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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진실(마하트마 간디의 진리실험 이야기)

[마.진.실] 특권을 내려놓고 분노하자!

by 북드라망 2025. 5. 15.

[마진실 세미나에서의 청년들과 간디의 만남]

 

특권을 내려놓고 분노하자!

김 미 솔(남산강학원)

 
나의 의무는 무엇인가?
간디의 삶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 있다. 간디가 남아프리카에 도착해 기차를 탄 장면인데 내가 『간디자서전』을 읽으며 가장 놀란 장면이기도 하다. 당시 간디의 나이는 불과 23살이었다. 기차를 타고 나탈 더반에서 프리토리아로 가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에 도착한 지는 딱 일주일. 현지 물정을 잘 모를 때였다. 1등칸 표를 받고 착석했는데, 나탈의 수도 마리츠버그에 도착했을 쯤 승객 한 사람이 들어오더니 간디를 위아래로 훑고는 역무원들을 불러온 거다. 이들은 간디에게 짐차칸으로 가라고 했다. 간디가 1등표를 보여주었지만 이들은 무조건 짐차칸으로 가라며 막무가내였다. 결국 경찰까지 와서 간디를 끌어냈다.

경찰을 부를테면 부르라고, 하지만 내 발로는 안 나갈 거라며 간디는 끝까지 버텼다. 하지만 결국 짐과 함께 간디는 밖으로 내던져졌고 기차는 떠났다. 간디는 대합실에 꼼짝없이 앉았다. 지독히 추운 겨울이었다. 남아프리카 높은 지대의 겨울은 몹시 춥다고 한다. 마리츠버그도 지대가 높아서 아주 추웠다. 근데도 간디는 가방에서 외투 하나 꺼내지 않은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만 앉아서 생각을 했다. 이번 글에서 나는 이때 간디가 어두운 대합실 안에 꼼짝없이 앉아서 했던 생각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간디의 생각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나의 의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권리를 위해 싸울 것이냐 인도로 돌아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모욕은 생각 말고 그냥 프리토리아로 가서 사건을 끝낸 다음 인도로 돌아갈 것인가? 내가 할 일을 하지 않고 인도로 돌아가는 것은 비겁하다. 내가 당한 고통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라는, 깊은 병의 한 증상에 지나지 않는다. 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고통을 겪으면서라도 이 병의 뿌리를 뽑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받은 명예훼손에 대한 보상은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데 필요한 한도에서만 바라기로 해야 한다. 그래, 나는 다음에 오는 기차로 프리토리아에 가기로 결심했다.” – p.184, <간디자서전>, 간디 지음, 함석헌 옮김, 한길사


간디는 인종차별을 당했다. 단지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1등표가 있었는데도 짐차칸으로 쫓겨난 거다. 짐차칸으로 가기를 거부하자 아예 경찰까지 와서 간디를 기차 밖으로 쫓아냈다.

이때 간디에겐 세 가지 길이 있었다. 싸우거나, 인도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일단 프리토리아로 가서 자신이 맡은 소송사건을 끝낸 다음 인도로 돌아가는 것이다. 간디는 이 세 가지 선택지 중 인도로 돌아가는 선택지를 포기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할 일을 하지 않고 인도로 돌아가는 건 비겁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도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남아프리카에서 그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간디는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나는 하지 못한 분노
나는 간디가 자신이 받은 차별에 대해 따로 법적 조치를 취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개인적인 억울함 때문이었다면 철도청과 역무원들을 고소했을 거다. 근데 이 일은 자신뿐만 아니라 유색인종이라면 누구라도 겪었을 일이었기에 간디는 고소할 생각을 접었다. 그리고 그는 사적인 보복을 하는 대신 유색인종을 대변하기로 한다. 그 순간 간디의 존재가 변했다.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며,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던 청년 간디는, 차별받는 사람들을 한없이 연민하고, 이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 간디에 비춰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는 내 억울함에 대해서는 그렇게 따지면서, 사회 부조리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을까? 왜 나는 불의에 대해 행동하는 걸 내 의무로 여기지 않을까?

