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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진실(마하트마 간디의 진리실험 이야기)

[마.진.실] 스와라지와 글쓰기

by 북드라망 2025. 2. 18.

스와라지와 글쓰기

박보경(남산강학원)

 


간디를 만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배울 때, 그것이 스와라지입니다. ……스와라지는 모두가 각자 체험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노예이면서 다른 사람들을 해방한다는 생각은 단지 가식일 뿐입니다. (간디, 『힌두 스와라지』, 지식을 만드는 지식, 97쪽)


 
올여름부터 작고 단단한 사람을 만나고 있다. 간디다. 살면서 간디를 만날 기회는 몇 번 있었지만, 제대로 마주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간디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강렬하게 다가오는 메시지는 단연코 스와라지(자립)다. 독립을 원한다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라는 것! 나는 왜 간디가 말하는 자립에 마음이 갈까. 정말, 자립 하고 싶다. 왜 ‘자신이 노예이면서 다른 사람을 해방한다는 생각은 가식’이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뜨끔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걸까.

 
나는 노예다
감이당에서 공부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매 학기마다 글을 썼다. 얼추 헤아려보니 쓴 에세이는 열 개 정도 된다. 읽는 책, 글 주제는 달랐지만 매번 비슷한 내용으로 글을 썼다. 배경은 주로 지리산. 지리산과 그 이전 삶을 떠올리면 개운하지 않다. 무심히 살다 글을 쓸 때가 되면 알아차리게 된다. 또 지리산 이야기를 쓰네? 뭐가 걸려 있는 거 같은데, 아무리 써도 해소가 안 됐다. 도대체 뭐가 걸리는 걸까.

어딘가를 떠나왔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작년에 유목을 주제로 글을 쓰고 해소가 안 돼 올해 이별을 주제로 글을 또 썼다. 비판하고 비난하는 태도를 돌아보며 글을 쓰기도 했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마음에 우정으로 글을 몇 번이나 썼다. 내가 딛는 현장을 공부의 장으로 만들지 못한 건 아닐까. 이번 청년학교에서는 공부를 주제로 글을 썼다.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내가 뭘 못했다’는 마음이 내내 한편에 응어리져 있는데, 도통 잡히지 않았다. 유목, 이별, 우정, 비난하는 태도…. 주제를 바꿔가며 계속 글을 썼지만 명료하게 보이지 않았다.

간디를 읽으며 알았다. 활동하는 단체를 옮길 때도, 지리산으로 이사를 할 때도, 다시 서울로 올 때도 매번 흔쾌하지 않았던, 마음이 걸린 큰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나의 ‘태도’였다. 자립과 노예라는 말에 마음이 많이 흔들렸는데, 돌아보니 굵직한 사건을 겪을 때마다 나는 매번 노예의 태도를 취했다. 내가 서 있는 현장에서 한 발 나아가는 길을 택하기보단 외부 환경을 탓하며 비난하고 비판하며 도망치듯 다녔다. 노예는 다른 게 아니라,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닌 상태다. 때문에 간디는 인도인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으면 영국의 지배하에 있더라도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더라도 스스로 자립하지 못한다면 결국 노예로 산다고 말을 했다.

 



기준이 밖을 향해 있으니 이리 휘청 저리 휘청거리며 외부 환경을 찾아다녔다. 당연히 내 힘으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좌절과 주체적으로 서지 못했다는 실망이 더불어 있다. 자립하지 못한 셈이다. 글을 쓸 때 ‘흔들린다, 중심이 없다, 모르겠다’는 단어를 자주 쓴다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안은 공허하고 기준은 계속 밖을 향해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내가 왜 그런 단어를 자주 쓰는지 이제 알겠다. 응어리져 있던 마음은 결국 때마다 드러난 노예적 태도와 스스로 자립하지 못한 내 상태였다.

 


자립은 욕망을 다스리는 것
어떻게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을까. 어떻게 독립하고, 해방될 수 있을까. 간디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자립이라 말하고, 그럴 때 해방은 이뤄진다고 한다. 간디의 자립을 기준으로 내 삶을 돌아봤을 때, 나를 다스린다는 마음이 중심에 없을뿐더러 나 자신을 다스리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지 않았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구조가 크게 바뀌고, 한 방에 바뀌는 게 해방이라 생각했다. 천천히, 조금씩 자기 삶을 바꿔가는 일보단 화려하고 멋진 걸 ‘내가’ 하고 싶은 욕망이 더 컸다. 자기 삶을 조금씩 바꾼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겠는가. 진짜 사람들이 해방되길 원하는 걸까. 그 마음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박수 쳐줄 사람이 필요하고, 박수받는 삶을 살고 싶은 건 아닐까.

누구보다 잘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노예적 태도와도 연결된다. 나는 어떨 때 밖을 향해 기준을 세울까. 매 순간 기준이 밖을 향해 있지 않고, 매순간 노예의 상태로 살진 않는다. 강하게 작동할 때가 있는데, 내가 바라는 대로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을 때 주저앉았다. 그럴 땐 간디의 말처럼 “우리의 예속된 상황을 인도 전체의 탓으로 간주”(간디, 『힌두 스와라지』, 지식을 만드는 지식, 82쪽) 해버렸다. 한 걸음 나아가지 못하고 밖을 탓했다. 그게 쉽고, 편하기도 했다.

쓰다 보니 정말 내가 욕망의 노예같이 느껴진다. 결국, 자신을 다스린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삼라만상을 우리의 하찮은 척도로 측정하기에”(간디, 『힌두 스와라지』, 지식을 만드는 지식, 82쪽) 내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사람이 되면, 욕망에 휘둘리지 않게 되면, 그때 간디의 말처럼 세상은 해방될 것이다.
  

글쓰기, 친구를 만나다
간디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다스리며, 세상과도 공명했다. 큰 비법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간디의 삶을 보면 큰 비법은 없다. 진리의 길 위에서 정직하게 걸었을 뿐이다. 간디를 공부하며 나에겐 무엇보다 스와라지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자립하는 삶은 백 명에게 박수받는 화려한 삶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삶이다. 간디를 통해 하나는 확실히 배웠다. 밖을 향해 탓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 내 욕망을 정직하게 마주하라! 탓하며 주저앉는 대신 한 걸음 내딛는 그 한 발이 나를 자유의 길로 더 가까이 안내해 주겠지.

 



어떻게 정직하게 마주할 것인가. 나에겐 나를 다스린다는 마음조차 없었으니 오죽할까. 감사하게도 때마다 나에게 신호를 주는 새 친구 하나를 만났다. 매번 밖을 향해 이리저리 궁리하는 나에게 네 삶을 한 번 살펴보라고 끊임없이 알려준 친구는 글쓰기다. 지금처럼 살피고, 쓰고, 마주하다 보면 어떤 사건이 와도 서툴지만 내 발로 한 걸음씩 걸을 수 있지 않을까. 걷다 보면 공허함, 비겁함과 작별하는 날도 오겠지. 때가 되면, 다른 사람에게도 함께 자립해 보자고 손 내밀 날도 오겠지? 그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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