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은퇴한 적이 없다!
안상헌(감이당)
‘나의 은퇴이야기’를 주제로 연재를 하려하는데... 선생님도 글을 써 주실 수 있죠? / 어~ 난 은퇴한 적이 없는데... / 바로 그걸 써 주시면 좋겠네요. (중략) / 알겠습니다~
‘나의 은퇴이야기’라는 주제로 글을 쓰게 된 배경이다. 참고로 나는 67년생으로 현재 59세, 내년이면 환갑이다. 꽤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 만으로 60세, 62세, 65세를 기점으로 은퇴하는 기준에 미치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정년을 보장받는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기에 엄밀하게 말하면 ‘은퇴’라는 말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고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 은퇴자들에게 주제넘은 일이 될 수도 있겠다. 나이도 덜된 사람이, 정년 보장을 받은 적도 없는 주제에 “네가 은퇴라는 것을 알아?”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글을 쓴다.
나는 20대 후반에 이미 은퇴(?)했다.
20대 후반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나는 추천서 두 장을 받았다. 한 장은 교정직 7급 공무원 추천서이고, 다른 하나는 지방 은행 신입사원 추천서이다. 두 추천서 모두 원서 내고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면 거의 입직이 보장된 추천서였다. 당시에는 정규직/비정규직 구분이 없었고, 지금으로 치면 당연히 정년이 보장된 수준의 입직 기회였다. 실제로 순번상 내 뒤의 분들이 모두 이 추천서로 입직했다. 나도 원했다면 어느 한 곳에 취업했을 것이고 20대 후반, 나의 사회생활은 두 곳 중 어느 한 곳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나는 별 고민없이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의논한 것도 아니고, 지도교수와 상의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혼자 생각하고 결정했다. 나는 이 길보다는 대학원에 가고 싶었다. 다만 곁에 있던 친구가 ‘대학교수’가 되고 싶냐고 물었고, “서울대도 아니고 미국유학도 아닌 대학원을 나와서 힘들텐데!”라는 걱정을 해준 친구는 있었다. “나도 알고 있어!”라고 대답했고 그 친구도 별말 없었다. 그때 나는 왜 이 길을 선택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많은 계산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단지 ‘좀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나에게 분명한 이유이다. 먹고 사는 건 어떻게 되겠지만, 지금 이 정도의 앎으로 세상에서 무엇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 선택한 진로였다. 대학에서 공부해보니 고등학교 때까지의 요약 편집된 책보다는 훨씬 재미가 있었고, 학회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이런저런 다양한 책을 읽는 재미도 참 좋았다. 이렇게 공부하다 보면 “세상에 대해 나도 이제 좀 알겠어”라는 말을 할 정도는 곧 될 줄 알았다.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던 대학원 7년
운이 좋으면 대학교수라는 안정되고 명망있는 직업을 갖게 될 수도 있었겠지만, 처음부터 그 목표를 가질 만큼 나는 현실에 둔감하지는 않았다. 가방끈이 길어지면 공부는 어느정도 되겠지만, 그것이 안정된 직업과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미래가 불안했지만, 나는 석사과정 2년, 바로 이어 박사과정 5년, 총 7년 동안 다른 진로 선택에 대한 고민없이 온전히 대학원 생활에 집중했다. 거의 매일 출근했던 연구실도 좋았고, 대학원에서 새롭게 만난 선후배들과의 공부와 인간관계도 참 좋았다. 모든 과정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매 순간이 내 삶의 소중한 과정이었다. 당연히 이 인연들이 졸업 후 10년 이상 내게 가장 소중한 지적자원이자 인간관계의 중심이 되었다. 이후 나의 공부와 돈벌이는 모두 이들과 함께 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당시에도 전공 단위별로 폐쇄적인 공간에 갇혀있어서는 공부가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자유롭게 토론하고 연구할 수 있는 자율적인 공간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이 공간의 윤리이자 지향점으로 ‘집단창작의 리얼리즘’이라는 비전을 공유했다. 우리는 함께 읽은 영어 서적을 번역하여 출간하기도 하고, 집단 토론과 창작의 결과물인 학술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당시 진보적인 교육학이론의 대표격이었던 브라질 출신의 교육학자인 파울로 프레이리의 저작들과 『청년의 사회사』라는 책을 번역한 것, 그리고 『신문의 교육론 비판』이라는 책을 출간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과정과 함께 나는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석사, 박사학위논문의 주제는 학교교육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학교교육의 한계와 대안을 모색한 사회교육&평생교육이었다. 또한 학위논문의 중요한 이론적 배경은 ‘학습사회(Learning Society)’였기에, 어쩌면 지금 내가 속한 감이당 공동체 활동의 씨앗이 이때 뿌려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나는 ‘사람은 배운 대로 산다!’라는 말을 믿는다. 이렇게 나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을 보냈다.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연구실 생활과 공부, 그때 연구실 후배를 만나 결혼도 했다. 그리고 아들 하나 낳고 기르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아들과는 이제 머지않아 대학 졸업을 할 즈음해서 서로 독립된 삶을 살아갈 합의를 해 놓은 상황이다. 내 삶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배운 대로 살아보기(1) : 대학 강의&연구 전담 교수 4년
