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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은퇴 이야기

[나의 은퇴 이야기] 마땅한 삶의 길로 한 발씩 내딛기

by 북드라망 2025. 4. 28.

마땅한 삶의 길로 한 발씩 내딛기


권순정(사이재)


1. 은퇴를 했다

“권순정 선생님, 명예퇴직을 축하합니다.” 


2025년 1월 10일, 교감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청천벽력’같은 메시지였다. 그날은 이미 제주도에 가 있던 사이재 식구들과 합류한 제주 여행의 첫날이었다. 하필 애써 고른 잠녀식당이라는 맛집에서 점심을 막 시켜 놓은 터였다. 나의 명예퇴직을 바란 사이재 식구들은 환호하며 축하해 주었지만 문자를 확인한 순간, 나는 숨이 멎고 가슴이 조여드는 듯한 압박감으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온 몸에 힘이 쫙 빠졌다. 다들 맛있게 밥을 먹는데 나는 밥알이 목구멍에 걸려 잘 넘어가지 않았다. 일주일간의 제주 여행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이 감정이 대체 뭔지 그림자처럼 계속 나를 따라다니며 마른 침을 삼키게 했다. 퇴직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막상 퇴직이 되었을 때 내 마음이 어떨까에 대해서는 한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주변에서 퇴직한 선생님들을 많이 보지도 못했을뿐더러 대부분은 정년 퇴직이었기 때문에 나와는 처지가 달랐다. 전해 듣기로는 명퇴한 선생님들도 다들 천형(天刑)에서 풀려난 듯 해방감을 느낀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점점 침잠하는 것일까?


5년 전, 유방암 치료를 마치고 사이재에서 공부를 시작한 후부터  명예퇴직을 고민했다.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을 보며 공부하는 존재, 호모 쿵푸스를 비전으로 삼아 앞으로의 삶을 꾸려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병 휴직이 끝나갈 무렵 명예퇴직서를 냈지만 그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이재 근처로 이사를 하고 지하철로 출퇴근이 가장 수월한 고양시에 있는 지축중학교라는 곳으로 복직과 동시에 전출을 했다. 지축역 부근에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개교한 학교라 깨끗한 신축 건물에 젊은 선생님들도 유난히 많아 내가 거의 원로교사급인 학교였다. 지금껏 보아온 신도시 아이들이 그렇듯 이 학교 아이들도 예의바르고 온순하며 학업에 대한 열의가 커서 근무 환경이 매우 좋은 축에 속했다. 내가 맡은 업무도 나의 주 관심사인 독서교육이라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지축을 울리는 북소리’라는, 학생의 자발성에 기초한 독서 교육 프로그램 운영으로 인정도 받았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한 선생님들도 생겨서 3년 휴직 후의 학교생활이 더없이 즐거웠다. 이 정도면 딱 좋은데 대체 나는 왜 명예퇴직을 선택한 걸까?

 

