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진실 세미나에서의 청년들과 간디의 만남
브라마차리아, 탁월한 자유의 길
박 소 연(남산강학원)
여기에 자유가 있다!
어떻게 이리도 자유로워 보일 수 있지? 『간디 자서전』을 두 번째로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그 힘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했고, 절제하는 삶을 살았고, 나중에는 브라마차리아 선언까지 한 간디와 ‘자유로움’이란 말이 처음에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유 하면 조르바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간디는 마치 인생 전체를 고행자처럼 살다가 간 사람 같달까. 하지만 희한하게도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남은 단어 하나가 ‘자유로움’이었다.
간디의 삶 전체를 꿰뚫고 있는 건 ‘자기 정화’, 욕망의 내버림이다. 일상에서의 자기 정화는 자기의 환경 정화, 곧 정치로까지 이어진다. 간디에게서 자유를 떠올리는 게 내게는 왜 희한하게 느껴졌을까? 자유롭다면 그 자체로 즐거워야 할 텐데 나에게 있어 욕망의 제어는 ‘고(苦)’였기 때문이다. 내 부모님은 30대 초중반의 나이에 스승의 곁에서 한바탕 제대로 수행해 보겠노라는 일념으로 세 살이었던 나를 데리고 절에 들어가셨다. 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붓다의 가르침은 내 삶의 이정표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의 짐이 되기도 했다. 욕망을 다스리는 건 늘 어려웠고, 나는 대부분 실패했기에 그랬다.
몇 년 전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는 척 방에 틀어박혀 <나의 아저씨>를 정주행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내 마음은 일단 거짓말로 인해 불편했고, 이걸 끊어 내지 못하고 계속 보고 앉아있는 내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이때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계율은 나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다. 식욕과 수면욕, 성욕 등도 마찬가지다. 때 아닌 때에 먹지 말라, 삼경(23시~1시) 이외에는 잠자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 재물과 색(여색, 남색)의 재앙은 독사보다 심하니 반드시 멀리 여의라는 이런 말씀들은 나를 부자유스럽게 하는 것만 같았다. 밤에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픈 욕망, 한 10시간 늘어져 자고 싶은 욕망, 연애하고픈 욕망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계율을 지킨 것도 아니었다. 할 거 다 하면서 죄책감만 느끼는 아주 요상스러운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내게 금욕은 족쇄처럼 느껴질 수밖에.
하지만 간디는 다르다. 그의 진리 실험 중에 유명한 것이 ‘브라마차리아’인데 이는 범행(梵行), 즉 ‘맑고 깨끗한 행실’이란 뜻이다. 브라마차리아란 좁게는 성행위를 금하는 것을 뜻하지만 넓게는 몸과 말과 생각을 다스리는, 그것들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을 뜻하는 큰 개념이다. 한마디로 전방위적인 금욕을 실천하라는 말이다. 간디를 자유인으로 만든 건 바로 이것이었다. 매일의 범행이 모여 “오 라마!”를 외쳤던 거룩한 마지막에까지 이르렀다. 간디가 내게 말해주고 있었다. “브라마차리아, 바로 여기에 자유가 있다!” 브라마차리아를 맹세한 뒤 그가 맛본 자유, 그 환희로움은 어떤 것이었을까?
자유의 문고리를 잡다
간디의 어린 시절, 당시 인도에는 조혼 관습이 있었다. 이에 간디도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약혼자 카스투르바이와 결혼하게 된다. 간디는 성욕이 많은 편이었다. “나는 그를 열렬히 사랑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도 나는 그를 생각했고 밤이 오면 우리는 또다시 만난다는 생각이 항상 내게 붙어 있었다. 떨어져 있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간디 자서전』, 함석헌 옮김, 한길사, 70쪽) 한마디로 자나 깨나, 어디에 있든지 아내 생각뿐이었단 것.