박사과정 2년 차부터 대학 강의를 시작했다. ‘보따리장수’라 불리긴 했지만, 당시만 해도 강의할 곳은 많았다. 나도 혈기 왕성했던 시절이라 대학생들이 가득 찬 강의실과 캠퍼스에서 이들과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매우 재미있었다. 학기 중에는 열심히 강의하고 방학 때는 논문 1편 정도 쓰는 계획으로 한해 한해를 보냈다. 이때부터는 경제적으로 독립도 가능했다. 교사가 되려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직 과정과 교육학 전공 수업을 주로 담당했기에 ‘우리의 지적 윤리적 수준이 곧 우리 교육의 수준이 될 것이다.’는 소신으로 배우고 가르쳤다. 몇몇 학생들이 현장 학교에 교사로 진출했다. 한 번씩 전해오는 교직 진출 소식을 들을 때면 ‘참 보람있는 일을 내가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박사학위를 마치고는 인근의 한 대학에 정년이 보장되는 정규직 교수는 아니었지만, 연구실이 있는 교수 생활도 몇 년 했었다. 4년의 기간 동안 젊은 교육학 전공 교수라는 이유로 학교 내부의 일과 대학 전체의 틀을 바꾸는 기획단에도 자주 불려 다녔다. 이런저런 지원정책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나름의 성과도 맛보았다. 무엇보다 대학이라는 조직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관해 내부를 살펴볼 기회가 있어 좋았고, 대외적으로 교육부를 비롯한 이런저런 유관 기관과 연계될 기회를 얻은 것도 당시 나의 존재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눈코 뜰 겨를 없이 바빴지만 그만큼 돈도 벌고, 사람도 많이 만나고, 내가 속한 조직과 세상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고, 관여하는 바도 많아져 “교육학 공부를 더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정년이 보장되는 교수는 못해 봤지만 내용적으로는 별로 아쉬움이 없었다.
배운 대로 살아보기(2) : 대학입학사정관&연구원 10년
교육학을 공부한 덕에 내가 했던 두 번째 활동은 대학 입학사정관 활동이다. 내게 대학 입학사정관은 단순한 직업적 의미는 아니었다. 대학원 진학 이후 내가 속해 있었던 모임을 이끈 선생님이 참여정부시절 교육혁신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교육개혁의 키로 제안하신 것이 입학사정관제의 도입이었다. MB정권으로 바뀌긴 했지만, 입학사정관제는 새로운 교육정책으로 채택되었다. 1998년 당시 이 제도가 조금씩 확산되고 있을 즈음, 선생님께서 “네가 한번 현장으로 나가서 사정관 일을 해보는 게 어떨까?”라고 제안하셨고 마침 기회가 있어 시작한 일이다. 당시 나로서는 입학사정관제의 배경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또 우리나라 교육 문제의 핵심에 대학선발제도가 있고 그 문제들을 ‘입학사정관제’라는 새로운 제도도 풀어갈 수 있겠다는 나름의 소신이 있었기에 흔쾌히 현장으로 나갔다. 제도 도입 초기라 그만큼 할 일이 많았고, 사전에 이론적으로 논의해 온 그룹에 있었던 터라 전국 대학 입학사정관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교육현장과 대학 신입생 선발 현장 모두에서 기존틀이 조금씩 바뀌어 갔고, 이렇게 가면 조만간 나름의 변화와 성과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이렇게 몇 년간 일도 참 많이 했고, 전국적으로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활동이 많았던 만큼 돈도 많이 벌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으로 바뀔 즈음, 입학사정관제도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엇나가기 시작했다. 제도의 명맥은 유지했지만, 입학사정관제는 기존의 모순을 극복한 새로운 대학입시의 틀이 되지 못했고, 그저 하나의 성가신 제도로 인식되었다. 대학 입학사정관들은 각 대학 ‘입학과’의 일부 직원에 불과한 신분이 되어갔다. 더 이상 내가 있을 이유도, 있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마침 불거진 인사 문제로 나는 사표를 냈다. 40대 후반의 가장으로서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과거에 활동했던 연구실에서 예전에 하던 교육학 공부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의 교육시민운동 단체에서 같이 일할 기회가 생겼다. 그분들도 내가 어떤 공부를 했고, 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아는 분들이라 어렵지 않게 입직이 결정되었다. 오랜 기간 공부하고 활동했던 대학을 떠나 시민사회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현장에서 일해 보는 것도 참 의미 있겠다 싶었다. 거의 50년 대구에서 나고 배우고 가르치고 일했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혼자 옮겨 왔다. 하지만 이 일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결이 맞지 않아 1년 남짓 활동한 후, 서울의 모대학에 있는 교육부정책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 옮길 때는 매년 계약은 하겠지만 대략 10년 정도 예상하고 결정한 자리였다. “10년 후면 은퇴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에서 결정했지만, 이 자리는 또 1년 후 그만두게 되었다.
