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1963년 사이에 출생한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가 가시화되면서 ‘은퇴’에 대한 뉴스가 많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너무 적었습니다. 작년부터는 1964년생으로 필두로 한 2차 베이비부머(1964~1974년 출생자) 세대가 은퇴를 시작했습니다. 1천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은퇴를 시작한 이때, 우리는 어떤 은퇴를 ‘상상’할 수 있는지, 하고 싶은지, 이야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미 은퇴를 한, 은퇴를 앞둔, 아직 은퇴가 먼, 각양각색의 학인들이 자신의 은퇴 이야기를 나눕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은퇴 5년차에 접어 드신, 문탁네트워크 철학학교 ‘전교 1등’이자 ‘만능살림꾼’이신 가마솥 샘이 써주셨습니다.
야호! 은퇴닷! : 사회적 명함에서 내면의 명함으로
가마솥(문탁네트워크)
1.
누구든지 은퇴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정년을 몇 해 남긴 때부터는 구체적으로 고민하며 이것 저것 강의도 듣고, 공부도 하며 나름 의미있는 은퇴생활을 준비한다.
나는 반백이 되는 해에, 성산동에서 아이들을 함께 키웠던 사람들과 은퇴 후 공동체적 삶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마을의 적정 규모를 갖추기 위해 성산동 외에서도 사람들을 더 모으고 그들과 여러 마을들을 탐방하고 토론하며 함께 살 준비를 하였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지난한 과정 속에서 들고 나기를 반복하며 남은 스무 명이 드디어 터를 마련하고 각자의 형편에 따라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은퇴하기 3년 전이다. 나는 두 식구가 살기 충분한 크기로 집을 짓고, 은퇴 후 안정적인 인프라를 만들기 위해 주말마다 평창으로 차를 몰았다. 태양광을 설치하고, 데크를 깔고, 나무를 심고, 화단을 만들고, 낮은 울타리를 치고, 경계의 흙이 쏠리지 않게 토낭를 두르고 등등. 언제든 들어와 살 수 있는 공간으로 가꾸었다. 당분간 상주할 수는 없으니, 원격조종이 가능한 IOT도 설치하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그것은 나의 취미이기도 하였지만, 은퇴 준비를 한다는 마음에 힘든 줄 몰랐다.
어느 날, 읍내 만물가게에 들어가 작업할 물품들을 고르는데, 사장님이 묻는다. “얼마나 되었우?” “예?” “평창에 집지은 지 얼마나 되었냐구?” “아 예, 한 1년 쫌 넘었습니다.” “흠......보통 3~4년 가요.” “예?” “처음에 이사 와서 집 주변도 가꾸고, 큰 개도 키우고 닭도 키우고, 이것저것 심어 보기도 하고..... 한 3년은 그렇게 재미있게 지내요. 그러다가 문득 사람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면서 한 두 해 더 있다가 결국, 도시로 다시 나가더라고.”
정확했다. 한 3년쯤 지나니, 집주변 공간이 빠르게 모양을 갖춘다. 그와 비례해서 새로운 것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완성된 모습을 그려보며 실행할 때 맛보는 그런 감흥이 나올 만한 것들이 줄어들었다. 더욱이 각자의 집을 지으면서 드러나는 다양한 욕망의 충돌 때문에 처음 모였을 때의 사람들이 보여 주었던 ‘함께 살자’는 결기는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이들에게 함께 나누었던 공동체 정신 운운하며 ‘마을살기’를 독려하려는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는다. 왜? 힘들어서. 이 나이에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그럼 독자적으로 살아야 하는데, 만물가게 주인의 말처럼 평창에서의 삶을 구체화시킬수록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에 대하여 심도 있게 고려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멋진 풍광을 자랑하지만, 스콧 니어링처럼 강의하며 메이플 시럽을 만들 수도 없고, TV 속 자연인처럼 채집하며 살 수도 없는 곳이었다. 또 마당에서 작업한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뻑뻑한 손가락 관절들이 모두 ‘나 여기 있오’ 하고 알리는데, 농사? 원래 농사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귀농(歸農)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것이지, 도시사람이 한 번도 안 해본 농사를 은퇴 후에? 말도 안 되는 소리임을 농사를 지어보지 않고도 알게 되었다. 평창 가는 발길이 뜸해지면서, 나도 다른 집들처럼 세컨드 하우스로 평창집을 사용하게 되었다.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고 남 몰래 자부하였건만, 실행할 수 없으니 전혀 준비하지 않은 것과 같게 되었다. ‘남 몰래’ 답답한 상태가 되었다.
