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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걷다보면

[기린의 걷다보면] 시코쿠 순례길을 걷다 (1)

by 북드라망 2025. 2. 19.

시코쿠 순례길을 걷다 (1)

 

1.  진짜 가는구나
일본의 시코쿠 순례길 걷기, 오랫동안 해 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삼십 대 중반부터 한번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만 했었다. 공동체에 온 후 같은 바람을 품은 친구를 만났고, 다른 친구까지 뭉쳐서 한 달에 5만원씩 여행경비를 모았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5년의 시간이 흘렀고 여행 일정은 마냥 미루어졌다. 올해는 꼭 가자고 9월 출발을 계획하고, 5월에 일본 마쓰야마행 비행기티켓을 예약했다. 각자 일정에 치여 별다른 준비도 못했다. 그 사이 8월 태풍이 일본 열도를 휩쓸고 갔다고 하고, 지진도 잦을 예정이라는 기사를 흘려들으며 가야 가는구나 했다. 9월인데 연일 34~5도를 찍는 온도계를 볼 때는 못 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예정대로 9월 13일 마쓰야마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제야 실감이 되었다. 진짜 가는구나.

시코쿠는 일본을 이루는 주요한 4개의 섬(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큐슈)중 하나로, 도쿠시마(德島)·고치(高知)·에히메(愛媛)·카가와(香川)의 네 현으로 나뉘어 있다. 네 개의 현에는 각각 발심의 도량(1-23번절, 도쿠시마), 수행의 도량(24-39번절, 고치), 보리의 도량(40번-65번절,에히메), 열반의 도량(66-88번절, 카가와)으로 알려진 88개의 절을 잇는 순례길이 조성되어 있다. 시코쿠 섬을 일주하는 길로 총 1200키로 정도 되고, 걸어서 순례를 하면 40-50일 정도 소요되는 길이다. 우리의 일정은 에히메현의 현청 마쓰야마공항으로 입국해서 그 주변의 절을 순례하는 것으로 정했다. 5월에 일정을 짤 때 마쓰야마공항 티켓이 조금 더 저렴했기 때문에 이쪽에서 시작하기로 했을 뿐 별다른 뜻은 없었다.

걷기는 별 부담이 없었지만 가기 전 검색한 날씨 예보에 매일 30도를 훌쩍 넘긴 기온에 비까지 잡혀 있어서 우비까지 빌려서 챙겼다. 그동안 땡볕 아래 걷는 일은 흔했지만, 비까지 맞으며 걷기는 드물었기 때문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일본어는 완전 까막눈이지만 같이 가는 친구 둘이 읽고 말하기에 능통해서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너무 무식한가 싶어서 휴대폰에 히라가나와 가타카나표를 다운받아서 띄엄띄엄 눈으로 익히기는 했다. 여행 중에 뜻도 모르는 간판이나 역이름을 떠듬떠듬 읽어보기도 했다.

 


2. 3만 4천보의 강행군
시코쿠 순례길은 88곳의 절을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서 순례하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여러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우리는 세 번 째 방법으로 택했다. 13일 마쓰야마공항에서 공항버스와 기차, 택시를 갈아타고 이마바리시에 있는 58번 절 선유사(仙遊寺)로 올라갔다. 순례자들의 숙박시설 중에 절에서 숙박할 수 있는 슈코보를 예약해 둔 절이었다. 우리나라의 템플스테이라고 보면 된다. 해가 지면서 사위가 컴컴해져서 주변이 잘 안 보였지만, 택시 안에서도 가파른 경사가 느껴질 정도로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이었다. 절에서 제공하는 저녁 도시락을 먹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선유사 경내 뜰에서 보이는 전경


 

다음 날 새벽, 숙소의 넓은 마루 끝 전망대에서 이마바리시와 해안선을 따라 섬들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전경과 마주했다. 구름 위로 분홍빛을 퍼뜨리며 솟는 해를 보면서 선유사를 숙소를 정한 결정에 감탄했다. 순례를 시작하는 첫날의 설렘을 북돋는 경치였다. 슈코보를 할 경우 새벽 예불에 참석하기도 한다며 한 친구는 예불에 참석했다. 지난 저녁과 별반 다르지 않은 아침 도시락을 먹고 길을 나섰다.

첫날의 계획은 선유사에서 아래로 내려가서 영복사(57번절)로 가는 일정이었는데, 산길을 내려가다가 국분사(59번절)로 가는 방향 표지판을 보고 루트를 수정했다. 6.6키로를 걸어가야 하는 길이었다. 산길을 내려가서 논뷰가 펼쳐지는 마을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로도 논뷰는 원없이 보면서 걸을 수 있었는데, 첫날의 논뷰는 눈이 시원해지는 풍경이었다. 국분사에 도착해서 목조 건물로 이루어진 절 경내로 들어섰다.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들고 흰옷을 걸친 순례자들이 보였다. 검색을 통해 순례 복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신기했다.

본당과 대사당을 둘러보고 납경소(納經所)라고 적힌 곳으로 들어갔다. 순례자들이 알록달록한 표지의 책을 내밀면 거기에 붓글씨를 써 주었다. 친구도 그곳에서 파는 책을 사서 붓글씨를 받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납경이란 원래 순례자가 사경해 온 경전을 공양 올리는 것이었는데, 현대에 와서는 절을 순례했다는 증표로 절의 도장과 본존불의 이름을 받아가는 것이 되었다고 한다. 납경을 받고 다음 절로 이동하는 교통편을 찾아 이동했다.
  

