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없애는 힘, 진솔함
김 지 영(남산강학원)
흉기 난동 현장에 내가 있었다면?
인터넷 뉴스에 들어가면 연일 ‘흉기 난동’에 대한 기사들이 상위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 사건들을 접하면서 떠올려 봤다. 내가 그 현장에 놓인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우선 그 사람의 시선을 내 쪽으로 돌린다. “선생님!! 여기 보세요! 진정하세요!!”라고 소리치며 주의를 끈다. 이제 그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럼 그의 다리를 냉큼 붙잡는다. 그리고 그 순간 칼에 찔리더라도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피해자가 더 나오지 않도록 시간이라도 끌고 싶다. 이런 죽음 또한 복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순간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으니까.
잠깐! 한데 이것은 모두 상상이다(!). 오직 내 머릿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누군가 “너 진짜 그렇게 할 수 있을 거 같아?”라고 의심의 눈초리로 묻는다면, 선뜻 자신 있게 “응!”이라고 대답할 수 없다. 난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다! 칼에 살짝 베이는 것조차 싫은데, 칼에 다가가서 찔리겠다고? 말도 안 된다. 사실 난 신체가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몹시 두려워한다. 그래서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이 있음에도 그것이 육체적 고통과 연결된다면 실행하지 못할 거 같다. 이 간극은 왜 생겨난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이 간극을 줄일 수 있을까.
오직 마음만을 다스려라
공부를 하며 내 삶의 방향을 잡아갈수록 육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에 발맞춰 주지 않아 어딘가 찝찝했다. ‘인간이 아픔을 두려워하는 것은 생명체로서 당연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봤다. 작은 위안은 됐지만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이때 만난 간디는 참으로 두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그는 고통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아주 친한 친구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수동적 저항자는 대포에 맞아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도 양심에 반대되는 법에는 복종하지 않을 거라고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느 쪽이 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대포 뒤에 서서 다른 사람들을 산산조각 내는 쪽입니까? 아니면, 웃는 얼굴로 대포에 다가가서 스스로 산산조각 나는 쪽입니까? 항상 죽음을 아주 친한 친구로 생각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의 죽음을 좌지우지 하는 사람 중에서 누가 진정한 전사입니까?”
– 『힌두 스와라지』, 지식을 만드는 지식,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지음, 김선근 옮김, 114쪽
간디가 이처럼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힘의 원천이 무엇일까. 간디는 바로 그다음 문장에서 친절히 답을 알려준다. “오직 마음을 다스리는 것만이 필요”하다고. 간디는 어떻게 마음 훈련을 한 것일까. 나 역시 나만의 방식으로(^^) 죽는 상상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려 봤다. 그러나 고통을 생각할수록 두려움은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만 갔다. 죽는 상상은 오히려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만 재생산했다. 지금의 내 상태를 보니 이런 상상은 마음 훈련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진솔함으로 두려움 마주하기
공부를 하다보니 죽음에 대해 잠깐씩 사유할 때가 있었다.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런 삶을 생각만 하다가 “타인을 위해 죽는 건 용기 있어!”라는 신념만 거대해져 갔다. 우습지만 상상만 하면서도 ‘남을 위해 죽을 줄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자아를 거대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마치 머리로만 공부하고 아무것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있는 거 같아 무서웠다. 머릿속에서는 세상 성인군자지만, 현실에선 고통이 두려워 양심도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나였다. 이 간극을 줄이기 위해 간디가 절실했다.
간디는 어떻게 마음 훈련을 했을까. 마음에게 ‘두려움아, 제발 좀 없어져라!’라고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할수록 내가 그랬던 것처럼 두려움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실체화되기만 한다. 두려움은 내가 만들어 내고 있었다. 결국 두려움도 망상이었다.
간디가 어떠한 두려움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진솔함’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진솔함이란 자기 자신부터 속이지 않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결백함으로써 간디는 떳떳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런 것까지 밝힐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욕망에 휘둘려 살았던 과거를 공개적으로 말한다. 인간이라면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성적 욕망까지도 말이다. 간디는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사람이었다. 그 욕망은 자신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명예를 위해 숨기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인간이라면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성적 욕망을 낱낱이 밝혔으니 다른 영역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나에게 이렇게 진솔하게 말했다. ‘나는 여전히 겁이 너무 많다. 칼도, 대포도 무섭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감당할 수조차 없다’고. ‘그러니 차근차근 하자’고. 두려움을 억누르지 않고 그저 그것을 바라봤다. 이렇게 스스로를 마주해 보니 나의 깜냥을 잘 알게 됐다. 이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더 이상 나서지 않게 만들었다.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괴롭지 않았다. 정화스님께서 보시를 얼마나 해야 하냐고 묻는 질문에 본인이 아깝지 않을 만큼만 하라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다. 보시하고 아까운 마음이 들면 그것이 다시 번뇌를 만들기 때문이다. 동일한 이치로 나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남을 도우면 된다. 그렇게 차근차근 마음을 넓히다 보면 두려움의 크기가 줄어들지 않을까.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싶었던 마음속에 나의 어떤 욕망이 있었을까.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그런 사람들을 봤을 때 드는 존경심을 나 역시 타인에게 받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타인을 위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를 위한 행동이었다. 어렵고 힘들지만 지금처럼 나는 나를 계속 대면하여 진실하게 말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 부끄러운 욕망의 독과 위력도 사라지지 않을까. 간디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일상에서 마음 훈련 하기
나는 일상에서도 두려운 것들이 많다. 뱀도 무섭고, 주사도 무섭고, 날아오는 탁구공도 무섭다. 그러니 타인을 위해 죽는 것은 정말 아득하기만 하다^^. 그렇지만 두려움에 솔직해지면서 내가 그것을 아직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럼 지금 내 수준은 무엇인가. 주먹보다 작디작은 탁구공조차 무서워하는 것이 딱 내 수준이다. 그럼 지금 나를 두렵게 하는 이 탁구공부터 넘어가 보자. 많이 허접하다고?^^ 허접해도 어쩔 것인가! 나는 아직 이 정도로 하찮은 수준이다. 날아오는 탁구공을 절대 피하지 않는 것!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아마 이번 생에서 누군가를 위해 죽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살고자 남을 해치는 짓은 하지 말자며 마음에 힘을 키우고 있다. 이것만큼은 내 수준에서도 지킬 수 있다. 내 욕망이 붙어있지 않고, 무섭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다. 아, 비로소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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