2.
인사철인데, 자기가 추천했노라고 생색내며 전화하는 놈들이 없다. 연임은 물 건너 간 것이다. 담당 후배에게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시쳇말로 ‘가오’ 빠지는 것, 조용히 내가 정리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랫배에서 무언가가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이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서 들어야 해? 이 놈들이 나를 이렇게 취급하는 거야?’ 하지만, 예우하며 직접 듣는다고 바뀔 것인가? 어떻게 통지하든, 어떤 이유로든, 계약해지는 본질적으로 누구나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며칠 전 한차례 책상을 가볍게 하였으니 별것 없지만, 마지막으로 컴퓨터 파일들을 정리하고 서랍을 정리했다. 시원 섭섭. 딱 그런 기분이다. 돈 버는 일에 내 시간을 저당 잡히지 않아도 되니 “야호! 이제야 해방이다!” 해야 하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헛헛한 기분이 올라온다. 필요한 사람들은 이미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데도 다시 볼 것 같지 않은 명함철을 버리지 못하고 박스에 담는 나를 발견한다. 뭐, 이 정도는 기념품으로 하지. 혹시 알어? 또 필요하게 될지...... 일일이 악수하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였지만, 많은 직원들이 아쉬워하며 배웅 나오는 것을 위안 삼아 나의 마지막 사무실을 나섰다. 2020년 12월 28일.
3.
식구들이 모두 모여 나의 은퇴 축하 파티를 열어 준다. 고맙다. 특히 은퇴를 주장해준 집사람이 더욱 고맙다. 하지만 박수치고 축하하는 식구들에 비해 정작 내 기분은 덤덤하다. 익숙한 것을 버리고 새로운 시간을 마주해야 해서 그런가?
한 놈은 매일 도서관에 간단다. 또 한 놈은 동네 근처 광교산, 청계산을 매일 올라 다니고. 특이하게도 한 놈은 정장을 입고 작은 방으로 출근을 한단다. 미친 놈. 은퇴를 하였어도 스스로 무언가에 매어 있어야 편한 것인지....... 산이 좋아서 산들을 찾아다니는 사람이면 몰라도, 죽으면 항상 누워있을 산인데, 왜 벌써 못가서 안달인지 정말 내키지 않는 은퇴생활이다. 헌데, 정작 나는 점점 소파에 앉아서 TV보는 시간이 늘고 있었다. 손흥민의 게임은 당일도 보고, 재방송도 보고, 하이라이트도 보면, 그의 EPL 모든 경기를 거의 외울 지경이었다. 소파에 앉던 자세도 점점 눕고 있었고, 그 시간에 비례해서 허리도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뉴스를 보며 “미친 놈들!”이라며 욕이 늘고 있었고, 조그만 일에도 벌컥 벌컥 화를 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반년을 그렇게 보냈다. 보다 못한 집사람이 “이제 그만 움직여 보시죠!” 한다.
마지막 은퇴의 변(辯)으로 “앞으로는 선택을 구하는 삶이 아닌, 내가 선택하는 삶으로 살겠다.”며 전직원에게 메일을 보내 놓은 나인데, 겨우 TV나 끼고 뒹굴거리면서 욕이나 하는 ‘노땅’이 되고 있는 것인가. 부끄러웠다. 어디든 일단 집을 나서는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집안을 뱅뱅 도는 나도 은퇴가 안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 ‘이제 그만 움직여 보자.’ 시작하려면 단절해야 했다. 앉은 채로 핸드폰을 꺼내서 ‘혹시 불러주지 않을까?’하는 마음과 관련된 밴드를 탈퇴하고, 카톡방을 나오고, 텔레그램 방들을 폭파하고 나서, 관련된 전화번호들을 모두 지웠다. 후~~~~
4.
