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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딱딱한 지식을 말랑말랑하게 바꾸고 싶다면

by 북드라망 2013. 10. 9.

#1 나-동-철: 존 듀이-경험-원신


딱딱한 지식들을 쥐어 패자!


늘 만원인 출근길 지하철. 항상 사람들은 문 앞을 꽉 매우고 있다. 그야말로 문전성시다. 좀 안쪽으로 들어가면 좋으련만 꿈적도 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 얼굴에 대고 이렇게 외치고 싶다. “좀 안쪽으로 들어가쇼. 안쪽도 문쪽이랑 똑같은 방향으로 간다구요!” 눈을 좀 치켜뜨자, 맨 앞에 있는 아가씨가 엉덩이를 살짝 비튼다. 그 틈을 놓칠세라 꿋꿋하게 문전성시를 뚫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C급 철학자에게 지하철 출근길은 아주 귀한 시간이다. 평소라면 철학책을 꺼내 1시간 정도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좀 다르다. 주말 회사시험을 위해서 초치기가 필요한 상황. 이 빌어먹을 놈의 밥벌이는 C급 철학자에게 초치기를 강요한다. 교재를 꺼내 목차를 훑고 1장에 들어갔는데....흠. 오늘도 새삼 이런 책들이 지닌 역량에 놀라워하고 책을 덮는다. 이런 책만 보면 금세 눈이 침침해지고, 심하면 어지럽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이유는 딱 두 가지 중 하나다. 나를 어지럽게 하는 책이 문제거나 책을 어지럽게 하는 내가 문제이거나. 나는 매년 임금 협상할 때 이걸 꼭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해당 업무에 전혀 경력이 없거나, 나같이 지력이 떨어지는 자들의 임금인상률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아야 한다. 경력이 없거나 지력이 좀 떨어지면 회사가 필요로 하는 지식을 알려고 그만큼 더 수고해야 하지 않는가. 고로 두통을 감수하며 회사에 유용한 지식을 습득해야하는 이 노력을 회사는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 나에게 두통을 넘겨주고, 유용성만 쏙 빼가는 것은 아무리 봐도 신성한 교환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보상하라! 보상하라!


어지럽게 하는 책이 문제인건가, 책을 어지럽게 하는 내가 문제인건가!


맨 위가 바로 원신이 머무르는 '하늘 골짜기' 부분이다.

그런데 이런 책만 보면 왜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아픈가. 사유의 한의학적인 이름은 원신(元神)이다. 이 원신이 깃든 머리를 일컬어 천곡이라 부른다. 즉 ‘하늘 골짜기’다. 이 골짜기에는 아홉 개 궁이 있는데, 그 중 혼백이 드나드는 ‘니환궁’에 원신이 머문다. 사유(=원신)는 바로 이 골짜기, 이 궁에서 지낸다. 사유는 지식들과 만나서 자양분을 얻는다. 지식들은 눈으로 들어와 목계(目係, 눈과 뇌를 연결시키는 맥락)를 타 이 골짜기로 들어온다. 지식들은 사유와 만나 환대를 받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으르렁거리며 싸운다. 특히 완고하고 딱딱한 지식들은 무턱대고 들어와서 자기주장만 해대며 골짜기를 점령하려 든다. 원신이 약하면 딱딱한 지식들이 사유인 것처럼 행세하기도 한다. 그게 통념이 된다. 지식이 골짜기를 점령하고 사유가 흔들리는 것이다. 그 순간 지식은 사기(邪氣, 나쁜 기운)가 되고 만다.
 

이상하게도 시험 볼 지식들은 언제나 딱딱하고 관조적이다. 업무 지식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시험을 봐야한다는 조건에서 보면 모든 지식이 고정되고 딱딱해진다. 그런 조건에서는 모든 지식은 얼어붙는다. 내 의지가 능동적으로 조작할 수 없는 것으로 변하는 것이다. 사유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게 된다. 설사 철학지식이어도 마찬가지다. 철학지식을 시험보기 위해 공부하면 그 순간 그것은 딱딱해진다. 사기로 변하는 것이다. 꼭 시험이 아니어도 좋다. 만일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암기하고 있다면 역시 똑같아 진다. 딱딱하고, 고정되고, 완강하고, 힘만 센 ‘무식한 지식’. 이놈들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이것들을 말랑말랑하게 바꿔서 빵처럼 먹었으면 좋겠는데 어찌하면 되겠는가.
 

