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사극-맥-쇼펜하우어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왕께서 급히 어의를 들라고 명한다. 중전이 아침밥을 먹다가 입덧 비슷한 것을 한 모양이다. 장면은 어느새 중전의 처소로 바뀌어 있고, 중전은 이불 속에 누워 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중전 곁에서 상태를 살펴야 할 어의가 방문 밖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만 있다. 어의는 중전의 손목에 감은 실을 길게 뽑아, 방문 밖에서 그 실오라기만 잡을 수 있을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이나 사대부집 여인네들이 병에 걸리면 의원들이 손을 잡고 직접 진맥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요쿠르트병을 실로 연결해 전화 놀이하듯 이 늙은 어의도 실오라기 하나 잡고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내 어의가 눈을 뜨더니, 머리를 넙죽 엎드리며 외친다. “전하, 경~하~드리옵나이다~! 마마께서는 용종을 잉태하셨나이다~!”
 

생각해보면 기묘한 일이다. 손목 잡고 병을 알아내는 것도 신기한데, 그것을 실로 파악해 내다니. 그래서 한동안 나는 맥을 짚는 모습 자체가 약간은 익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필시 저 커튼 안에서 다른 누군가가 손목을 잡아보고 있을 거라 상상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맥법 자체를 크게 신뢰하지 않아서, 동네 병원 내과 의사들처럼 결국엔 별도 진단으로 병을 알아내고 있으리라 지레짐작하기도 했다. 그래도 왕의 부인인데, 저따위 실로......
 

맥은 선천적인 기운이다. 그래서 혈과 기보다도 앞선다. 혈과 기를 쉬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맥이 이처럼 혈과 기보다 앞서서이기도 하다. 이런 맥은 전신에 크게 9군데가 있다. 이른바 9후맥. 몸은 상부, 중부, 하부, 3부(三部)로 나뉜다. 그 각 부에 다시 하늘, 땅, 사람에 해당하는 부위가 있다. 이를테면 상부는 이마의 양쪽 모서리가 하늘, 양쪽 볼이 땅, 양쪽 귀 앞이 사람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중부와 하부도 각각 하늘, 땅, 사람에 해당하는 부위가 있다. 이곳이 결국 맥이 뛰는 곳이다. 그럼 어떻게 병을 알아낼까. 놀랍게도 그것은 9후가 서로 상응하여 움직이느냐에 따른다. 9후가 서로 상응하다가, 만일 1후라도 나머지 8후에 뒤떨어지면 병이 난 것이다. 여기서 뒤떨어진다는 것은 같이 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침내 3부 9후(三部九候)가 서로 다 틀리게 나타나면 죽고, 상하, 좌우가 서로 틀려서 셀 수 없을 때도 죽는다.


손목에서 병을 알아내고 파악해 낼 수 있다니?!



결국 9후는 9후끼리 서로 응하고 움직이는 자체적인 박자가 있는 셈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병이 확산되고 소멸하는 양상이 객관화된 움직임으로 드러난 것이다. 병의 의지가 가시화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이런 의미에서 맥의 박자는 병의 박자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 박자가 다시 손목에 있는 촌(寸), 관(關), 척(尺) 3부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부에 살짝 누르는 것[浮], 중간쯤 누르는 것[中], 꾹 누르는 것[沈] 등 3가지의 짚는 방법을 덧붙인 다음, 앞의 3부와 결합하여 9후를 구성한다. 병의 운동이 전신에 걸쳐 있는 3부 9후에 드러나고, 다시 이것은 손목에 집중되어 있는 3부 9후에 다시 표현된다.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병과 3부 9후의 맥이 서로 원인과 결과로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병과 맥은 원인과 결과가 아니다. 병은 병대로의 원인-결과가 있다. 맥은 맥대로 원인과 결과가 있다. 병은 맥으로 표현될 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병과 맥은 동일한 것이다. 동일한 것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의보감』에서 소개하고 있는 27가지 맥은 보이지 않는 병의 27가지 생생한 모습이다. 그것들의 움직임은 문학적이기까지 하다. 부맥(浮脈)을 설명하는 장면을 보자.


꾹 누르면 좀 부족하고, 손가락을 들어 살짝대면 여유가 있어 맥이 살 위로 지나가는 것 같다. 마치 국을 끓일 때 비계 덩이가 떠오르듯이 벌렁벌렁하는 것 같다. 또한 마치 물에 나무가 떠내려가는 것처럼 맥이 떠서 나타난다. 부맥은 풍증이고 허증이다. 곧 부하면서 힘이 있으면 풍증이고, 부하면서 힘이 없으면 허증이다.