그렇게 3년이 지나고 간디가 16세 되던 해, 간디의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이 사건을 간디 인생의 큰 변곡점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간디는 한마디로 효자였다. 아버지가 병상에 계시는 동안 소년은 매일 정성스럽게 아버지를 간호했다. 밤마다 다리를 주물러 드리는 게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심지어는 저녁에 잠깐 산책을 다녀올 때도 아버지의 평안함을 확인한 다음에야 나가곤 했다. 이때 간디의 나이가 16세였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특별하기도 했고, 본디 성품이 솔직하고 남 속일 줄 몰랐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나이에 쉽게 쓸 수 있는 마음은 아니다. 진실함은 간디가 가진 큰 힘 중 하나였다.
하지만 매일 밤이 문제였다. 저녁마다 아내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져 얼른 안마를 마치고 침실로 가고 싶었다고 간디는 고백한다. 아버지의 상태는 점점 위독해졌다. 문제의 그날 밤, 간디는 늦은 시간까지 아버지를 간호하고 있었다. 얼마 뒤에 삼촌이 오셨고, 이제 가서 쉬라는 말씀에 간디는 한달음에 침실로 달려간다. 그리고 자고 있던 아내를 깨웠다. 그 시기 카스투르바이는 임신 중이었다. 하지만 욕망은 이성보다 힘이 셌다.
그러나 몇 분 뒤 하인이 찾아왔고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나는 다만 두 손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간디의 심정이 가슴 아리게 느껴지는 말이다. 본래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더라도 부모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자식에게는 짙은 후회가 남는 법이다. 그런데 아내와 자고 싶은 마음에 위독한 아버지를 뒤로하고 나왔다. 게다가 아이마저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숨졌다. 이 사건은 간디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어릴 때부터 생각이 많고 깊은 사람이었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더욱 절실하게 자신의 욕망을 관찰하고 사유하게 되지 않았을까.
간디는 이를 절대 잊지 않았다. 나아가 계속해서 자신의 욕망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간디는 자신의 어렸던 나이를 대며 합리화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동안 아버지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았느냐며 스스로 위안 삼지도 않았다. 또 그가 ‘수치’라고 표현했듯 참 후회스럽고 부끄러웠을 텐데도 이 사건으로 피폐해지지 않았다. 다만 살아가면서 늘 마음 한켠에 담아두었을 뿐이다.
진짜 참회란 이런 것 아닐까. 죄책감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브라마차리아를 통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끝없는 되새김과 실천만이 필요할 뿐이다. 쓸데없는 데에 힘을 낭비하는 대신 다만 절대 잊지 않아 끝내는 그 욕망으로부터 걸림 없는 자유를 얻는 것! 이것이 진정한 참회이자 애도일 것이다.
“선한 것은 달팽이처럼 나아가는 것”이라는 간디의 말처럼 그는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간디는 이후 18세의 나이로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 생활 3년 동안 여러 종교를 접하고, 채식 실험을 하고, 생활을 간소화하며 욕망은 한층 옅어졌다. 20대에 남아프리카로 가서는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37세에 브라마차리아 맹세를 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은 간디에게 자유의 문고리를 잡은 것과 같았다.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뼈아픈 슬픔을 경험한 간디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며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성욕이 강해 그것을 끊어 내는 게 힘들었기에 도리어 쉬운 측면도 있었다. 욕망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독이 되거나 우유가 되거나 하는 것 같다. 욕망이 강하게 발동하면 할수록 자각하기 쉽다. 내가 욕망에 끌려다니고 있다는 자각은 유쾌하지 않다. 이 불편함이 변화의 씨앗을 틔운다. 강한 욕망이 오히려 내 손을 자유의 문고리 위에 올려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속도가 달팽이와 같다는 걸 인정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여기 죄책감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다만 나아갈 뿐이다. 그것이 선(善)이다!