존 듀이(John Dewey 1859~ 1952)는 이 문제를 두고 사고했던 사람이다. 듀이에게 지식은 사물을 능동적으로 조작하여 그것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변화시키는 도구이다. 그것은 관조적이고 딱딱한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 듀이는 ‘경험’을 다시 사유했다. 사실 전통적인 이성주의자들은 경험을 수동적이고 파편적인 것으로만 보았다. 이성주의자들이 보기에 딸기는 딸기라는 단일체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빨간 색깔, 달콤한 맛, 거친 촉감 등등으로 무수히 찢어진 채 경험된다. 경험의 층위에서는 딸기가 딸기가 아닌 셈. 그래서 칸트는 이 경험들을 종합하는 장치가 별도로 필요하다고 보고, 그 역할을 하는 것을 오성이라고 했다. 오성이 경험들을 종합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로서의 지식(‘바로 그 딸기!’)이 생성될 수 있다. 여기서 경험은 재료일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이미 선험적으로 정해진 카테고리로만 지식이 구성된다. 변화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듀이는 이를 뒤집는다. 듀이에게 경험이란 어느 순간에 일어나는 감각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유기체가 환경 속에서 행동의 결과를 견디어내고 변화를 겪는 과정이다. 즉, 환경과 유기체의 상호작용이 바로 경험이다. 그렇다면 경험 자체 안에 언제나 이미 원리가 갖추어져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빨간 색깔, 달콤한 맛, 거친 촉감 등등은 경험 작용 안에서 직접 지식으로 조직화되는 것이지, 선험적인 것에 의해서 묶여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별도의 이성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경험이 바뀌면 상호작용의 원리도 바뀌며, 따라서 지식은 바뀐다. 이런 관점이라면 지식은 이성이 아니라, 바로 경험으로부터 직접 생성된다는 말이 된다. 심지어 듀이는 수학조차 경험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내 경험이 바뀌면 그 고귀하다는 수학도 바뀐다. 매번 뒤바꿀 수 있는 지식. 듀이가 생각하는 지식은 그런 지식이다.


제가 할께요, 느낌 아니까~

 

이 세상 모든 지식을 말랑말랑하게 하기. C급 철학자가 꿈꾸는 지식이다. 저 놈의 완강한 지식들과 우리는 얼마나 갈등해왔는가. 학생 때도 회사원이 된 지금도 이 지식들과 전쟁중이다. 저 놈의 지식 때문에 두통을 앓지는 말아야겠다. 어쩐지 이 지식들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던 것 같다. 존 듀이는 말한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대처해야 할 문제, 극복해야 할 어려움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 사유하지 않는다.”(존 듀이, <철학의 재구성> 이유선 옮김, 아카넷, 2010년 173쪽)고 말이다. 사유하지 않으면 완고한 지식이 마음대로 휘젓고 다닌다. 또 이어서 이런 말도 한다. “사고가 절대적이고 긴급한 출구일 때, 사고가 해결로 가는 확실한 길일 때에만 난점은 사고를 낳는다”(같은 책, 173쪽) 막다른 골목, 뭐라도 해야만 할 때 비로소 사유는 작동한다.
 

나도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 눈으로 거짓부렁 광선이라도 뿌려 봐야겠다. C급 철학자는 그 정도 박력은 있어야 하지 않냐? 안되면 뻥이라도 쳐야 한다. 에잇, 에잇! 광선~ 능동적으로 조작하는 지식이라지 않나. 또 뇌는 골수의 바다[髓海]라고 했다(<동의보감> 570p). 골수는 뼛속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뇌는 뼈의 힘으로 살고 있는 셈 아닌가. 뼈를 좀 움직이자. 골수를 뽑아내서, 니환궁으로 공수하자. 눈으로 광선을 뿌려 저 놈의 딱딱한 지식을 흐믈흐믈하게 만들고, 온몸에 퍼져 있는 뼈로 골수 무기를 만들어, 저 놈의 무식한 지식을 쥐어 패야겠다. 그러고 보니, 사유는 눈으로 쏘고, 뼈로 싸우는 거구나. 에잇, 에잇!



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C급 철학자의 광선,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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