나는 개인적인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발 빠르게 나서서 따진다. 누가 하지 말라고 막아도 가서 굳이굳이 핏대를 세운다. 근데 사회 부조리에 대해서는 가만히 있곤 한다. 누군가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했다는 뉴스를 보면 화가 불끈 오르다가도 결국 가만히 있는다. ‘누군가 해결하겠지. 어떻게든 되겠지.’ 때로는 ‘저기 당한 게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하고 안심을 하기도 한다. 언제든 나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이건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일이 아니라 남 일인 것이다. 어째서 나는 이리도 다른 이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무관심한가? 왜 나는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이들이 겪은 불의에 같이 분노하지 못하나?
 

 

인도인들이 당한 인종차별의 뿌리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유럽 열강들은 앞 다투어 식민지 확장을 위해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갔다. 식민지가 그토록 필요했던 건 당시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화 때문이었다. 싼 값에 원료를 구해 올 곳이 필요했으며, 자국에서 생산된 상품을 가져다 팔 넓은 시장이 필요했다.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할 수 있는 게 바로 식민지였다. 핵심은 식민지의 부를 그대로 빨아들이는 것! 남아프리카는 그런 유럽 열강들이 진출한 땅이었다.

1860년쯤 나탈에 있던 유럽인들은 사탕수수 재배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탕수수 재배에는 상당한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곳 원주민들, 줄루족은 노동에 적합하지 않았다고 한다. 풍요로운 땅, 남아프리카 출신의 그들은 굳이 노동을 해서 먹고 살 필요가 없었을 터. 애초에 노동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탈 유럽인들은 이들에게서 살 터전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어떻게든 이들을 노동에 동원하려고 수를 썼다. ‘세금을 부과하면 일을 할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이미 내고 있던 세금으로도 충분히 빈곤에 허덕이던 줄루족은 이런 유럽인들의 조치에 대해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어난 게 1906년 줄루 반란이다.

하지만 줄루 반란이 일어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노동력 확보가 시급했던 농장주들은 이미 외부에서 노동자를 들여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게 인도인들이었다. 나탈 정부는 인도 정부와 교섭하여 인도 노동자 모집을 시작했다. 인도인들은 5년간 나탈에서 일한다는 계약을 맺고 남아프리카로 건너왔다. 이 기간이 끝나면 계약 노동자 신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이곳에 머물 수도 있고 토지도 소유할 수 있다는 권리를 약속받고. 물론 이런 것들은 인도인들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고 백인들은 계약 기간이 지나고 나서도 근면한 인도인들을 통해 자기네 농업을 발전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의 예상이 완전 빗나간 것이다! 5년이 지나고 남아프리카에 뿌리내린 인도인들은 이제 자신들이 독자적으로 농산물을 재배하고 수출하고 수입하기 시작했다. 예상 외로 수완이 너무 좋았던 것이다. 이들은 토지와 가옥도 소유하기 시작했다. 백인들 입장에선 졸지에 자신들 밑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무역 경쟁자가 된 셈이었다. 딴 건 몰라도 이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인도인에 대한 적대심에 불이 확 붙었다. 그때부터 남아프리카 백인들은 인도인들을 못살게 구는 온갖 정책들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인도인들을 이 땅에서 내쫓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선거권 박탈 법안, 계약 노동자에 대한 세금부과 법안 등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들이다.

일상에서는 더욱 말도 안 되는 차별들이 수두룩했다. 유색인종법에 따르면 인도인은 공용도로를 걸을 수도 없었고, 오후 9시 이후에는 주인이 써주는 통행증 없이 외출할 수도 없었다. 앞서 간디가 겪은 사건에서 보았듯 기차 1,2등 칸에 탈 수 없었던 건 물론이다.

유럽인들은 인도인들이 남아프리카에 자리 잡고 잘 살게 된 것, 그리고 이제 무역 경쟁자가 된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적대감이 폭발했고 그렇게 유색인종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대우받게 된 것이다.

