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야 산다! - 산수몽괘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주팔이(훗날의 갖바치)는 묘향산에 갔다가 조그만 암자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한 눈에 보통사람이 아님을 간파한다. “그 사람이 무엇일까? 도승일까? 이인일까? 내가 갈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지! 도기(道氣)가 있는 외모만 보더라도 분명히 이상한 사람이야! 내가 그 사람 밑에 가서 제자 노릇이나 해보겠다...지성감천이라니 어디 정성을 들여보지”...주팔이가 뜰아래에 서서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하고 허리를 굽히고 “말씀 여쭙기 외람하오나 제자로 두시고 가르쳐주시기를 소원합니다.”하고 공손히 절하였다...(이상한 사람은) 간단한 대답으로 거절한다. 주팔이는 서있었다. “옛 사람은 선생의 집 문 앞에서 석 자 눈이 쌓이도록 서 있었다 하니 나도 그만한 정성을 보이리라.” 주팔이는 속으로 생각하며 두 손길을 맞잡고 단정하게 서 있었다. 다리에 피가 내리도록 서 있었다. 다리가 떨리었다...나중에는 주팔이가 쓰러지지 아니하려고 애를 쓰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아니하여 썩은 나무같이 쓰러졌다....사흘 되던 날 첫새벽에 주팔이가 “정성이 부족한 탓이다 오늘은 그 암자에서 밤을 새우더라도 선생님의 허락을 받도록 정성을 들이리라.” 생각하고 올리오니 그 날은 선생이 행기하러 나가지 아니하고 암자에 있다고 들어오는 주팔을 보고 곧 “너의 정성이 무던하다. 이 방으로 들어오너라.” 말하였다...이리하여 주팔이는 머리 깎고 수염 있는 그 이상한 사람에게 제자 노릇을 하게 되었다...선생이 주팔이를 사랑하는 까닭에 자기가 아는 천문지리와 음양술수를 아끼지 않고 가르쳐주어서 불과 사오 삭 안에 주팔의 재주가 거의 선생을 따르게 되었다.
─ 임꺽정, 홍명희, 사계절, 1권 봉단편, 209~215쪽
공자는 64괘의 배치 순서를 설명한 『주역』,「서괘전」에서 “둔은 가득 참이니 곧 물건이 처음 나오는 것이다. 물건이 나오면 반드시 어리므로 그 다음을 기른다는 몽(蒙)으로 받았다. 몽은 무지몽매란 뜻이 있다.”고 했다. 64괘의 아버지인 건괘와 어머니 곤괘 사이에서 만물은 힘겹게 탄생하게 된다. 둔(屯)은 아직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상태이므로 교육해서 잘 길러야 한다. 이것이 몽괘가 된다. 즉 몽괘는 이제 갓 태어나서 세상물정 어두운 둔을 교육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어둡고 무지몽매한 상태 - 몽
몽을 파자해보면 그 뜻이 잘 드러난다. 몽(蒙)은 어리석은 생명을(돼지 시 : 豕) 풀(艹)로 잘 덮어서(덮을 멱 : 冖) 기르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다. 하여 몽은 ‘어두울 몽’, ‘어리석을 몽’, ‘어릴 몽’, ‘기를 몽’, ‘입을 몽’ 등의 뜻을 가진다. ‘어리석다’, ‘무지몽매하다’라는 표현들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지만 산수몽은 부정적인 괘가 아니다. 괘상을 보면 산 아래(산)에서 샘물(수)이 졸졸 흐르는 상으로 샘물은 작은 시내와 큰 강을 흘러서 마침내 바다로 향하게 된다. 그것은 물이 강이나 바다로 향하고자 하는 지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속에서 벗어나 스승에게 배움을 청하고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모든 만물의 시작은 어리고, 무지몽매하다. 가령 ‘남상(濫觴)’이라는 말이 있는데 양자강과 같은 큰 강도 그 근원을 따라가면 술 잔 하나를 겨우 띄울만한 세류에 불과하다는 것. 그 어린 남상이 수많은 지류와 합쳐진 뒤에야 거대한 양자강이 되는 것처럼. 인간도 지류에서 큰 강으로 가려면 교육이 필요하다. 즉, 동몽(童蒙)이 군자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이제 배움의 현장을 떠올리면서 산수몽괘 이야기를 만나보기로 하자.
산수몽 괘사
蒙 亨 匪我 求童蒙 童蒙 求我 (몽 형 비아 구동몽 동몽 구아)
몽은 형통하니 내가 동몽을 구함이 아니라 동몽이 나를 구함이니
初筮 告 再三 瀆 (초서 곡 재삼 독)
처음 점치거든 알려주고 두 번 세 번 하면 더럽히는 것이라.
瀆則不告 利貞 (독즉불곡 이정)
더럽힌즉 알려주지 말지니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라.