납경을 해주는 모습, 500엔을 받는다


한적한 마을 길에서 하교하는 중학생들의 무리와 함께 걷게 되었다. 햇빛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이 인상적인 중학생에게 우리가 갈 역을 물었더니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역에 도착하니 기차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마을로 들어갔다. 구글로 검색한 길을 따라 식당을 찾아서 점심을 해결했다. 다시 역으로 와서 기차를 타고 55번 절 남광방으로 이동했다. 다음 56번 절 태산사, 57번 절 영복사를 거쳐 다시 선유사로 돌아가는 여정으로 첫날의 순례를 마무리했다. 3만 4천보를 걸었다. 첫날이라 몸도 풀리지 않은 데다 땡볕이 내려쬐는 도로를 계속 걸어야 했고, 새신발이라 발이 불편한 친구와 다른 친구는 발에 물집이 잡히면서 걸었던 강행군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숙소 지하에 있는 온천에 가서 온천욕을 하면서 뭉친 다리 근육을 풀어주었다.

 

 


3. 순례하는 이들의 마음을 생각하다
둘째 날 아침, 이틀을 묵은 선유사에서 택시를 불러서 이마바리 시내에 있는 호텔로 내려왔다. 전날 지팡이에 의지해 힘들게 올라갔던 길을 택시로 편안히 내려오자니 걷기의 고행을 자처하는 순례가 과연 뭘까 싶었다. 호텔에 짐을 내려놓고 다시 길을 나섰다. 해발 750미터에 있는 60번 절 횡봉사는 패스하고 버스를 타고 61번 절 향원사로 향했다. 이 절은 현대식 건물 안에 본당이 위치해 있어서 목조 건물의 절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본당의 강당 의자에 앉아서 순례자들이 불경을 읊는 소리를 들었다. 첫날은 신기하게 보였던 순례자들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그들의 의례가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노인들이었는데 몇 명씩 무리를 지어서 차를 이동하면서 순례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들을 이끄는 사람이 먼저 읊기 시작하면 손에 든 불경집을 보고 따라 읊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다가 <반야심경> 부분에서는 귀에 들리는 부분도 있었다.
  
시코쿠섬에 조성된 이 순례길은 이 섬에서 태어난 홍법대사(弘法大師 空海·774~835)가 수행한 자리에 세워진 절들을 따라 번호가 매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절에는 본당과 홍법대사를 모시는 대사당이 함께 세워져 있다. 시코쿠를 찾아오는 순례자들은 시코쿠를 두루 돈다는 뜻에서 ‘오헨로상(お遍路さん)’으로 불린다. 이들의 복장(하얀 소복에 삿갓과 지팡이)은 전통적으로 ‘새로운 탄생을 위한 죽음’이라고 해석된다고 한다. 순례를 하면서 자신이 쌓은 업을 참회하고 그간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후, 88번 절에 도착해서 흰옷과 지팡이를 내려놓으면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의미라고 한다. 그래서 88번 절에는 순례자들이 남기고 간 지팡이를 모아둔 곳도 있다고 한다.

 

홍법대사상

 


62번 절 보수사, 63번 절 길상사, 64번 절 전신사까지 걸었다. 전신사는 산 속에 위치해 있어서 운치가 있었다. 절로 들어가는 길목에 산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받으며 서있는 나한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물에 포함된 철성분 때문인지 붉게 변한 조각상 밑받침에 십엔짜리 동전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물이 흘러내리면서 자란 이끼가 접착제 구실을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도 동전을 꺼내 소원을 빌면서 붙였다. 가는 절마다 촛불을 켜고 향을 태우면서 합장을 하고 소원을 비는 순례자들이 조금 낯설게 보이기도 했다. 자신을 돌아본다면서 뭘 저리 간절히 비나. 그런데 물이 떨어지는 밑받침에 이끼 사이를 비집고 동전을 붙이면서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애쓰다 보니 저절로 빌게 되었다. 원하는 바를 이루게 도와주세요. 결국은 물에 떨어지고 말 동전 하나에 의지해 빌어보는 마음, 순례라고 신성한 무엇에 대한 기대가 툭 허물어졌다. 그러자 이틀을 걸으며 마주쳤던 순례자들의 합장하는 마음이 희미하게 와 닿았다. 자신의 평안에서 세계의 평화에 이르기까지 그 바람이 무엇이어도 좋겠는 마음이었다.

 

순례자의 마음에 희미하게 닿던 순간

 
순례 셋째날,  54번 절 연명사를 순례하고 이마바리성으로 이동했다. 성 꼭대기에 올라가서 보니 푸르게 맑은 하늘 아래 시야가 저 멀리까지 트여서 마음까지 시원해졌다. 버스를 갈아타고 걷기를 반복하면서 이마바리와 사이조 지역을 아우르는 11곳의 절을 순례했다. 걸어다니는 순례자들이 드문드문 지나치기는 했지만, 한여름의 더위가 꺾일 줄 모르는 시기에 순례를 나서는 이는 별로 없어 보였다. 아침에 나서서 절을 순례하고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드는 하루 이틀 사흘에 이르니 우리도 점점 순례자의 행색을 갖추어 갔다. 이제 다음 숙소로 이동해 마쓰야마 지역에 있는 절들을 순례하는 일정이 남았다.

 

이마바리성 전경, 이 날 하늘은 정말 대단히 볼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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