노동력이 필요해 데려올 땐 언제고, 이렇게 못살게 굴다니! 원주민 줄루족과 맺은 관계에서도 그렇고 노동하러 온 인도인들과 맺은 관계에서도 그렇고 백인들은 탐욕뿐이었다. 나는 역사를 되짚어보며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들이 당한 인종차별의 뿌리는 탐욕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권, 함께 분노하지 못한 이유
간디가 당한 인종차별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과거 나의 유학시절이 떠올랐다. 간디의 경우와 비교할 수 없이 약소한 예시이지만, 내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느꼈던 감정이 떠올랐다. 동양인이기 때문에 무시당한다고 느꼈던 순간들이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친구들은 상냥했다. 이따금 한 번씩 느꼈던 배제되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대접하기 이전에 나 스스로가 이미 위축되었다는 걸 상기할 수 있었다. 영어도 그들만큼 안 되고, 이미 나 자신이 그곳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느꼈다. 이미 나 스스로가 자신을 차별하고 있었던 셈이다. 누군가에게 다가가기란 참 어려운 일이 되었다. 먼저 나에게 다가와준 친구들과도 우정관계를 제대로 맺기가 어려웠다. 열등한 나를 들키지 않으려다보니 그 관계가 부담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그들과 다르다는 것, 그들만큼 잘 알지 못한다는 걸 들킬까봐 말 한 마디를 조심하고 있었다. 결국 미국 유학시절 깊은 관계를 맺은 건 같은 한국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미국에서만 유학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 전에 인도에서도 유학을 했었다. 인도에서 유학했던 시절은 전혀 달랐다. 그때는 외려 내가 우월하다고 느꼈다. 개발되지 못하고 가난한 인도에 대해 나는 분명 차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분명 이들보다 내가 특별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사회 혹은 다른 누군가가 나를 차별하기 이전에 내가 차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열등감을 느꼈지만 인도에서는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인도에서 나는 그야말로 거리낄 게 없었다.

이런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미국에서 받은 고통에 대해 토로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이 나의 의무가 될 수 있을까? 이미 내가 누리고 있는 특권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당한 차별에 대한 철폐를 외칠 수 있을까.

결국 사회 부조리에 대해 분노하고 그에 대해 뭔가 행동하는 게 내 의무가 되지 못한 이유는, 그것이 내 일이 아닌 남 일이 되어버린 이유는 내가 누리던 특권 한 자락을 버리지 못해서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를 차별하는 상대와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기보다는 나는 도저히 내가 누리던 그 특권을 내려놓을 배짱이 없었던 거다.

그걸 내려놓지 못하니 분노는 개인적인 억울함을 호소하고, 상대가 뭘 어떻게 잘못했는지를 따지고, 당사자를 고소하는 식으로만 표출되었다. 결국 우리가 마땅히 분노해야 하는 사안에 대해 함께 분노하지 못하고 개별자로 존재하게 된 이유는, 이 특권을 놓지 못해서이다.

다른 이들의 고통을 외면했던 건 그 고통이 나와 별개의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 나의 이익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특권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다 같이 제대로 분노할 수 있다. 이 탐욕을 버릴 때 우리는 공감과 연민으로 나아갈 수 있다.
 




모든 민중의 친구, 마하트마!
특권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누구와도 친구가 된다. 친구가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면 그에 대해 분노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때 우리는 연대해서 싸울 수 있다. 결국 간디가 자신의 의무 삼았던 인종차별의 철폐는, 다른 사람이 나를 차별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이전에, 내 안의 차별심을 없애는 문제였다는 걸 알겠다.

남아프리카 마리츠버그역은 이제 간디 순례의 한 거점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 마리츠버그역에 와서 간디를 기린다.(훗날 나도 언젠가는 이곳에 꼭 가보리라^_^) 여기에는 간디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그 동상은 참 신기하게도 생겼다. 한 동상의 앞뒷면에 다 얼굴이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기차 사건 이전의 간디가, 그리고 뒷면에는 기차 사건 이후의 간디가 있다. 간디의 존재가 이곳 마리츠버그역 어두운 대합실 안에서 변했다는 걸 보여주는 거다. 간디는 바로 이곳에서 마하트마가 되었다.

“나는 어떤 고통을 겪으면서라도 이 병의 뿌리를 뽑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그래, 나는 다음에 오는 기차로 프리토리아에 가기로 결심했다.” 간디는 인도로 돌아가는 대신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인도인들에게는 너무도 어두운 땅 남아프리카에 빛을 가져오리라! 이들이 받는 고통과 설움을 없애주리라! 이 마음을 먹은 순간, 간디는 모든 민중의 친구가 되었다. 여기에 간디 개인이 누려온 특권과 쾌락이 들어올 틈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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