한국 남자의 평균수명으로 85년을 산다고 보면, 앞으로 남은 25년을 뭐하고 살까? 늙지 않았다고 혹은 늙지 않겠다고 발버둥쳐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지혜로운 60대이라면 여기 저기 좋은 말을 해주고 다니면 좋겠지만, 그동안 쌓은 알량한 지식과 경험으로 추억을 먹고 사는 ‘꼰대’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무엇을 하고 살까?’가 아닌, ‘어떻게 살까?’라고 질문해야 죽을 때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려면 지난 30년 동안 했던 돈 벌기 위한 공부가 아닌, 사람 사는 것에 관련된 공부가 필요하다. 동네 인문학 공부모임인 ‘문탁’ 홈페이지를 열었다. 강의문은 그날 강사에게서 들으면 되지만, 세미나 발제문이나 후기들을 보니 장난이 아니다. 섣불리 세미나를 신청했다가는 나이 값도 못하고 밑천이 드러날까 두렵다. 일단 발제가 없고, 대여섯 번의 시간으로 끝나는 특강을 들어 본다. 서양철학으로는 스피노자 에티카, 동양 철학은 논어 특강이다. 서양철학은 만만치 않았다. 왠 주변 인물들이 그렇게 많이 등장하고 또 그들의 주장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개념어, 혹은 내가 짐작하는 의미로는 해석이 안되는 문장들이었다. 분명 우리말로 강의하는데, 반절도 이해 못하는 외국어를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의 뇌에서 철커덕 철커덕 해석되고 있는 단어를 강사는 속사포같은 속도로 쏘아댄다. 놀라울 뿐이다. 그렇다고 논어가 쉬운 것도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이 한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당시의 상황을 그려 주는데, 제나라가 어디 붙었더라? 누가 누구의 아들이라고요? 제환공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나......
5.
그래도 나는 한문 세대이다. 논어 후반부를 읽는 세미나를 신청하였다. 첫 시간. 대학생인 듯한데, 한문을 잘 몰라서 논어를 공부하면서 한자도 공부하려고 한다는 공부 취지를 말한다. 다행이다. 그래도 나는 한문을 제법 안다. 두번째 시간. 미리 나누어진 분량의 발제를 발표하게 되었다. 첫번째 발표자는 그 대학생이다. 으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자를 잘 모른다면서, 한 문장을 가지고 논어 어느 편에서는 이렇게 말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말하고 있고, 이에 대해 누구의 해석은 이렇고 다른 책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다. 자기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토론하고 싶다는 것이다. A4 용지 두 장에 반듯하게 작성해 왔는데, 그 정갈한 포맷하며 간간히 볼드체와 따옴표를 넣어가면서 정돈된 문장은..... 한자를 잘 모른다면서, 그것은 ‘반칙’이었다. 과장이후로 e-Mail 빼고는 문서 작성을 거의 하지 않았다. 작성된 문서(보고서)를 읽기만 하고 결재만 하였지, 실로 오랜만에 내가 작성해보는 나의 발제문은 내가 보아도 포맷도 엉망이고, 무엇보다도 내용도 그 문장에만 제한된 나의 뇌피셜을 잔뜩 늘어놓았으니...... 창피했다.
하! 군대 가서 치른 신병 신고식을 40년 만에 다시 치른 느낌이었다. 기분은 복잡 미묘한 혼돈 그 자체이었다. 창피함이 섞인 불쾌감과 수십 년 만에 느껴보는 열등감?이 주는 살아 있는 기분이 교차하였다. 그래. 선택은 나의 몫이다. 지금 덮어도 되고, 다시 뛰어도 된다. 두렵긴 하겠지만, 사회 초년생으로 출발할 때 가졌던 두려움과 기대의 떨림으로 인생 후반기 25년을 출발해 보기로 했다.
6.
