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동하는 생명의 꿈틀거림 - 수뢰둔괘
재미있는 옛날이야기 하나. 옛날 인도에 만물의 생장과 번식을 주관하던 대지의 여신이 히란약샤(Hiraṇyākṣa)라는 물의 악마에 의해서 깊은 심해로 납치를 당했다. 히란약샤는 대지의 여신을 칠흑같이 어둡고 깊은 바닷물 속에 봉인했다. 그러자 대지의 여신이 품고 있던 생명의 씨앗들은 차가운 바닷물에 의해 하나 둘 사라져갔다. 히란약샤의 악행을 보다 못한 힌두의 신 비슈누는 바라하(Varaha : 산스크리스트어로 멧돼지라는 뜻)로 변신해서 히란약사와 천 년 동안을 싸웠다. 결국 비슈누는 히란약샤를 죽이고 어금니로 대지를 들어서 제자리로 올려놓았다. 그 덕분에 대지에는 다시 생명들이 약동하기 시작했다.
지난 시간 주역서당에서는 건괘와 곤괘에 대해 살펴보았다. 『주역』에서 건괘와 곤괘의 위치는 다른 괘들과 사뭇 다르다. 64괘를 하나의 가족이라고 본다면 건괘는 아버지, 곤괘는 어머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서괘전」에 “천지가 있은 뒤에 만물이 생겨나니, 천지 사이에 가득한 것이 오직 만물이다. 그러므로 건곤괘 다음에 만물이 시생하여 가득 찬 둔괘를 놓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음양이 갖추어진 덕분에 강건한 건괘 아버지와 후덕한 곤괘 어머니 사이에서 만물이 생겨났던 것이다. 하지만 천지가 교합한 뒤에도 생명의 탄생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64괘의 3번째 수뢰둔水雷屯(혹은 수뢰준)괘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꿈틀 꿈틀 생명이 약동하는 수뢰둔괘!
수뢰둔의 모양을 한번 살펴보자. 외괘는 물을 뜻하는 감괘(☵), 내괘는 우레를 뜻하는 진괘(☳)로 구성되어 있다. 『주역』에서 물은 ‘험난함’, 우레는 ‘움직임’이라는 뜻이 있다. 즉, 수뢰둔은 물속에 우레가 들어있는 상으로 험한 것에 가로막혀서 움직여 나오는데 큰 어려움을 겪는 형상이다. 위의 인도신화가 그 내용을 잘 담고 있다. 험난하지만 생명의 원천인 물의 악마와 우레와 같은 비슈누가 1000년 동안이나 다툰 후에야 멧돼지의 어금니(건괘, 남근)로 대지의 여신(곤괘, 땅)에게 생명을 불어 넣었으니 말이다.
수뢰둔(屯)자를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 파자를 해보자. 둔이라는 글자는 새싹(艹)이 꽁꽁 언 땅을(丿) 뚫고 나오느라 휘어져(乙)있는 모습을 상형화한 것이다. 겨우내 꽁꽁 얼어터진 땅을 뚫고 나오는 식물이나 안간힘을 다해 좁은 산도를 통과해야하는 생명 탄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탄생의 순간은 환희인 동시에 고통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진퇴양난, 힘이 들지만 곧 싹을 틔울 맹아를 품고 있기 때문에 매우 희망적인 괘이다.
수뢰둔 괘사
屯 元亨 利貞 勿用有攸往 利建候 : 둔 원형이정 물용유유왕 이건후
둔은 크게 형통하고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 써 가는 바를 두지 말고 제후를 세움이 이로우니라.
