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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걷다보면

[기린의 걷다보면] 귀촌한 친구와 함께 강진을 걷다

by 북드라망 2024. 10. 15.

귀촌한 친구와 함께 강진을 걷다

 


강진으로 귀촌한 친구
오래전에 논술 관련 일을 할 때 만난 친구가 귀촌을 했다. 4년 전에 따뜻한 남도부터 시작해서 전국을 돌아보고 살 곳을 결정하겠다며 강진에서 시작했다. 4년 동안 강진에서만 두 번 정도 이사를 하더니, 그냥 강진에 눌러앉기로 하고 집까지 샀단다. 6월 셋째 주 집들이를 겸해서 강진으로 친구를 보러 갔다. 같이 일했던 다른 친구와 각자 출발해서 나주역에 우리를 태우러 온 친구와 만난 시간이 밤 10시, 친구의 집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나주역에서 강진 친구 집까지 가는 내내 도로에 가로등이 거의 없어서 깜깜했다. 도시를 벗어났다는 실감이 났다. 도로에서 벗어나 논길을 따라 꼬불꼬불 들어서니 집 앞으로 모내기를 끝낸 논이 펼쳐져 있었다. 집 앞에 가로등 하나 덩그러니 켜져 있을 뿐 마을은 적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강진 도암면 친구네 집


다음 날 아침을 먹고 강진에서 가까운 해남의 명소부터 돌아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차 안에서 친구의 근황을 들었다. 서울에 있을 때부터 생태관련 시민단체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친구는, 강진에 내려와서도 지역에서 운영하는 생태교육 프로그램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관계를 맺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강진에서 만난 친구들 여섯 명과 생태문화협동조합을 만들고, 강진군에서 위탁을 받아 생태문화복합공간도 만들었단다. 남편의 퇴직을 기점으로 귀촌하겠다는 계획아래 트럭운전 면허를 따고 농사학교에 등록해서 벼농사를 배우던 친구였다. 워낙 활동력이 뛰어난 친구여서 귀촌했다고 두문불출하지는 않으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귀촌 4년 만에 협동조합까지 꾸리다니 새삼 친구의 친화력에 감탄했다. 강진에서의 새로운 도전이 또 어떤 길을 낼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해남의 천년 고찰 대흥사에서 본 현판 이야기
해남에 있는 대흥사로 올라가는 길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관으로 알려진 유선관이 리모델링 되어 호텔로 운영되고 있었다. 예전에는 대흥사에 오는 승려들이 묵는 곳이었으며, 주변으로 여관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해남에서 광주로 향하던 시위대들이 주변 여관에서 묵었다는 기록이 담긴 ‘대흥사 여관터 사적비’도 있었다. 대흥사까지 걸어가는 길 가에 수령이 높은 나무들로 그늘이 깊어서 걷기가 좋았다. 대흥사 입구에 들어서니 두륜산의 능선들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는 전경이 펼쳐졌다. 푸른 하늘 아래 부드러운 능선의 품에서 천년을 이어오는 고찰의 기운도 넉넉하게 다가왔다.

 

두륜산 자락이 품은 대흥사



대흥사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소개된 일화가 많이 알려져 있었다.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을 쓴 원교 이광사(1705-1777)와 무량수각 현판을 쓴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일화였다. 역모에 연루되어 제주로 귀양을 가던 길에 대흥사에 들른 추사가 원교의 글씨를 보고 조선의 글씨를 망친 자의 글씨를 현판으로 걸어놓았다고 화를 냈단다. 대흥사에서는 결국 현판을 떼었는데,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러 자신이 잘못 보았다고 인정하고 다시 걸게 했다는 일화다. 유홍준은 책에서 추사가 9년의 귀양 경험으로 달라진 면모를 반영한 일화로 소개하며, 이후 추사의 필체가 더욱 성숙되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귀양길에서 벗어나 대흥사를 방문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하기도 했단다. 여튼 대흥사 경내에서는 그 일화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었고, 두 인물의 현판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었다. 문외한의 눈으로는 추사의 글씨가 미적 감각을 발휘했다면, 원교의 글씨는 각 잡고 쓴 글씨로 보였다. 해가 길어 경내에는 여전히 햇살이 남아있었지만, 저녁 6시 저녁 예불을 알리는 타종이 있었다. 수령이 800년을 넘겼다는 두 나무가 뿌리에서 연결되어 연리근으로 불리는 느티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종소리, 그리고 새소리. 그 소리들의 배웅을 받으며 절을 떠났다.

