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한 도전, 그리고 '우리'
1.‘걷⸱친⸱초’ 를 시작하다
친구들과 함께 걷기를 시작했다. <‘기린의 걷다보면’에서 한 달에 한 번 친구를 초대 합니다>(이하 걷친초) 라는 긴 이름의 프로그램으로. 그동안 걸었던 둘레길 중에서 친구들이랑 같이 걸으면 좋겠다는 길을 골라 홈페이지에 공지를 올렸다. 4월에 시작하여 첫 길을 양평 물소리길 4코스로 정하고 친구들을 모았다. 그러고 나면 그 길을 미리 사전 답사를 했다. 알고 있던 길이지만 다시 걸으면서 어느 지점에서 쉬어야 할지, 도시락을 먹으면서 수다도 펼칠 장소 등을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혼자서 걸을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새록새록 눈에 들어왔다. 그 길을 친구들과 함께 걸을 상상을 하면 지루할 틈이 없었던 답사였다.
걸을 날짜가 다가오면서 수시로 일기예보를 검색하며 날씨를 체크했다. 첫 걷기가 예정된 날은 하루 종일 비예보가 떴다.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내게 비오면 그것도 좋겠다는 한 친구의 말에 용기를 냈다. 양평역에 집결했을 즈음 내리기 시작한 비는 걷는 내내 그치지 않았다. 우산을 쓰고 비옷을 입고 나선 길 위에 하얀 벚꽃잎들이 떠다녔다. 신발로 들어차는 물기를 비오는 강가의 물안개의 풍경으로 잊어가며 걸었다. 비가 와서 아무도 걷지 않는 탓에 호젓하게 걸을 수 있어 좋다고들 해서 미안한 내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렇게 첫 걷기를 무사히 끝냈고, 5월에는 우이령길, 6월에는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다.
7월의 장마철을 보내고 8월 지리산 둘레길 3코스 인월-금계 구간을 걷기로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걸을 수 있는 길을 소개하는 유튜브를 보고 정한 코스였다. 20키로의 여정으로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도 풍광이 좋기로 널리 알려진 길이었다. 미리 답사를 갈 수 없는 상황이라 온갖 검색을 통해 사전에 알아야 할 것들을 점검했다. 그러고는 그동안 걷친초를 함께 했던 친구 둘에게 톡을 보냈다. 올해는 음미체 활동에 주력하는 해라면서 체육활동으로 걷겠다는 친구와 태백 산골에서 자라면서 키운 체력으로 웬만한 걷기는 부담 없다는 친구였다. 무박 2일의 일정으로 거리가 좀 부담이 되기는 하지만 더 늦기 전에 한 번 걷자고 꼬셨다. 둘 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확답을 받고 공지를 올렸다. 나까지 셋만 되면 가열차게 한 번 걸어봐야겠다는 설렘을 담아서.
<지리산 둘레길 자락에서. 이런 풍광을 보면서 여유롭게 걷자고요~~ 했는데>
2. 나만 믿고 따라 나섰다는 지리산 둘레길 3코스
8월 24일 밤 11시 반, 동서울터미널에 집결한 친구들은 총 9명이었다. 셋만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예상을 깬 호응이었다. 다 모였을 때 한 친구가 이 둘레길을 택한 까닭을 물었다. 별 생각 없이 결정했던 터라 당황했다. 유튜브를 보고 아직은 낮의 길이가 길 때 걸어봐야지 했다는 단순한 동기를 우물쭈물 읊었다. 20키로나 되는 길을 30도를 웃도는 한낮에 걷겠다는 계획치고는 너무 무모한 동기였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10년 전에 이 길을 걸은 적이 있다는 친구도 있었고, 걷기에 필요한 장비를 꼼꼼히 챙긴 친구도 있어서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심정으로 버스에 올랐다. 한밤에 떠나는 인월행 버스는 전 좌석 매진이었다. 인기 있는 코스라던 정보를 실감하면서 기대감이 좀 상승하기도 했다.