오천년 전, 유리옥에 갇혀 있던 문왕이 수뢰둔을 보고 지은 괘사(단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마치 사자성어처럼 이미 익숙한 글자를 발견한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바로 원형이정(元亨利貞)! 바로 건괘 괘사에 나왔었다. 하지만 수뢰둔에서 원형이정은 다르게 해석된다. 먼저 수뢰둔은 만물을 화생하는 괘이니 크게 형통(元亨)하다. 하지만 이제 막 태어나서 걸음마를 시작하는 새끼 얼룩말이 어미 곁을 떠나면 안 되는 것처럼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利貞) 그리고 둔괘의 ‘슬로건(slogan)이라고 할 수 있는 '쉽사리 움직이지 마라(勿用有攸往)'라는 경고를 잊으서는 안 된다. 『주역』에서는 왕이 직접 나서지 말고 능력 있는 제후를 세우라고 말한다.(利建候) 실생활에 적용해 보자면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주역점에서 수뢰둔괘가 나오면 좀 더 철저하게 준비를 하는 게 좋다. 아직 뭔가를 실행하기에는 때가 아니라는 하늘의 메시지로 읽어야 한다. 아니면 뭔가를 실행할 때 지금은 힘이 들더라도 곧 희망이 올 것임을 시사하는 괘이기도 하다.
수뢰둔 효사
初九 磐桓 利居貞 利建侯 (초구 반환 이거정 이건후)
초구는 반환함이니(빙빙 제자리에서 맴도니), 바른 데에 거처함이 이로우며 제후를 세움이 이로우니라.
수뢰둔 괘의 첫 번째 작대기! 첫 번째 효사다. 가장 먼저 반환이라고 하는 생소한 단어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반환은 수로둔괘의 슬로건, 바로 머뭇거리는 것을 말한다. 초구는 내괘인 진괘에서 양효(陽爻)인 탓에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하지만 괘의 맨 밑에 있고 위로는 감괘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맴도는 격이다.(반환) 이처럼 일이 마음대로 안 되는 시기에 초구는 바른 뜻을 굳건히 지키면서 제후(Leader)노릇, 즉 내실을 기하는 것이 이롭다고 말한다.
六二 屯如邅如 乘馬班如 匪寇 婚媾 女子 貞 不字, 十年 乃字
(육이 둔여전여 승마반여 비구 혼구 여자 정 불자 십년 내자)
육이는 걷기 어려우며 말을 탔다가 내리니, 도적이 아니면 청혼해오리니, 여자가 곧아서 시집가지 않다가 십년 만에 시집가도다.
육이의 효사는 한눈에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암호문처럼 보인다. 하지만 찬찬이 해석해보면 못 풀 것도 없다. 육이의 둔여전여도 수뢰둔의 일원임을 증명하듯이 머뭇거리는 모양새를 나타낸다. 그런데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머무르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말을 탔다가 내린다니. 엥? 갑자기 무슨 말? 『주역』에서는 음효가 양효 곁에 있을 경우 말을 탔다고 말한다. 즉, 육이 음이 초구를 올라탄 것이다. 오 이제 좀 뭔가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이어서 육이의 애달픈(?) 사연이 들려온다. 6개의 효들은 각자의 짝이 있고 짝끼리는 응(應)하게 된다. 1-4, 2-5, 3-6가 서로 응한다. 그렇다면 육이효의 짝은 구오효에 해당한다. 하지만 보다시피 육이와 구오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게다가 육이 바로 밑에는 훌륭한 초구가 있으니 구이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음과 양이 좋아하는 게 어찌 잘못된 일이겠는가 다만 응(應)하는 관계가 아니라서 안타까울 뿐. 육이는 잠깐 초구에 한 눈 팔지만 자신의 짝이 아님을 알고 곧 말에서 내려와 제 짝인 구오를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10년을 기다려서 구오에게 시집가는 것이다. 만약에 초구와 짝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덧붙여 결혼을 앞두고 주역점을 쳤는데 수뢰둔괘에 육이효가 나왔다면 지금은 결혼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좀 더 기다려야 자신과 맞는 인연을 만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어야 한다. 인연을 만나는 것도 다 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六三 卽鹿无虞 惟入于林中 君子 幾 不如舍 往 吝 (육삼 즉록무우 유입우임중 군자 기 불여사 왕 인)
육삼은 사냥을 하지만 몰이꾼이 없음이라. 숲으로 들어갈 때 군자라면 그칠 것이니, 가면 인색하리라.