산수몽괘는 교육하는 괘로써 가르치는 스승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몽 형 비아 구동몽 동몽 구아(蒙 亨 匪我 求童蒙 童蒙 求我)가 바로 그것이다. 풀어보자면 스승이 제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제자가 스승을 찾아야 한다는 것. 사교육에서는 물론 공교육에서조차 선생님이 제자를 유치(?)하기 위해 애쓰는 요즘에는 참으로 낮선 장면이다. 하지만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무지를 깨우치고 신체적 근기(根氣)를 바꾸기 위해 수많은 학인들이 스승을 찾아 천하를 헤맸다. 배우고 싶은 스승을 찾기도 쉽지 않았지만 막상 스승을 찾았다고 해도 제자가 되기란 쉽지 않았다. 지금처럼 학교나 선생님의 서비스에 길들여진 우리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스승에게 사사 받기 위해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주팔이(갖바치)는 몇 날 며칠을 문 밖에 서있는 정성과 인내가 필요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제자가 되어도 바로 공부를 하는 건 아니었다. 청소, 밥 짓기, 나무하기 등등 각종 신체적 훈련을 견뎌야 했다.
스승에게 공부를 배우기 이전에 신체적 훈련이 먼저!
이것은 단순히 괴짜 스승이 제자지망생에게 부리는 꼬장(?)이 아니다. 학인들은 이런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공부할 수 있는 신체, 겸손하고 부지런한 신체로 거듭난다. 더불어 사제간의 끈끈한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만약 제자가 스승을 믿지 않고 자꾸 의심을 품으면 옳지 못하다. 그래서 제자가 처음 물어 보았을 때는 가르쳐주지만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물어본다면 단호하게 알려주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제자가 스승을 의심하고 믿지 못할 때는 어떤 배움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점을 치는 것도 스승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처음 점쳐서 길하지 않다고, 원하는 점괘가 나올 때까지 계속 점을 친다면 그것은 사술이나 미신으로 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언가를 의심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주장하는 것으로 그 행위는 사제 간의 신뢰와 천지자연의 법칙을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제자는 처음 나온 괘든 스승의 가르침이든 토 달지 말고 바르게 실천해야 길함을 괘사는 알려준다.
산수몽괘에서는 구이 양(陽)이 스승에 해당하는 효이고, 육오 음(陰)이 제자에 해당하는 효이다. 여기서 산수몽을 쉽게 이해하는 팁 두 가지. 첫 번째 산수몽은 초육(初六)에서 상구(上九)까지 각 효마다 배움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각 효마다 배울 때의 유의점이 다르게 제시되어 있다. 그럼 두 가지 팁을 기억하면서 배움의 다양한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산수몽 효사
初六 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 吝 (초육 발몽 이용형인 용탈질곡 이왕 인)
초육은 몽을 발육하되 사람에게 형벌함을 쓰고서 써 질곡을 벗김이 이로우니, 형벌로써만 해나가면 인색하리라
상괘는 산, 하괘는 수로 이루어진 산수몽
초육은 산수몽괘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 효이다. 게다가 음효(陰爻)로 심히 어둡고 무지한 상태다. 『주역』의 각 효들은 주위에 어떤 효가 위치하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는데 초육의 경우 스승에 해당하는 구이가 바로 위에 위치한 까닭에 구이에 의해 교육을 받게 된다. 그런데 구이의 교육방법이 좀 특이하다. 처음에는 초육을 마치 죄인을 다루듯이 엄격하게 대하다가 점차 부드럽게 풀어주고 있다. 묘항산 암자의 ‘이상한 스승’이 주팔이를 대하던 일을 생각해보라. 처음에는 절대 마음을 열지 않을 것처럼 엄격하게 대한다. 하지만 주팔이가 정성을 다해 스승을 섬기면서 부지런히 공부하자 결국 주팔이를 사랑하고(헛!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사랑이 가능하다!) 자신의 모든 학문을 전수해준다. 이처럼 처음 제자에게 형벌에 가까우리만큼 엄격하게 대하는 것은 스승에 대한 의심을 막고, 정진케 하기 위한 스승의 전략인 것이다. 그런데 계속 엄격하기만 하다면...제자가 공부에 흥미를 잃고 심하면 짐을 싸서 떠날 수도 있으니 적절하게 운용의 묘를 펼쳐야 한다.
九二 包蒙 吉 納婦 吉 子 克家(구이 포몽 길 납부 길 자 극가)
구이는 몽을 감싸면 길하고 지어미를 받아들이면 길하리니 자식이 집을 다스리도다.
구이는 산수몽괘의 주인공이다. 주역에서 대부분은 다섯 번째 효가 주인공이다. 64괘에서 5효가 제왕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괘상을 볼 때는 희소성도 중요하게 본다. 따라서 산수몽 괘의 경우는 구이가 양이므로 뭇 음들을 통솔하는 주인공이 된 것이다. 앞서 보았듯 공부하는 산수몽 괘에서는 구이가 스승에 해당한다. 구이는 양으로 모든 음 제자들을 표용하고 가르친다. 또한 구이는 육오와 음양응(陰陽應)하므로 여러모로 길한 효다. 이것을 구이 양이 육오 음과 혼인하여 자식도 낳고 집안을 건사하는 가장이 되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六三 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無攸利 (육삼 물용취녀 견금부 불유궁 무유리)
육삼은 써 여자를 취하지 말지니 돈 있는 사내를 보고 몸을 두지 못하니 이로울 바가 없느니라.