 

추사 김정희가 썼다는 무량수각 편액


  

강진의 구석구석을 걸어보다
다음 날은 친구가 강진의 구석구석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강진만에 조성되어 있는 강진생태공원에서 시작되었다. 2014년부터 조성되고 있는 강진만 생태공원은 20만평에 갈대군락지가 펼쳐져 있고, 겨울에는 철새를 탐조할 수 있는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가 갔을 때는 바닷물이 빠져서 갯벌에 살고 있는 생물들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강진만 갯벌에 터를 잡은 대표적 생물은 붉은발말똥게와 짱뚱어였다. 데크 아래로 갯벌을 볼 수 있어서 꼬물거리는 그 생명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는데, 갯벌을 터전 삼아 먹이를 잡고 구멍을 들락거리고 구덩이를 첨벙이는 모습들이 너무 귀여웠다. 친구가 이들의 생태를 해설해주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해설사가 없었다면 알아볼 수 없는 생명들을 발견하는 재미에 한참을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다음은 강진 전라병영성터였다. 현재 전라병영성은 복원중이라는데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단다. 병영성 뒤로 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하멜 일행이 강진 전라병영에 7년간 억류되어 마을에서 여러 잡일을 하며 지냈다는 기록도 있었다. 친구가 마을 뒤쪽으로 안내했는데 400년이 넘은 비자나무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인데 열매로 기생충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대보름에 나무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약재로 쓰이는 열매를 구할 수 있어서 마을에서도 귀하게 여겼을 거라는 얘기도 있고, 나라에 위급한 일이 일어났을 때 나뭇가지가 흔들렸다는 전설도 전해진다고 했다. 나무의 위용만큼 사연이 주렁주렁 달려있을 것 같았다.
 

전라병영성터앞의 전경

 


강진 하면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는데, 강진군민의 안내로 구석구석 알려지지 않은 강진의 면모를 제대로 돌아보았다. 오래 되고 낡은 곳이어도 그 곳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것을 알리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난 4년간 강진을 속속들이 돌아다니며 듣고 배우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이제는 강진군민이 되어 생태활동가로 활약하는 친구 덕분이었다. 차를 타고 이동하며 유명한 곳을 찍고 떠나는 관광이 아니라, 마을 곳곳에서 켜켜이 쌓여온 시간을 따라 걷는 여행이었다.

 
관계 인구라도 늘려보자
친구가 사는 집 바로 앞집은 마당에 나무들이 울창했다. 할머니가 혼자 사시다가 요양원으로 가면서 빈집이 되었다고 한다. 친구가 이사 왔던 봄에는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폈었다고 한다. 아들이 가끔 들러서 마당의 잡초를 뽑기도 한다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점점 더 쇠락해지고 있었다. 대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가 보았는데, 매화나무에서 떨어진 황매실이 마당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여름 초입이라 온갖 풀들이 마당 주변으로 무성했지만, 집주인의 손길을 떠난 공간에서 풍기는 을씨년스런 기운을 감출 수는 없었다. 나이든 노인들만 남아있다는 지방에 그들마저 병들어 떠나고 나면 나날이 빈집이 늘고 소멸을 예상하기에 이르렀다.

강진도 예외는 아니라서 인구감소에 대응하는 방안으로 관계 인구라도 늘려보자는 정책이 시행되고 있단다. 관계인구란 직접 이주하지는 않지만 관광 등의 목적으로 지역을 방문하거나 한 달 살기 같은 프로그램으로 방문하는 인구를 가리킨다. 지자체에서는 온갖 축제를 기획해서 관계 인구를 늘려보겠다고 애쓰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강진에 갔던 날도 강진군 코끼리 마늘꽃축제가 열리는 기간이었다. 보라색 마늘꽃밭이 조성된 벌판 한 쪽에 행사 그늘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도로가에 차를 주차해 놓고 잠깐 들렀는데, 급하게 기획한 티가 역력했다. 이런 축제들에 예산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 지방인구 감소 해결에 무슨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었다.

강진으로 귀촌한 친구 집을 방문하여 2박 3일간 해남 대흥사도 가보고, 강진의 구석구석을 걸었다. 강진 주변으로 바다와 산과 들판까지 고루고루 걸었고, 지방이 당면한 현실의 단면을 실감하기도 했다. 나이 들어가면서도 새로운 도전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친구도 멋져보였다. 슬기로운 귀촌 생활의 또다른 모델과 함께 한 알찬 여행이었다.

 

글_기린(문탁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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