기대가 컸고, 활동도 많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큰 성과 없이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까지 대략 10년을 이렇게 보냈다. 성공보다는 실패에 가깝다. 그래도 위안을 삼아보자면, 책상에 앉아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세상을 제대로 겪어가면서 공부하고 일을 해 봤다’는 것이다. 이 활동은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다. 겪은 것이 새롭고 많은 만큼 비록 실패했지만, 그 실패는 나에게 어떤 힘을 주는 듯했다. 이후에는 전혀 다른 자리에 있게 되었지만, 이제 세상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또 배우며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안겨준 소중한 기간이었다.
다시 배우기 : 남산강학원&감이당 10년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가족과는 떨어져 주중을 보냈다. 저녁 시간을 혼자 보내게 되면서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수유너머’라는 연구실이 내 일상의 아주 작은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용산 사무실 근처, 걸어서 30분 거리, 해방촌에 있었던 ‘수유너머R’이라는 연구실에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저녁 세미나에 참여했다. 이 인연으로 남산을 넘어가면 ‘감이당’이란 곳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감이당 저녁 강의나 세미나에 조금씩 참여하게 되었다. 첫 강의가 고미숙 선생님의 ‘몸과 우주의 정치경제학’이었다. 당시 나로서는 몸과 우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었기에 ‘이걸 이렇게도 연결시킬 수 있나?’라는 호기심에 첫걸음을 내딛었다. 이렇게 감이당에 처음 오게 된 게 2015년 봄이니, 딱 10년이 흘렀다.
정말 낯설고 새로운 공간이었지만 흥미로웠고 많은 공부를 했다. 공자, 니체, 루쉰, 푸코, 소세키, 주역, 동의보감, 노자, 장자 등등. 모든 공부가 재미있었다. 대중들과 함께 책 읽고, 산책하고, 청소하고, 밥 먹고, 글쓰고 등등. 초반 3년 정도 내가 했던 모든 활동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이전에도 공부란 걸 했지만, 전혀 결이 다른 공부였다. 이걸 위해 내가 지금까지 살았구나 싶었다! 이게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였고, 이것이 내가 원했던 ‘교육학’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감이당 이전의 배움과 활동에 감사하면서, 동시에 나는 기꺼이 새로운 공부와 활동으로 옮겨갔다. 이제 감이당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고, 새로 배운 것으로 공저 혹은 단독으로 책을 내기도 했다.
영원히 은퇴하지 않는 삶은 가능하다.
나는 이제 ‘감이당 공부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이곳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주제로 세미나도 독자적으로 진행하고, 대중지성의 한 축인 토요 주역스쿨의 담임이기도 하다. 이제 내 일상의 중심은 ‘감이당 공동체’이다. 이쯤 되면 그 원인을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이 공동체를 떠날 때가 되었다. 나도 알 수 없는,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겪기도 하는 ‘10년 주기설’이 작동할 때가 된 것이다. 10년 잘 지냈으니 내가 싫증 나든, 공동체에서 나를 싫증 내든 뭔가 큰 변화가 있을 법도 하다. 이제 나이가 있으니 조금씩 공부가 힘이 들고, 또 2년 전 목과 허리 디스크까지 있어 실제로 ‘공부를 그만두어야 하나!’라는 생각도 진지하게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번에 나의 결론은 “이제 절대 그만두지 않는다!”이다. 앞으로 내가 이 공부공동체에서 공부를 잘할지, 생활을 잘할지, 건강이 어떻게 될지, 가족은 계속 나의 이 선택을 동의할지 등등. 많은 변수가 있겠지만 이제 과거처럼 이 활동을 때려치우지 않을 것이다. 대신 “나는 이제 이 자리에서 날로 새로워질 것이다!”라는 마음을 먹었다.
내년이면 환갑이다. 모든 걸 그만두고 시골에 가서, 텃밭 일구면서, 가족을 돌보고, 가끔 친구들을 만나고, 한 번씩 여행다니는 삶을 살 수도 있다. 흔히 말하는 은퇴자의 삶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나는 ‘감이당 공부공동체’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왜? 이곳에 가면 함께 공부하고 이야기하고 놀 수 있는 친구가 있고, 함께 먹을 밥이 있고, 함께 먹을 간식이 있기에 나는 이 공간을 떠날 수 없다.
일반적이지 않은 삶을 살았다. 특히 이런 남편과 아빠를 가진 입장에서는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 이런 나의 삶을 아내는 조금 일찍 아들은 최근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뭘 하고 사는지 이제 좀 알겠다!?”는 아들의 말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이제 나는 공부와 이야기와 친구와 밥과 간식이 있는 공동체로 한결 가볍게 출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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