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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은퇴 이야기

[나의 은퇴 이야기] 은퇴,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

by 북드라망 2025. 3. 17.

은퇴,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

남궁진(하심당)

 


어쩌다 은퇴? 
은퇴! 내 삶의 대부분 일이 그러하듯이, 은퇴도 어쩌다 오고 말았다. 그것은 신중하고 오래 생각해오다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차근차근 준비해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의미에서다. 살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오는 일들이 얼마나 될까. 나에게는 결혼, 출산, 육아도 어쩌다 온 듯했고 취직도 그랬는데 은퇴까지 이럴 줄이야. 아~ 죽음도 이렇게 오겠구나 싶다. 


그럼에도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따라가다 보면 어쩌다 일어나는 일들은 정말 어쩌다 생긴 일이 아닐지 모른다. 하늘 아래 모든 일은 중중무진 겹겹이 쌓여서 어느 날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인연 조건이 만나지면 발생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만남과 헤어짐, 머묾과 흩어짐이 생기고 자라고 쇠해져서 소멸한다. 그러고 보면 어쩌다는 없을지도 모른다. 은퇴의 어쩌다가 아닌 지점 찾기가 이 글의 목표다. 하지만 삶이 그렇듯, 목표를 향해 가지만 다른 곳에 도달하기도 하니, 나도 이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지고 마무리될지 궁금하다. 어쩌다 은퇴가 아니라면 이후의 내 삶은 어찌 전개될지, 이 글이 안내해줄지도 모르겠다.

 

 


일과 만나다
은퇴를 말하려면, 은퇴한 나의 일, 혹은 취업하게 된 경위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일게다. 나는 39세에 일을 시작해서 20여 년 일하고 환갑에 은퇴했다. 마흔을 앞두고서야 일해야만 하는 부득이한 상황이 생겼다. 밀레니엄을 몇 년 앞둔 그 무렵, IMF가 가정 경제를 바닥냈기 때문이다. 모아둔 재산은 없는데 당장 쌀독이 비었으니, 더 이상 실직한 남편의 재취업을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 두 명의 아이가 딸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결혼 초기부터 일하지 않은 걸 후회했지만, 당시 사정은 일할 형편이 아니었다. 


나와 남편은 동갑내기 장남 장녀로 27세 되던 해, 2월에 만나 5월에 결혼했다. 불꽃 같은 연애는 아니었는데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어쩌다 보니 내일이 결혼식이었다. 결혼 후 양가 아버지가 차례로 돌아가시고 줄줄이 6명의 어르신이 뒤따라가셨다. 우리는 갑자기 집안의 대소사를 맡아 하는 처지가 되었다. 양쪽 7명 동생들이 결혼했고, 나는 두 명의 아이를 낳아 길렀으며, 10명의 조카가 탄생했다. 가장 최악의 상황은 말기암 환자 시할머니, 생후 2주 신생아 아들, 20개월 된 딸을 산모인 내가 돌본 일이다. 그 시기를 어떻게 통과했는지 지금도 불가사의하다. 시할머님 장례는 시아버님에 이어 집에서 치렀다. 태어나고, 병들고, 죽고, 결혼하고, 정신없이 전투적으로 살다가 IMF를 덜컥 맞았고, 경제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절박함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다, 마지막으로 교원 임용시험 도전을 생각했다. 40세 나이 제한이 있었고, 공부의 기억이 까마득했으며, 사범대를 졸업했으나 교사의 삶에 대한 선망이나 사명감은 없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친정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불법 돈벌이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이었는데 무얼 못하랴 싶었다. 남매를 시댁에 맡기고 노량진 고시원에 들어갔다. 평생 가장 적게 자고, 가장 집중했던 시간이었고, 운 좋게 합격했다. 


합격 후 첫 발령지는 경기도 시골이었는데 그곳에 원룸을 얻어, 6개월 만에 가족이 모였다. 함께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남편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도 아이들 키울 공간이 생기고, 그것을 감당하게 된 것이 기뻤다. 교사의 사명, 교육에 대한 이상, 나의 적성, 그런 것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밀리지 않고 월급 받는 게 고맙고, 감사했다. 정년까지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으로, 보답하리라. 그런 마음으로 교사가 되었다. 