막상 퇴직이 결정되고 나니 내가 왜 이렇게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 걸까 의구심이 마구 일었다. 매달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 받으면서도 충분히 공부하는 삶을 살아갈 수도 있는데 대체 왜? 맞은편에 앉은 기간제 선생님이 그 어렵다는 임용고사를 피가 마르도록 힘겹게 치르는 과정을 지켜보니 누군가는 저리 기를 쓰고 갖고 싶은 자리인데 나는 왜 이렇게 쉽게 박차고 나가는 것인가 아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오랜 시간 퇴직을 마음먹고 있었고 막상 퇴직 신청서를 쓸 때는 별 고민이 없었다. 퇴직이 되어도 좋고 안되어도 즐겁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 터였고, 그땐 어떤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다 좋은 거니까 이때가 퇴직 신청을 하기에는 최적기라고 생각했다. 교장선생님께 퇴직신청서에 사인을 받으러 가서도 자신감 있고 당당하게 그렇게 말씀드렸다. “박수 칠 때 떠나라.”라는 말도 있고,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는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하는 시구도 떠올리며 나의 퇴직 신청을 옳은 선택으로 밀고 나갔다. 이미 주변 선생님들한테도 공공연하게 퇴직할거라고 말해 놓았다. 실은 그래야 퇴직 신청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상 퇴직 기간이 왔을 때 내가 한 말이 빈 말이 되지 않도록 내 말에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스스로 등을 떠밀어 여기까지 온 것임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아쉬움이 남는 것은 내가 만들고 키워온 ‘지축을 울리는 북소리’였다. 첫 해에는 함께 책을 읽는 즐거움을 경험하면 좋겠다는 소박한 목표를 세우고, 함께 책을 읽을 친구들을 모아 책을 정해오면 사주고 읽도록 했다. 연말에는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들을 모두 모아 어떻게 책을 읽었는지 프리젠테이션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함께 한 아이들도 나도 뿌듯했다. 이어 작년에는 120여명의 아이들과 학부모님, 그리고 선생님들과 함께 고미숙 선생님의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라는 책을 읽고 고미숙 선생님의 초청 강연회까지 열고나니 더 욕심이 생겼다. 만약 한 해 더 한다면 최재천 선생님의 책 읽기로 ‘지축을 울리는 북소리’ 프로그램을 하고 싶었다. 퇴직 신청서를 쓰기 전에 최재천 선생님을 섭외해 놓고, 만약 섭외가 이뤄진다면 퇴직 신청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날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퇴직에의 충동보다는 크지 않았던지 실행은 하지 못했다. 그래도 가끔씩은 만약 내가 학교 있었다면 이것만은 멋지게 잘해낼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불쑥불쑥 올라오곤 한다.

 

 


2. 결단 앞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기 힘들 때 늘 떠올리게 되는 시가 있다. 박노해의 <결단 앞에서>. 평소에는 생각이 많아야 하지만 결단 앞에서는 단순해야 하며, 옳은 결단은 언제나 내어주는 쪽이라는 내용이다. 옳은 결단은 내어주는 쪽이라는 말에 마음이 간다. 하지만 시인도 안다.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나면 역풍이 불 수도 있고, 그래서 결단을 후회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도 그랬다. 분명 내가 가진 안정적 지위, 경제력, 커리어를 모두 내려놓는 선택이라는 점에서 분명 내어주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런데 옳은 선택인지는 아직 확신이 서질 않는다. 절망에 빠진 내 마음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연인과 더 만날 것인가, 이제 그만 헤어질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막상 헤어지고 났을 때, 조금 더 만날 수도 있는데 하는 미련과 후회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 나를 구성하고 있던 정체성의 한 무더기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마음 한 구석에 퇴직이 안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는지 신청서를 냈을 때는 감정의 동요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내가 더 놀랐다. 그야말로 역풍이 밀어닥쳤다. 마음 한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교사로 더 살고 싶었던 충동이 드디어 먹이를 물고 사납게 으르렁 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되돌리고 싶었다. 검색창에 ‘명퇴철회 방법’이라는 검색어를 넣어 보기도 했을 정도로.


30년 가까이 몸담았던 직장을 떠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아니 그보다 먼저 나에게 직장이 이렇게 큰 의미였었나? 직장을 다닐 땐 몰랐다. 다들 자유인을 부러워하며(지금 다들 나를 부러워하듯이) “이놈의 직장, 언제 때려칠까!”를 입에 달고 사는데 이런 후폭풍이 몰아치다니 당혹스러웠다. 그 끄트머리에는 이젠 정말 나 홀로 서야할 때가 왔구나하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방암을 선고받을 때보다 더 큰 두려움이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황무지 한 가운데 서 있는 황량함, 매달린 절벽에서 두 손을 놓은 순간의 까마득함이 이런 느낌일까? 이제 직장이라는 든든한 배경에 기대지 않고 온전히 홀로 서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졌다. 돌아갈 수 있는 다리도 완전히 불살라 버렸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가슴 한 켠이 서늘해 지며 찬바람이 훅 뚫고 지나갔다. 나를 내맡기던 의지처가 완전히 사라졌다. 니체의 말대로 우리는 직장이나 학문 뒤에 나를 숨기며 진정으로 대면해야할 나와의 만남을 끊임없이 지연시킨다. 직장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으면서 그게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젠 정말 홀로서야 할 때가 왔다.


