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오는 구원은 없다
루쉰이라는 두번째 전쟁기계는 나를 더욱 격렬하게 몰아친다. 이 전쟁기계는 어딘가에 의존하고 싶어 하는 내 심약한 상태를 산산조각 냈다. 루쉰의 공포는 그가 어떤 구원도 바라지 않는 데에서 온다. 구원은커녕, 그는 네가 꿈꾸는 구원이야말로 남의 피를 빨아먹는 동냥에 다름 아니라고 호통 치며, 약자들에게 기꺼이 동냥해 주려는 강자들 역시 증오해 마지않는다. 신(神)조차도 루쉰의 비웃음을 피해 가지 못한다.
……
루쉰은 말한다. 밖에서 오는 구원은 없다. 세상 모든 게 다함께 ‘좋아’지거나 최소한 세상의 다른 것들이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나만 ‘더 나아진’ 삶을 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꿈이다. 동냥이란 무엇인가. 타인이 나에게 혹은 내가 나 자신에게, 뭔가를 기대하거나 기대를 기대함으로써 하루하루 삶을 유지하는 것은 다 동냥이다. 설령 그것이 공명정대한 대의명분으로 내세워진다고 하더라도 동냥이다. 구원을, 혁명을, 피를, 내 삶과 꿈을 동냥하는 모습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루쉰이 증오하던 거지아이처럼 때깔 좋은 옷을 입고 불행과 무지를 구걸했으며 어쩌다 주어진 위안을 구원의 증표처럼 여겼다.
……
한때 나는 나의 세대에 대해 이상한 피해의식이 있었다. 할 수 있는 논리가 ‘먹고 살게 해 달라’는 빈약한 동냥밖에는 없다는 것이 싫었고, 또 온갖 물질적 풍요를 다 누리고도 타자에 대해 가장 무감각하고 무능력한 ‘권태로운’ 신체라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지금에야 생각한다. 내가 넘어서야 하는 것은 바깥의 장애물도 나의 세대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에 가득히 차 있는 ‘동냥치’들이었다. 일상이 권태롭다면, 그것은 세상 속에서 배제당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망상을 끌어안고서 세상의 껍데기에서만 표류하고 있다는 증거다. 머리로는 가장 일반적인 망상을 쫓아가면서 실제 일상에서는 안 풀리는 일들을 남(혹은 내) 탓으로 돌리는 것. 이건 전사의 피를 찾아다니는 무료한 군중들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군중이 되지 않는 길은 무엇일까? 나 스스로가 수행하는 것밖에는 없다. 서툴더라도 새 속도를 내는 수밖에 없다.
― 김해완, 『리좀, 나의 삶 나의 글』, 194~196쪽
그렇다. 내가 타인에게는 물론 타인이 나에게 혹은 내가 나 자신에게, 뭔가를 기대하거나 기대를 기대함으로써 하루하루 삶을 유지하는 것은 다 동냥이다. 그것이 아무리 고귀한 사상을 등에 업은 기대라 해도, 어떤 정의로움을 담은 생각이라 해도.
스스로가 진심으로 동냥치가 아니길 바란다면, 그렇다. 다만, 하루하루를 기대없이, 망상없이, 내가 직접 움직여 만든 내 속도로 살아내는 수밖에, 그것밖에는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한다. 검을 쓰는 법만큼이나 쓰지 않는 법도 익히는 자가 바로 전사라고. 수행이 길러내는 것은 역량이지, 단순한 파괴력이 아니다."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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