─『동의보감』 권삼 맥, 819쪽


규맥은 마치 파 잎을 누르는 것 같고, 활맥은 구슬이 빨리 굴러가듯 하며, 현맥은 활시위 같은 모양을 띠고, 긴맥은 단단한 노끈이나 꼰 새끼줄과도 같다. 이런 표현은 몇 페이지에 걸쳐 죽 이어진다. 병의 움직임이 이다지도 섬세하고 아름답단 말인가. 맥은 바로 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맥은 병의 아름다움이 객관화된 가시적인 리듬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객관화에 주목한 철학자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흔히 존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세계’는 그저 표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서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이란 의식 외부에 있는 대상을 의식에 떠올릴 때 나타나는 심상(心象)을 말한다. 바나나라고 말해보라. 그때 머리에 뿌옇게 떠오르는 노란 형상이 바로 표상이다. 그것은 눈으로 지각할 때 그 순간 착상되어 떠오를 수도 있고, 과거에 봤던 것을 기억했을 수도 있으며, 어린아이처럼 전혀 보지 못했지만 몇 가지 정보를 결합하여 상상했을 수도 있다. 여하튼 바나나라는 말 때문에 그것을 머리에 떠오를 때 그 형상을 표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쇼펜하우어가 “세계는 표상이다”1라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지고, 보고, 느끼는 이 실감어린 세계가 그저 내 머리에 떠올린 형상에 불과하다니!
 

쇼펜하우어는 칸트처럼 현상계와 물자체를 구별한다. 사물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 형식 아래에서만 주어진다. 변할 수 있어야 하고(연속), 부피를 가질 수 있어야 하니(위치) 당연한 말이다. 시간과 공간의 결합을 통해서 지속 가능성과 동시성이 생기면서 비로소 물질로서 인식된다. 이렇게 일이 진행되는 곳을 현상계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감각자료들을 근거율, 즉 원인과 결과와 같은 사유형식(오성)을 통해서 종합한다. 다시 말하면 “A라는 물질은 B라는 물질로 변한다”와 같이 ‘원인-결과’를 묶는다. 자연과학은 이런 ‘원인학’에 불과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오로지 현상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일 뿐이라는 점이다. 쇼펜하우어의 구도 하에서라면 그것은 오로지 내 심상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상 밖에 있는 것을 결코 직접적으로 직관하지 못하기에 그렇다. 우리는 ‘사물’을 마음 밖에서 직접 만나지 못한다. 오로지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근거율에 의해서만 마음에 표상할 수 있을 뿐이다. 쇼펜하우어가 “세계는 표상이다”라고 단언할 때의 의미는 바로 이런 의미다.
 

그렇다면 현상계 너머의 물자체란 무엇인가? 사실 방금 말한 표상은 주관에 맺힌 객관이었다. 하지만 주관에 맺히지 않고도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진짜 그것’(物自體, Das Ding an sich)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물자체는 이 의문에서 출발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객관들은 표상일 뿐, 물자체가 아니다. 이를 파악하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이 물자체를 파악하기 위해 ‘신체’를 경유하는 전략을 취하는데, 신체를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첫째로 다른 객관적인 사물처럼 표상에 떠올린 신체로 보는 것이다. 앞서서 세계는 표상이었다. 따라서 신체도 예외는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이 신체를 “객관들 중의 객관”2이라 부른다. 현상계에서는 근거율에 따를 것이므로 시간이 갈수록 노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둘째로 근거율에 따라 움직이는 객관으로서의 육체를 전부 지우고 나면, 육체는 인간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의 갈망이나 감정이 육체에 나타나면서 발생하는 육체의 움직임이야말로 신체 그 자체, 신체 본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실제로 행동을 하려는 경우, 그것이 동시에 신체의 운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지각한다. 이 경우 육체는 우리 자신의 의지작용의 표현으로 경험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의지와 신체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의지가 신체로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더 나가서 쇼펜하우어는 “내 신체와 내 의지는 동일하다. … 내 신체는 내 의지의 객관성이다”3라고 말한다. 그것들은 서로 동일한 것이고, 다만 상이한 방식으로 주어져 있을 따름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간다. 쇼펜하우어는 신체를 그렇게 두 가지 방식으로 볼 수 있다면, 신체 이외의 현상세계 전체도 그와 동일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현상세계도 객관적인 인식의 객체로 파악될 수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근저에 존재하는 물자체로서의 의지가 표현된 것으로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세계는 철저히 의지이고, 철저히 표상이며, 그 밖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4 표상은 의지의 객관화이다. 의지는 물자체이다. 물자체인 의지는 표상으로 드러난다. 세계는 의지이자 표상이다.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표현하고 있기에.



(脈)이라는 글자는 막(幕)이란 말과도 같다. 마치 막 밖에 있는 사람이 막 안의 일을 알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커튼 밖에서 커튼 안의 일을 엿보는 것이다. 중전의 맥을 짚고 있는 저 어의의 모습이 맥의 정의와 똑같다.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다. “치아, 목구멍, 장기는 객관화된 배고픔이고, 생식기는 객관화된 성욕”5이라고 했던 쇼펜하우어의 말을 다시 상기해보면 이것은 명백해진다. 내가 명품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폼나는 말을 하더라도, 이미 그것은 나의 비가시적인 욕망(의지)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여주는 ‘나’의 표현이다. 나는 나를 숨길 수 없는 것이다.



글.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1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40쪽

2 위의 책, 188쪽
3 위의 책, 192쪽

4 위의 책, 283쪽

5 위의 책, 201쪽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10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옮김/을유문화사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