허공 사이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서로 우연히 마주치면서 새로운 복합체를 만들어낸다. 그게 사건이 되어 가시적인 세계로 구성된다. 땀은 몸속에서 일어난 마주침의 사건이다. 무언가가 비틀며 자신의 경로를 이탈한 것이다. 어쩌면 땀은 내 몸의 탈주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면 땀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앞선 사건과 뒤의 사건이 연결될 때만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즉 앞뒤의 마주침이 없으면 내가 없을 것 같다. 땀도, 침도, 그리고 나도 그냥 비 같다.
글.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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