육삼도 난해하기는 육이 못지않다. 육삼은 사냥을 나갔는데 길잡이(몰이꾼)도 없이 홀로 숲을 헤매는 형국이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고립무원!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상태! 육삼이 처한 현실이다. 이때는 숲을 빠져나와서 사람들이 있는 인가로 가는 게 상책이다. 괜히 사냥욕심을 내다가는 숲 한 가운데서 미아가 되기 십상이니 말이다. 주역에서 '그칠 때를 알고 가면 인색하다'라는 말은 욕심은 내려놓고 지금은 하던 것을 멈추라는 말이다.
六四 乘馬班如 求婚媾 往 吉 无不利 (육사 승마반여 구혼구 왕 길 무불리)
육사가 말을 탔다가 내리니, 청혼을 구하면 길해서 이롭지 않음이 없으리라.
육사도 육이와 마찬가지로 승마반여! 말을 탔다가 내렸다. 육사는 음효이고 구오는 양이므로 음이 양과 만나는 것을 말을 타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육사는 구오를 보고 반해서 말을 탔지만 조금 전에 봤듯 구오의 짝은 육이였다. 그러니 육사는 빨리 구오가 자신의 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말에서 내려야 한다. 가까이 있다고해서 짝이 되는 건 아니다. 육사의 짝은 멀리에 있는 초구이므로 초구와 인연을 맺으면 길하다고 주역은 말한다.
九五 屯其膏 小貞 吉 大貞 凶 (구오 둔기고 소정 길 대정 흉)
구오는 고택(기름진 은택)이 어려우니, 조금 바르게 나가면 길하고 크게 고집하면 흉하리라.
『주역』에서 구오는 제왕의 자리이다. 하지만 수뢰둔은 처음 만물이 화생하는 때이므로 효의 시작인 초구의 힘이 가장 강하다. 하여 구오 제왕은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기가 아닌 것이다. 기름진 은택이란 왕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인데 그런 마음보다는 우선 백성을 위한 내실을 쌓는 것으로 소박한 정치를 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上六 乘馬班如 泣血漣如.(상육 승마반여 읍혈연여)
상육은 말을 탔다가 내려서 피눈물이 흐르도다.
대게 64괘에서 상효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수뢰둔의 상육은 피눈물을 철철 흘린다. 상육은 아래에 구오 말을 탔지만 짝이 아니기 때문에 내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짝인 육삼과도 짝을 이루지 못했다. 1-4, 2-5, 3-6 이라고 해서 무조건 짝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음과 양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긴다. 음양이 맞아야 짝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육삼과 상육은 보다시피 육+육, 즉 음의 결합이니 짝을 할 수가 없다. 또한 괘의 효는 초효부터 상효까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데 그렇다면 상육은 가장 나중에 드러난 효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상육은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짝이 없는 탓에 피 철철 눈물 철철 흘리고 있는 것이다.
다음 주에 만나요~~
지금까지 수뢰둔괘를 살펴보았다. 『주역』은 유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괘사가 만들어졌고 효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괘·효에 맞는 해석도 덧붙여졌다. 그 가운데 우리는 아버지 건과 어머니 곤이 처음으로 낳은 둔을 만나보았다. 정리를 한 번 해보자. 수뢰둔 괘는 단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만물이 처음 시작할 때의 어려움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생명을 창조하기 위한 역동적인 꿈틀거림. 무엇이든 시작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어려움은 밖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왕이 직접 통치하지 않고 제후를 내세워 내공을 쌓듯이, 우리도 힘든 과정과 어려움을 토대로 성장해야 함을 잊지 말자. 앞으로도 64괘의 흥미진진한 드라마는 계속 펼쳐질 것이다. 다음 시간 산수몽도 기대하시라.
김정안(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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