결단의 후폭풍은 다른 데서도 불어왔다. 갑자기 부모님과 오빠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족들만 퇴직 사실을 모르는 상황이다. 교직에 있는 큰오빠한테 전화가 올 때마다 가슴이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먼저 알고 연락하는 것은 아닐까? 이럴 줄 알았으면 퇴직 신청하기 전에 먼저 상의를 할 걸 그랬나? 그땐 어차피 될지 안될 지도 모르는데 굳이 먼저 말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퇴직이 되고나니 말문이 막혀버렸다. 몇 날 며칠 망설인 끝에 일단 오빠들한테는 퇴직 사실을 털어놨다. 큰오빠는 직장 다니면서 공부하면 되지 왜 그리 구질구질하게 살려고 하느냐라며 못내 아쉬워했고, 작은 오빠는 나의 자산규모를 가늠해보더니 그 정도면 충분히 살 수 있겠다며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다. 일단 여기까지는 무사 통과. 문제는 부모님이다. 내가 이렇게 번듯하게 직장을 갖고 살 수 있었던 건 어려운 형편에 대학 공부까지 시켜준 부모님 덕분이기에 이렇게 덜컥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말씀드리려니 왠지 마음 깊은 곳에서 죄송스러움이 몰려왔다. 2년 전에 퇴직 신청서를 냈을 때, 엄마는 그래도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되지 않냐며 아쉬워 하셨고, 그 후에도 두어 번 이 말씀을 반복하셨다. 아버지는 뭐라고 하실까? 잘 다니던 직장 때려치고 어쩌려고 그랬냐면서 호통 치지 않을까? 어떻게 말씀드려야 안심하실까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그려보았다. 결국, 몇 주가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용기를 끌어올려 말씀드렸다. 그런데 웬걸? 내 예상과는 달리 엄마는 담담하게 사회적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우려감을 표한 후에 그래도 딸이 좋다면 그리 해야지라며 퇴직금 사기 당한 사람들을 많이 봤다면서 퇴직금 관리를 잘 하라고 당부하셨다. 이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아버지도 엄마 말에 동감을 표시하시는 것으로 상황 종료. 후련했다. 큰 산을 넘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명퇴 사실에 대해 말을 못한 것일까? 내내 이 질문이 나를 따라다녔다. 가족 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이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왜? 나조차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젠 정말 인정할 수밖엔 없다는 마음이 들어서이다. 내 안에 꽁꽁 숨겨 놓으면 마치 없는 사실이라도 될 것처럼 말이다. 명퇴라는 화제가 등장할 때마다 그 말들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의도적으로 말머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마음속에 뱉어버리고 싶은 돌덩이가 그득 들어가 앉아 있는데도 이걸 꺼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나 자신이 싫었다. 주변에서 연봉과 연말정산 이야기가 오갈 땐 마음이 쓰렸다. 하필 내가 교직에 들어올 때 연금법이 바뀌어 10년 후부터 연금을 받는다. 게다가 월 100만원이 넘는 주택부금이 아직 2년이나 남아있다. 2년만 더 일을 하고 퇴직할걸 그랬다는 후회감 들기도 했다. 내 경제 상황에 대해 꼼꼼하게 대차대조표까지 만들었다면 명퇴는 꿈도 꾸지 못했겠다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이 났다. 사치를 부리지는 않았지만 돈을 쓰고 싶을 땐 걱정 없이 카드를 긁었는데 이젠 계산기부터 열심히 두드리는 모습을 상상하니 내 선택에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아, 나는 아직도 자본주의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3. 가장 아름다운 풍경
<결단 앞에서>의 마지막을 시인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진리는 늘 복잡한 현실을 품고 가장 단순한 얼굴로 걸어가는 것이니 얼마나 단순하게 잘 견디느냐가 결단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라고. 결단으로 인해 복잡한 후폭풍에 휩싸이더라도 가장 단순한 얼굴로 걸어가야 한단다. 그래야 결단은 성공을 이룰 수 있다. 여기서 성공을 거둔다는 것이 뭘까? 그 결단을 필연으로 인식하고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최선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상태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향해야할 그 단순함이란 뭘까? 진리의 모습이기도 한 그 단순함 말이다. 내가 견지해야 할 단순함이란 내가 명퇴를 결심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것 하나만을 보고 걷다보면 내 마음에 불어 닥친 후폭풍들은 어느새 잠잠해져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내가 명퇴를 한 이유는 너무나도 단순하다. 몇 년 전에는 국어교사로서의 내 직업적 커리어를 쌓기 위해 감이당에 와서 글쓰기를 배웠던 것과는 달리 유방암 치료를 받고 나서 다시 사이재로 공부를 하러 왔을 때는 오로지 나를 위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큰 병을 앓고 나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승진을 하기 위해 장학사 시험을 공부하거나 선생님들을 조직하여 연구회를 하던 직업적 삶을 떠나서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병은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말라고 나에게 주는 몸의 메시지임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다르게 살고 싶어졌다. 병 휴직 1년에 무급 연수 휴직 1년을 더 신청하여 사이재에서 공부하는 삶을 살았다. 함께 책을 읽고 나누며 공부하는 삶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몇 천 년을 건너와 나에게 전해지는 고전의 파동과 접속하며 내가 가진 편견 하나를 내려놓을 때의 가벼움과 즐거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정규직의 삶을 벗어나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일을 그만두고 공부하는 삶으로의 전향, 내가 원했던 삶이 아닌가?