새벽 3시 10분, 인월 터미널이 있는 시내는 캄캄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팀이 우리밖에 없었다. 열려있는 편의점에서 도시락과 라면으로 이른 아침을 때웠다. 렌턴 불빛에 의지하여 3코스의 시작점까지 찾아갔다. 해가 뜨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주위의 풍경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유튜브에서 봤던 어슴프레 해가 떠오르면서 시작했던 걷기의 여정은 물 건너 갔다. 코스의 초입에 있는 중군마을의 아름다운 벽화나, 마을을 끼고 있는 지리산 능선도 제대로 못 보고 앞만 보고 걸었다. 눈에 뵈는 게 없어서 경사가 있는 산길도 앞 친구의 등만 보고 따라 걸었다. 점점 이 코스를 선택한 나의 무모함이 사무쳐 왔지만, 묵묵히 걷는 친구들에게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
<중군마을 꼭대기에서 여명을 보고, 이후로 계속 산길을 올라갔다>
6시를 넘어서면서 사위가 점점 시야에 들어오면서 해가 떠오르는 기운이 느껴졌다. 잘 보이지도 않는 길을 긴장하면서 걸은 터라 다들 지쳐 보였다. 장항 마을로 가는 길에 발을 담글만한 계곡의 웅덩이를 만났는데 남은 거리가 많다며 지나쳤다. 그 후로 그런 계곡도 물 구경도 못했다. 햇빛은 점점 따가워지고 마을길은 시멘트 길에 그늘도 거의 없었다. 선두에 나선 친구들과 후미에 따라가는 친구들 사이에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둘레길이라 경사가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산길은 돌투성이에 오르락내리락 하느라 숨이 찼다.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 길을 걷는 내내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혼자 왔다는 남자분과 한동안 동행한 것 빼고) 풍광이 빼어난 길이라고, 꼭 한 번 걸을만한 길이라고, 걷다보면 알게 되겠지 등등 나를 믿고 나섰다는 친구들에게 면목이 안 섰다. 우짤 것이야!
3. 유례없던 땡볕을 견디게 해준 친구들의 활약
올해의 체육활동으로 걷는 친구가 선두에 나섰다. 공지가 올라온 후부터 버스예약 일정을 공유하고 예약 앱도 알려주고 걷기에 필요한 준비물도 꼼꼼하게 리스트업해 준 친구였다. 길을 알려주는 GPS를 켜서 내내 앞서서 진두지휘했다. 앞서서 걸으며 오르막과 내리막의 사정을 알려주는가 하면 거의 다 왔다는 등산길의 공식 농담까지 적절히 섞어가며 인도했다.
태백 산골에서 다진 체력으로 나선 친구는 공교롭게도 걷기 며칠 전에 감기에 걸렸단다. 일행에 피해가 될까봐 포기할까 망설이다 결국엔 나섰다는데, 아침 먹을 때 보니 진통제까지 먹는 지경이었다. 그런 컨디션으로 선두에 함께 가면서 걷기에 초보인 두 친구의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 주었다.
걷기 초보인 두 친구는 내내 선두 그룹에서 함께 걸었다. 이번 생에 처음일 20키로 걷기에 마음을 내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내내 먼저 나서서 걸었다. 나중에 들었는데 이번 걷기를 위해서 문탁 위로 광교산 둘레를 걸으며 기초 체력을 다졌는가 하면, 밤마다 탄천을 걸으며 걷기에 익숙한 몸을 만들었단다. 공동체에서 오랫동안 보아왔던 친구들의 또 다른 면모였다.
<선두에서 이끌어주는 친구를 따라 꾸준히 걷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보며 찍었다>
후미에 걸었던 친구들 중에서 한 친구는 주중에 회사에서 야근을 밥 먹듯 했다. 그 와중에 이번 걷기를 신청해 놓고 갈 수 있을까 내내 걱정했다. 막상 둘레길에 나서서는 너무 좋다고 감탄사를 연발해서 나를 안심시켰다. 걸으면서 바뀌는 풍경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더니 어느 쯤에서는 자신은 그냥 여기 살아야겠다고 너스레까지 떨었다. 남은 체력이 바닥을 보이던 등구재 쉼터에서 막걸리 회복제에 깻잎전 추가로 우리의 기운을 북돋웠다.
<등구령쉼터의 막걸리와 냉커피와 구절초 식혜 그리고 깻잎전>
또 한 친구는 예전에 나와 등산동아리도 함께 했던 친구인데, 백두대간을 섭렵하고 안나푸르나 트래킹도 해서 걷기에 풍부한 경험이 있었다. 이제는 예전 같지 않은 체력을 가누며 후미에서 함께 걸었다. 중간 중간 쉬어 가는 길목에서 먹어야 하는 필수 간식 오이를 푸짐하게 싸와서 일일이 나누었고, 더운 날씨에 김치볶음밥이 안 상하더라는 자기 말을 믿고 싸온 다른 친구의 도시락을 순식간에 해치우는 신공을 발휘해서 우리를 웃겼다.
10년 전에 1박2일로 이 코스를 걸었던 친구와 또 다른 친구는 후미에서 천천히 풍경을 즐기며 걷는 축이었다. 그들 덕에 장항마을 당산나무 밑에 자리한 벤치에서 지리산 능선의 풍만함을 만끽했고, 길섶에 지천으로 피어있던 보스턴 고사리의 품격을 즐겼다. 집에서는 비들비들 시들고 말았는데 지리산 자락에서 이렇게 싱싱하다며 좋아했다. 창원마을로 내려오던 길에 무궁화 군락지를 발견하고는 감탄했다. 도심에서는 진딧물에 시달리며 억지로 피던 꽃들이 여기서는 저절로 피어나는 자태가 너무 아름답다고 했다. 그들의 심미안에 후미에서 함께 걸었던 나도 그것들을 누렸다. 지리산의 명성에 기대어 무턱대고 나선 길을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하며 걷는 친구들 덕분에 8월 말의 유례없던 그 땡볕도 견딜 만 했다. 혼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우리가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한 걷기였다.