‘문탁’ 철학학교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원전으로 읽는단다. 바로 이것이다! 싶었다. 나의 일상 ‘시간’ 속에서 안팎으로 달라진 나의 ‘존재(存在)’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때라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 제목도 ‘존재’와 ‘시간’이다. 책 제목으로 내용을 유추하다니, 순진하기도 하지. 무식하다는 것을 첫 장을 열면서 알아 차렸다. 분명히 한글로 번역된 책인데, ‘내가 한글을 깨친 지가 너무 오래되었나?’ 싶었다. 차라리 수학문제라면 며칠을 끙끙거려서라도 풀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은 몇 번을 읽어도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저자의 개념을 이해하려고 주 교재를 접고 보조 교재인 해설서들을 펼치면, 그 분들 간에 번역용어가 또 다르니 첩첩산중이 따로 없다. 이해가 충분하지 못하니 발제가 아니라 요약하는 수준으로 써서 올린다. 세미나원들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특히, 나에게 ‘전교 1등’이라고 별명을 붙여 주며 끝까지 공부하게 하였다. 가까운 곳에 공부할 수 있는 문탁이 있고, 고마운 학인(學人)들이 있어서 나에겐 큰 행운이었다.
그래서, 나를 찾는데 하이데거가 도움이 되었나? 그럴 리가! 한 술 밥에 배부를 수가 있나? 현존재라고 이름 지어진 인간의 존재의 방식, 그 구조 속에서 멀찍이 나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내 안에서만 밖을 보았는데, 밖에서 다른 눈으로 나를 바라 볼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읽을 때에는 그의 불친절에 치를 떨었지만, 그의 ‘존재와 시간’이 ‘철·알·못’인 내게 철학에 대한 호기심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일단 그것으로 만족한다. 시간은 많다. 다른 철학여행을 다녀와서 이 책을 또 펼쳐보면 어떻게 읽힐까? 상상해본다. 은퇴 후 지난 날을 생각하며, ‘이랬으면 좋았을 지도’ 하거나 때로는 무언가 모를 분노가 확 밀려 올 때가 있다. 지금 와서 어쩌자고 이런 생각들이 드는 지 답답했다. 책을 읽으면서 가끔씩 눈이 쏙 들어오는 한 문장이 과거의 일들과 겹치면서 나를 다독거려 준다. 그런 날은 로또 맞은 것처럼 기쁘다.
은퇴 후 몇 달은 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어떻게 지내?” “요즘 뭐해?” 하고 물을 때가 있다. 현직일 때에는 명함 한 장 주면 끝날 일인데, 상대방의 질문의도에 따라 혹은 나의 기분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기가 좀 ‘거시기’할 때가 있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모임을 즐기지 않았다. 펜데믹이기도 하였고. 요즘엔 이럴 때 꺼내는 내 명함이 있다. “요즘, 하이데거 읽어.” 대부분은 다음 질문 끝! 이지만, 조금 아는 사람은 “아니, 웬 실존?” 하고 아는 체 한다. 다음번엔 이직(移職)해서 ‘들뢰즈’로 명함을 바꾸면 어떨지 기대된다.
그렇게 나의 사회적 명함을, 계급장을 나의 내면의 명함으로 바꾸어 가고 있다. 이 명함들이 쌓이고 쌓일 때, 내 존재는 어디에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지금처럼 그 명함들도 버릴 때가 오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겉으로 보이는 ‘내가 누군데!’에 매어 있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2025년 새해 둘째 날 미장원에 갔다. 시절이 하수상하여 꿀꿀한 기분을 바꾸기 위해서이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퍼머를 했다. 어? 이게 내 모습인가? 항상 바른 남자머리만 하였던 터라 상상이 가지 않았는데, 실제로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찬찬히 보니 나름 괜찮은데? 하는 기분이 든다. 머리 모양보다도 무언가 변화하려는 마음의 눈으로 보아서 그런 듯하다. 현관에서 마주친 집사람이 한 십분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다. 그 뒤로도 일주일째 나만 보면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는다. 내 머리 하나로 이렇게 웃길 수 있다니, 재밌다. 책 읽기 덕분이다.
언젠가 생(生)을 은퇴할 때에, 책을 손에 쥐고 지낸 인생 후반 덕분에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고 말하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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