육삼은 원래 상구와 응(應)해야 한다. 하지만 바로 아래 구이가 너무도 매력적인 스승이 아닌가! 그래서 짝인 상구를 버리고 구이와 응하기 때문에 불륜의 마음을 품은 것이다. 육삼은 자신의 의지를 굳건하게 지키지 못하고 그것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 탓에 다른 효들의 효사에는 몽자를 붙여 설명했지만 육삼효만은 몽자를 붙이지 않았다. 배우려는 태도가 이미 없기 때문이다.
육삼효와 관련된 재밌는 일화가 있어서 잠깐 소개하겠다. 공자가 천하를 주유할 때 한번은 길가에 똥을 싸는 놈을 보았다. 공자는 그 놈을 잡아다가 인간의 윤리를 들어 크게 꾸짖었다. 그리고 얼마 뒤 이번에는 길 가운데 똥 싸는 놈을 만났는데 공자는 그 놈을 꾸짖기는커녕 피해서 갔다. 의아하게 여긴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물어보자. “저 자는 일말의 양심도 없는 자이다. 길가에 싼 자는 그래도 한 가닥 양심이 있으니 가르치면 되겠지만, 아예 길 가운데서 싸는 자는 그것조차도 없는 자이니, 어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육삼은 이를테면 길 가운데 똥 싸는 자로 보면 될 것이다. 아예 배우려는 마음이 전혀 없는 싹수가 노란 자.
六四 困蒙 吝(육사 곤몽 인)
육사는 곤궁한 몽이니 인색하도다
육사는 다른 효와의 관계를 잘 살펴봐야 한다. 앞서 살펴봤던 육사와 응하는 효는 바로 초효다. 하지만 초효도 음효이고 육사도 음효인 까닭에 서로 응하지 못한다. 거기다 스승이 되어줄 구이나, 상구와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곤궁한 것으로 보았다. 쉽게 말하면 스승 없이 독학하거나 어려운 환경의 고학자를 표현한 것이다. 『임꺽정』에서는 주팔이가 묘향산에서 스승을 만나기 전 바로 육사의 상태였다. 아마 백정의 신분으로 스승도 없이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던 때에 주팔이가 주역점을 봤다면 산수몽 육사효가 나오지 않았을까.
六五 童蒙 吉 (육오 동몽 길)
육오는 어린 몽이니, 길하니라.
괘에서 오효는 원래 왕의 자리면서 괘의 주인공이 된다. 하지만 육오는 음인 까닭에 강건한 구이의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이를테면 국사(나라의 스승)에게 배우는 왕세자라고나 할까? 하지만 어디 높은 신분으로써 아랫사람에게 배우는 게 쉬운 일일까. 쉽게 오만해져서 스승을 의심할 수 있다. 산수몽 괘사가 경계하는 말을 잘 새겨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육오효는 아직 어린 몽(동몽)으로 구이 스승에게 잘 배우면서(포몽) 인군의 자질을 키워나가야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
上九 擊蒙 不利爲寇 利禦寇 (상구 격몽 불리위구 이어구)
상구는 몽을 침이니, 도적이 됨이 이롭지 아니하고 도적을 막음이 이로우니라.
상구는 강한 양이 가장 윗자리에 있다. 상구는 산수몽괘가 끝나는 경계로 밖으로는 도적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방비하고 안으로는 유약한 음들이 도적들에 물들지 않게 지킨다. 구이가 음들을 가르치는데 집중하는 담임선생님이라면, 상구는 음들이 외부에 유혹에 물들지 않도록 생활을 감독하고 지도하는 학년주임 선생님으로 보면 된다.
자, 이제 6효까지 모두 살펴보았다. 인간은 무지몽매하게 태어나므로 누구나 배움이 필요하다. 주팔이는 배움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예로 볼 수 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배우기 위해 스승을 찾고, 스승과 인연을 맺자 절대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믿고 배우는데 전력을 다한다. 산수몽괘는 말한다. 우리가 배우고자 할 때 의심이 생기기도 하고 독학을 하는 외로운 과정도 있을 거라고. 하지만 배움의 뜻을 품기만 하면 주팔이처럼 스승을 만나게 되고 그 배움을 통해 무럭무럭 자라게 될 거라고. 그래서인지 조선 시대 교육을 위한 책 제목에 몽자가 많이 붙는다. 예컨대 『격몽요결』,『동몽선습』 같이. 그것은 몽괘가 무지몽매한 인간을 깨우치는 교육의 괘이기 때문이다. 다음 시간에는 ‘음식을 기다려라!’ 수천수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임경아(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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