맹세의 참맛
간디의 실천은 언제나 맹세와 함께 가는데, 그가 브라마차리아를 맹세하며 한 말이 인상 깊다. “맹세는 자유의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열어 주는 것임을 깨달았다.”(같은 책, 294쪽) 그런데 무엇을 하겠다, 하지 않겠다 맹세하면 나는 그만큼의 자유를 잃는 게 아닌가? 간디는 맹세하기를 즐긴다. 그러다 보니 지켜야 할 맹세가 한두 개가 아니다. 그러면 뭐 하나 할 때마다 이 맹세에 걸리고, 저 맹세에 걸리고 해서 부자유스럽지 않을까? 어떤 이유에서 간디는 맹세가 자유의 문을 열어 준다고 이야기한 것일까.
영국 유학 시절, 간디는 음식 실험을 하기 시작한다. 채식주의를 접하고 음식을 점차 간소화해 가는데, 나중에는 양념하나 하지 않고 익힌 시금치가 맛있어지는 경지에까지 이른다. 그는 말한다. “여러 가지 실험 결과 참맛은 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같은 책, 121쪽) 이 구절을 읽고 너무 놀라웠다. 간디가 스물도 채 되지 않았을 때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을 얻다니! 그럴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맹세에 있었다. 간디는 유학을 떠나기 전 어머니 앞에서 세 가지 맹세를 한다. 술과 고기,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마음속에 묵직하게 자리한 어머니와의 맹세는 점차로 맛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했다. 맹세가 맛을 제압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간디는 “맹세를 엄격히 지키면 뛰어나게 더 위생적이고, 더 맛있고, 더 깊은 맛이 생긴다”(같은 책, 123쪽)라고 말한다.
진심 어린 맹세는 금욕을 지속하게 하는 연료가 되고, 지속의 기간이 늘어나면 비로소 자유를 맛보게 된다. 이러한 음식 실험은 단식으로까지 이어져 간디는 단식을 사람들의 갈등을 해소하는 정치적 도구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간디는 얕은 물에서 놀지 않았던 거다. 늘 심연에까지 들어갔다. 한번 하면 끝을 봤다. 식욕의 제어가 맹세의 맛, 존재의 힘으로 이어질 때까지.
무언가 갈망하는 것을 놓아버린 사람은 자유롭다. 맛에서 해방된 사람은 뭘 먹어도 상관없다. 맛이 있고, 없고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산해진미도, 거칠고 쓴 음식도 그에게는 한가지다. 그 말인즉슨 무얼 먹어도 참 달게, 감사한 마음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 카레에 들어간 당근은 식감이 이상해서 ‘싫다’라고 말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울 뿐이다. 이건 내가 귀로만 듣고 말로만 떠들었지, 온 마음을 다해서 붙들고 있는 어떤 맹세가 없다는 증명일 것이다.
언젠가 우리 몸의 장기들도 운행을 멈추고 완전히 이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호기롭게 3일 단식을 시작했다. 그런데 20시간이 넘어가자 너무 힘든 거다. 그 20시간도 장기는 쉬었을지 몰라도 마음은 쉬지 못했다. 옆에서 누가 뭘 먹고 있으면 마음이 온통 그 음식에 쏠려 있는 것이었다. 참나, 고작 20시간이었다. 어이가 없지만 더 우스웠던 건 그날 새벽의 일이다. 갑자기 새벽에 눈이 확 떠졌다. 속이 너무너무 쓰렸고,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냉장고 문을 열고 주섬주섬 고구마와 마실 것을 챙긴 뒤에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먹었다. 몸에 대한 관념이 이렇게 세구나, 그때 확실히 느꼈다. 드라마나 음식에 대한 욕망 하나도 떨치지 못하면서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것처럼 공허한 말이 있을까. 하여, 다시금 확신한다. 일상에서의 자기 정화, 즉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간디 가르침의 핵심이다. 어떤 특별한 비법이나 비장의 무기 같은 건 없다. 달팽이 같이 걸어간, ‘맑고 깨끗한 행실’로 채워진 날들이 모여 간디는 간디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의 최종 맹세
1893년, 스물세 살의 간디는 남아프리카로 간다. 간디는 카스트 중에서 바이샤(상인) 계급의 사람이다. 또 그는 영국 유학파 아니던가. 변호사가 되어 인도로 돌아왔으니 무시당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는 달랐다. 영국에서 만났던 백인들은 간디의 친구였지만 남아프리카의 백인들은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간디가 변호사건 바이샤 계급이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간디는 까만 피부색을 가진 쿨리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간디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수없이 당한다. 기차에서 쫓겨나고, 마차에서 폭행당하고, 멀쩡히 길을 걸어가다가 경찰관한테 발길질당하기도 한다. 자신만 생각했다면 가차 없이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청년 간디는 놀라운 결정을 내린다. 남아프리카에 남아서 투쟁하기로 한 것이다. 변호사로서 말도 안 되는 차별을 인내하며 살아가는 유색 인종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기로 마음먹는다.