성실 근면하게 일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체온이 1도 낮아졌다. 학교에서는 출근부터 퇴근까지 해야 할 일을 빠짐없이 하는데, 집에 오면 춥고 기운 없어 축축 늘어졌다. 내 몫의 집안일을 겨우 마치고 나는 거의 누워 지내야 했다. 병원에 가서 원인을 찾으려 해도 병명은 없었고, 진단되지 않으니 치료 없이 수액 맞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급기야 퇴직 5년 전에는 이 주일에 한 번 수액을 맞고 근무했다. 한의원에서는 아무 일 하지 말고 보약 먹고 쉬라 권했지만, 생계를 책임져야 하니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두려움에 직면하다 
그런데, 퇴직 1년 전 코비드 19가 시작된 3월 하순, 건장해 보였던 남편이, 나보다 먼저, 길거리에서 심정지로 쓰러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친절한 분에게 발견되어 중환자실에 옮겨졌고, 소생이 어렵거나 회복된다 해도 뇌 손상이 우려된다 했지만 별다른 징후 없이 퇴원했다. 남편은 더디게 회복되었고, 일하고 집에 와서 그를 돌보는 것은 추가된 업무처럼 낯설고 힘들었다. 당시 코비드 19로 달라진 근무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어려웠다. 비대면 수업, 동영상 수업 교재 만들기, 인터넷 기반 학교 업무의 새로운 버전의 일들이 쉽게 익혀지지 않았기에 늘 몸도 마음도 천근만근이었다. 그러다 그해 겨울, 일터에서 나는 계단을 오르다 발을 헛디뎠다.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지 않으려 왼손으로 짚었는데 손목뼈 두 개가 다 부러졌다. 뼈에 철심 박는 수술을 했고 수술 후 염증 수치가 내려가지 않자 2주 동안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병실에 누워 있으니, 여러 생각과 감정이 들락날락했다. 이 모든 상황에 대한 공연한 억울함과 서러움에 눈물을 훔치다가, 이만하기 다행이다 안도하다가, 남편의 중환자실에서 겪은 일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늙음과 병듦, 그리고 죽음에 관한 밑도 끝도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한쪽 끝은 이대로 여기서 삶이 마무리될 수도 있고 그래도 별수 없지 하는 체념 같은 죽음충동이었다. 나는 너무 지치고 고단했으며 모든 것을 멈추고 싶기도 했다. 다른 한쪽 끝은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고 병들고 늙고 죽는 내 몸에 대한 어떤 연민 같은 감정이었다. 몸에 대해 모르니 몸을 돌보지 못했고 그래서 내 몸이 이리 무기력한 것이라는 생각. 일하느라 바빠 나를 돌볼 새가 어디 있었나 하는 측은한 마음 말이다. 그런데 몸 공부하자니 막막함을 느꼈다. 병원에서 의사 간호사에게 듣는 의학 전문용어로 채워진 공부를 어떻게 시작한단 말인가. 진입장벽이 너무 높아 보였다. 그러다, 불현듯 ‘동의보감’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도 뜬금없는 전개인데, 정말 번개처럼 『동의보감』이 생각났다. 


나는 인터넷을 검색하다 한글로 읽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낭송 동의보감』’1~4권을 찾아냈고, 바로 병실로 주문했다. ‘정’, ‘기’, ‘신’, 알 듯 말 듯 한 용어로 구성된 내용을 읽다가 혼자 공부하기를 포기하고, 책날개에 소개된 ‘감이당’에 접속했다. 퇴직 전이라 일요일 과정(일성)에 등록했는데 동의보감은 4학기에 공부할 내용이었다. 아프고 보니, 일에 대한 의무나 책임을 대신하여, 일단 몸부터 챙겨야 한다는 절박함이 생겼다. 정년까지 일하려던 마음을 바꿔 연금 지급이 가능한 그해 여름, 2년 먼저 은퇴했다. 난 죽을 만큼 아프고 난 후에야 비로소 외부로 향했던 시선을 나에게로 가져올 수 있었다. 

 

 


위인지학에서 위기지학으로
이후 내 관심사는 ‘나의 몸’이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무기력하게 방바닥에 붙어버리는 몸을 어떻게 일으켜 세울까? 그리고 1도 낮은 체온을 어떻게 정상 체온으로 올릴 수 있을까? 부러진 손목 재활치료 하며 익힌 스트레칭을 잠이 깨자마자 누워서 한 후, 귀찮은 생각이 올라오기 전에 옷을 걸쳐 입고 매일 아침 뒷산을 걷기 시작했다. 2년쯤 되자 습관이 붙는 듯했다. 일주일 두 번 요가를 추가했다. 그해 여름 동생들과 미국에서 14박 15일 대장정의 JMT(John Mure Trail) 산행에 도전했다. 하지만 그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꾸준히 운동해온 두 동생은 산행으로 살이 빠지고 건강해졌다고 좋아했지만, 운동량이 적은 나는 왼쪽 발목 ‘피로골절’로 10일 이상 걷지 못했다. 그래도 좋았다. 백두산보다 더 높은 산들을 오르내리며 자연에 몸을 담갔다 나온 느낌이 들었다. 산바람도 좋았고, 산 중턱에 걸린 구름도, 심지어 추워 덜덜 떨게 했던 비도 좋았다. 