 

 


만약 내가 퇴직 신청서를 내던 날로 돌아간다면, 과연 나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종종 이런 질문이 떠오를 때마다 얻게 되는 답은 그땐 그게 최선이었다는 것이다. 백석 시인이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이란 시에서 읊은 것처럼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이며,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은 아닐까를 생각하게 된다. 이걸 운명이라 이름 한다면, 내가 아직 교직에 있었다면 내가 있을 그 자리에 있는 어떤 선생님에게도 그 자리에 있음이 그의 운명일 터, 이렇게 계속 거슬러서 올라가다 보면 백석의 말대로 내가 명예퇴직을 한 것은 내 뜻과 의지보다는 그것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나를 지금 여기에 이르게 한 것이리라. 장자식으로 말하면, ‘각득기의(各得其宜)’. 모든 존재에게는 각자에게 마땅한 삶의 길이 있다는 말이다. ‘마땅하다’의 뜻은 “그렇게 하거나 되는 것이 이치로 보아 옳다.”이다. 나는 그때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지금 이러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정한 이치였다. 그때 내가 명퇴를 하지 않는, 지금과는 다른 선택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들이 제자리, 즉 각자의 마땅한 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라 했던가!


백석처럼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았다. 명퇴가 확정되었을 때의 그 두려움과 심난함, 후회와 미련, 막막함같은 감정은 서서히 물러가고 이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화두가 밀려왔다. 남은 과제는 나에게 주어진 ‘마땅한 삶의 길’을 한 발씩 걸어 나가는 것이다. 물론 그 길은 내가 한 발 한 발 내딛어 가면서 만들어질 것이다. 언젠가 주역 에세이에서 내가 썼듯이 길(吉)과 흉(凶)이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길도 흉도 아닌 사태에 내던져졌을 때, 내가 이 길을 어떻게 걸어가느냐에 따라 길흉이 정해지는 법이다. 매일 아침 백팔 배를 하며 주문을 왼다. 내 선택을 옳은 선택으로 만들어 가자고. 아니다. 실은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바뀌었다. “지금 이 삶에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가끔 교직에 있는 친구들이 전화해서 묻는다. 퇴직한 이후의 삶은 어떠냐고. 내 답은 “글쎄, 아직 방학 중인 것 같아.^^”이다. 아직은 방학을 길게 하고 있는 느낌이다. 나에게는 방학이라는 완충지대가 있어서 어제까지 출근하다가 퇴직하고 오늘부터는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인지 방학이 계속 연장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지금 내가 학교에 있다면 뭘 하고 있을지 눈에 선할 때가 있다. 이제는 내 것이 아닌 삶에 아련해지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정말 끝났다는 실감이 들어 가슴이 시리기도 하지만, 그런 감정은 지금 당장 읽어야 할 책과 써야 할 에세이의 폭풍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잠깐 꿈을 꾸다 깬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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