브라마차리아의 출발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자신이 이 욕망 때문에 힘들다거나, 어린 시절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금욕이 아니었다. 자신의 정욕이 아내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이 가장 큰 이유였다. 정욕은 소유욕을, 소유욕은 의심과 질투를 낳았다. 생각으로는 아내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정욕이 앞을 가렸다. 간섭도 많고 의심도 많아 아내를 지치게 했다. 한때 카스투르바이는 자신의 허락 없이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고 간디는 자서전에 밝히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유학 생활로 떨어져 있던 게 관계에 도움이 됐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정욕의 제어는 청년 간디의 화두였다. 그래서 더욱 관찰을 늦추지 않았다. 이러한 관찰은 “나의 아내에 대한 성실은 내 아내를 정욕의 도구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정욕의 종인 한, 나의 성실은 아무 가치가 없다”(같은 책, 292쪽)라는 결론으로 간디를 이끈다.
또한 남아프리카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공공을 위한 봉사는 이제 간디의 삶과 결코 분리될 수 없게 되었다. 남아프리카에 남겠다 결정한 이후로 유색 인종, 다치고 병든 이들, 핍박받는 인도 민중, 불가촉천민, 이슬람교도, 나아가 전 인류에게 그는 마지막까지 온 마음을 쏟는다. 이러한 운명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레 간디는 “아기 낳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자녀 양육과 공공 봉사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같은 책, 293쪽). 봉사할 일은 수없이 많은데 가정생활에만 빠져 있으면 그걸 언제 다 감당하겠냐는 것.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브라마차리아는 실현되어야 했다.
아내를 깊이 사랑했기에 간디는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아내에 대한 집착, 강한 성욕을 자각하고 내려놓고 또다시 자각하고 제압하고….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이 마음은 크게 확장되어 단순히 한 사람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아닌 ‘우주적 섬김’으로 이어진다. ‘봉사해야 한다! 내 손길이 필요한 곳은 수없이 많다. 몸이 천 개라도 부족하다!’ 봉사에 대한 강렬한 마음은 맹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브라마차리아 맹세의 과정을 살펴보며 간디에게서 어머니의 사랑을 느꼈다. 온 존재를 자식으로 둔 어머니는 결코 방심할 수 없다. 그 마음이 큰 만큼 어깨는 무겁다. 더 세심해야 한다. 더 정밀해야 한다. 더욱 조심스러워야 한다.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겠다는 브라마차리아 선언은 간디 삶의 정해진, 당연한 수순이었다.
모든 게 달팽이의 걸음으로 이루어졌다. 영국에서 채식을 만나 식욕을 다스릴 줄 알게 된 후에 조금 편안해졌고, 남아프리카에서 투쟁과 봉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며 조금 더 자유로워졌으며, 이후 최종 맹세로 자유를 못 박았다. 이제 간디는 욕망의 종이 아닌 몸과 마음의 주인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순간마다 몸과 마음이 일치되게 하라!