4. 무모한 도전, 그리고 ‘우리’
13.8키로 지점 등구령 쉼터에서였다. 택시를 부르면 쉼터까지 온다는 정보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 후미의 친구들에게 택시를 타고 인월 터미널로 먼저 가면 어떨지 물었다. 마저 걷겠다는 친구들은 나서는 채비를 서둘렀다. 여기서 멈추기는 아쉽다는 마음을 떨칠 수 없었던 우리는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다. 선두팀은 제 페이스대로 끝까지 걷겠다는 뜻을 남기고 떠났다. 쉼터는 해발 650 미터 등구재를 넘기 전에 있었고, 등구재는 아홉 구비를 올라야 넘을 수 있는 고개였다. 햇살은 점점 더 내리쬐고 숨이 턱턱 차는 길이었다. 이 길의 명소 포토존이라는 하늘길까지는 갔으면 했는데 고개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지리산 둘레길 3코스의 명소 하늘길, 완주점 3키로 정도 남았을 때 나 혼자 통과, 포토: 무사가 찍음>
남은 체력을 바투어 16키로 지점 창원 마을에 도착했다. 후미의 친구들은 여기까지 걷는 것으로 충분하니 택시를 불러서 인월 터미널로 먼저 가기로 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명색이 프로그램 인솔자로서 택시로 마무리하기는 아무래도 체면이 안 섰다. 발바닥이 화끈거리고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끝까지 걷기로 하고 친구들과 헤어졌다.
마을길을 지나고 임도로 들어서면서 지리산의 능선을 따라 탁 트인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곁눈으로만 보았다. 친구들 속에서는 몰랐던 무서움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혼자 걷는 지리산 자락의 둘레길이 너무 조용했다. 그동안 꽤 많은 길을 걸었는데 이렇게 깊은 산 속은 용인에서 걸었던 김대건 길 이후 처음이었다. 섬짓한 기운에 온 몸이 긴장되었다. 산길로 접어들자 발밑에 돌들까지 들쑥날쑥 험난했다. 모퉁이를 도는데 뭔가 움직이는 게 심장이 쫄깃해졌다. 길가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흔들렸던 거였다. 이제는 풍경이고 자시고 냅다 걷기만 했다. 오르락내리락 경사가 제법 되었는데 숨을 돌릴 처지가 아니었다. 걸음아 날 살려라 발에 모터가 달린 만화주인공의 심정이었다. 금계까지 500미터가 남았다는 둘레길 표지목을 지날 때 선두로 갔던 친구가 전화를 했다. 완주지점에 도착했는데 어디쯤이냐고 했다. 내처 걸어서 친구들을 만나고 나니 그들을 고생시킨 무모함이 무색해서 완주의 뿌듯함을 느낄 여력도 없었다. 사고 없이 무사하게 끝낸 게 고마워서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인월 터미널 앞 치킨집 뒤풀이에서 고생은 했지만 좋았다는 소감에 주책없이 헤벌레 해졌지만.
<3코스 완주 지점의 둘레길 표지목, 금계 0 키로미터가 보인다. 한 친구는 이 컷을 완주 증거로 친구에게 보냈다고 함>
8월 말이니 더위도 한 풀 꺾이지 않을까, 둘레길이라는데 뭐 그렇게 험할까, 유튜브로 보니 그늘도 제법 되고 계곡을 따라 물소리도 나던 걸 등등 섣부른 예측은 모두 빗나갔다. 등구령 쉼터에서 주인아주머니께 오는 길에 아무도 못 봤다고 했더니, 봄가을에 많이 걷는 길이라고 하면서 이 더위에 누가 걷느냐는 반문은 꿀꺽 삼키는 표정이었다. 검색 화면에서 보았던 지리산에 제일 빼어나다던 풍광은 안중에 없었다. 산자락 사이의 시멘트 길을 묵묵히 걷는 친구들의 등으로 하염없이 쏟아지던 햇살의 기억은 차고 넘치는데 말이다. 이보다 더 무모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않을 도전이었기에, ‘우리’의 열기 찼던 팀웍이 있었기에 해낸 도전이었다고 감히 자부하고 싶다. 걷기 좋은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와 다시 뭉쳐 나서 볼까나. 이번에는 또 어디로 걸어볼까요^^?
글_기린(문탁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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