브라마차리아의 핵심은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이다. 예를 들어 단식은 정욕의 제어에 도움이 되는데, 이때 “굶고 있는 몸에 마음이 협력해주어야”(『간디 자서전』, 함석헌 옮김, 한길사, 298쪽) 단식의 효력이 있다. 정갈하게 먹거나 단식해도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브라마차리아의 심연,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우리는 살면서 몸은 다스려지는데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순간마다 경험한다. 결코 몸을 다스리는 끈이 느슨해져서는 안 된다. 이에 덧붙여 우리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음을 놓아버리면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른 길로 우리를 당길 것이고, 그것은 자기 자신을 등지는 짓이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악한 생각들에 저항하기를 계속하는 동안만큼은 몸과 마음이 함께 가는 거라고 말할 수 있겠다. (『간디의 편지』, MK 간디, 이현주 옮김, 원더박스, 26쪽)
어릴 때 있었던 절에서는 사람을 만나면 “안녕하세요.”라고 하는 대신 “방심은 금물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하고, 인사받을 때마다 내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고 돌이키자는 취지다. 조금만 방심하면 마음은 천지사방으로 날뛴다. 하루를 채 못 채운 그 짧은 단식을 하면서도 보이는 음식에, 냄새에, 속쓰림이라는 감각에 끌려다니느라 마음이 분주하지 않았던가. 이런 일은 차고 넘친다. 몸도 마음도 진리를 따르지 못할 때가 태반이고 몸은 어찌저찌 행위하고 있더라도 마음이 부대낄 때도 많다.
명상을 해보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몸은 꼿꼿이,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다. 하지만 마음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서 그동안의 삶 전체를 맥락 없이 오간다.^^ 온갖 잡생각이 판을 치고 있어 내면의 고요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아, 아침에 보경이 언니가 커피랑 빵을 맛나게 먹고 있었지. 진짜 잘 먹더라.’ 생각 하나 올라오면 비우고. ‘오늘은 메뉴 회의도 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고, 어머 내일 화성이네….’ 또 하나 올라오면 다시 내려놓고. 무한반복을 할 따름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생각이 쉬어지는데, 이때 지극한 고요와 평화를 맛본다. 드디어 단정히 앉은 몸과 마음이 같은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간디가 말하는 진리는 두루뭉술한 것도, 무언가 엄청난 것도 아니다. 내 행동과 내 마음이 완벽히 일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진리의 기준이다. 이 완벽한 일치의 순간을 간디는 ‘신과의 합일’이라고 표현한다. 브라마차리아를 실천하는 사람은 자연히 달팽이의 속도로 가게 된다. 겉과 속의 완벽한 일치,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달팽이가 아니라 굼벵이처럼 가야 할지도 모른다. 느리지만 차근차근 몸과 마음을 맞춰 나가다가 때가 되어 멈추게 된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 이게 전부다. 간디가 죽는 순간 “오, 라마!”를 외칠 수 있었던 힘은 삶을 가득 채웠던 차근한 훈련 때문이었으리라. 고행자의 이미지, 철두철미한 자기 통제…. 나는 간디의 이런 모습이 자유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그 철저함이 진리이고 자유였다. 매 순간 진리와 만나고 있는 자유인의 매서움이었다. 흰 칼날 위를 걷는 듯이 절대 방심하지 않는다. 매 순간 돌이키고, 돌이킨다. 맑고 깨끗한 행실로, 그와 같은 마음으로.
간디가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잘 제어할 수 있게 된 만큼 인도인들은 간디라는 바푸(아버지) 밑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몸도 마음도 브라마차리아 하는 것. 여기 모두에게 좋은 길이 있다. 간디가 인류의 바푸가 될 수 있었던 힘이, 그가 전하고자 했던 위로와 즐거움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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