높은 산에서 자라는 처음 보는 나무와 바위도 멋있었지만, 산꼭대기 눈이 녹아 만들어진 연못들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천 개의 섬’(Thousand Island Lake) 이라는 이름의 연못들은 주역의 가장 큰 기쁨을 상징하는 중택태괘를 떠올리게 했다. 연못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듯한 형상은 감이당에서 함께 공부하던 도반들을 생각나게 했다. 세상의 가장 큰 기쁨은 공부하면서 서로를 채워주는 붕우강학(朋友講学)이라는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고전을 매개로 공부하는 관계는 밤잠을 줄이며 경쟁상대를 뒤로 젖히고 합격하기 위해 애썼던 임용시험 공부와 완전히 달랐다. 공자는 위인지학(為人之学)-다른 사람을 위한 공부를 하지 말고, 위기지학(為己之学)-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라고 하셨다는 내용이 생각났다. 내가 생계를 위해 한 공부는 위인지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으니 내 삶에서 필요한 공부다. 하지만 나는 이런 공부만 공부라고 생각해왔지, 자신을 위한 공부 위기지학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위인지학이 가르쳐주지 못한 일들이 나에게 줄줄이 생겨나지 않는가? 아프고, 병들고, 늙고, 죽고, 이 문제들은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가?


몸을 움직이자 체온도 올라갔다. 집에서 누워 있는 시간이 줄었다. 작년에는 남편을 걷게 하려고(심정지로 고생했던 남편은, 2년 전 대장암 수술로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뒷산 끝에 있는 동네 작은 운동장을 걷다가, 단축마라톤 ‘걷뛰’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거위발건염’으로 2주 고생했지만 부산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바다 위(광안대교) 10km를 달렸다. 마치는 지점을 통과하면서는 멈추지 않고 걷지 않고 줄곧 뛰어, 달리기를 마쳤다는 성취감과 뿌듯함, 만족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보다는 뛰면서 맛보았던 어떤 충만함이 떠올랐다. 나는 그때 바닷바람과 공기와 햇살 사이에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뛰는 나와 섞이자, 세포 하나하나가 춤추듯 상쾌하고 즐거웠다. 바람이 나를 통과하는 것 같았다. 산에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무력한 몸이었을 때 느껴보지 못한 그런 감각은 신기했고 좋았다. 


은퇴 4년 차. ‘나의 몸’에 생긴 변화가 놀랍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이전과 분명하게 달라진 것 하나는 내가 나와 대면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그 시간에 내 몸을 움직이려는 노력을 매일 하면서 나는 나의 몸을 정말 잘 모르고 살았고 지금도 잘 모른다는 것을 생각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나에게 그리고 내 몸에게 물어본 적도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몸이 무기력했을 때는 떠오르지 않았던 일들이다. 거기에 나에게 몸에게 질문하라고 몸을 궁금해하라고, 그리하여 알게 되면 행동으로 옮기라고 권하는 공부가 더해지자, 내 몸이 충만함으로 반응한 것은 아닐까?

 


은퇴, 자신으로 돌아오는 일
은퇴 이후 나는,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그냥 했다. 처음에 그것은 어려웠다. 무얼 할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이당 공부를 시작으로, 줄줄이 했던 것들은 거의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들이다. 단청 그리기, 요가, 모델 워킹, 캠핑, 등산, 마라톤, 동네 주민자치 프로그램 참여, 동네 독서 모임 만들기, 마을 효 잔치 출연, 딸과 유럽 배낭여행, 엄마 간병하며 미국에서 살기, 내 안에 이 많은 욕구가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것을 하면서 어떤 감정이나 느낌을 가져야 하는지 몰라 허둥대는 내가 더 놀라웠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즐거워하고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런 일들을 한 결과가 좋다는 것은 알지만, 그런 일들을 하면서 좋거나 즐겁지 않았다. 솔직히 무언가를 하면서 충만한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 늘 행위에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중독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공부하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중독이란 자신의 몸과 대화가 단절됐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심당의 감각 탐구 세미나와 동시에 진행된 마라톤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 발의 감각을 느꼈다. 발바닥 뒤꿈치부터, 아치, 엄지발가락 순서로 땅과 닿는 느낌을 감각으로 알게 되자, 내 달리는 자세가 안정되었고 속도가 조금 달라졌으며, 무엇보다도 내 몸이 기뻐했다. 그것을 느꼈다. 그전에는 어떠했냐고? 발바닥을 통째로 땅에 내려놓으니 발바닥 자체가 평평한 나뭇조각 같아 질질 끌리거나 터벅터벅 걸어 다녔다. 기운 없이 걷는다는 지적을 받았고, 발이 꼬여 잘 넘어졌다. 마라톤 연습하며, 내가 그렇게 걷고 달려왔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것을 고쳐보려 꾸준히 노력했다. 그리고 마라톤 완주하며 몸에서, 몸으로 충만함을 느껴 본 셈이다.


‘동의보감’은 일 년의 주기와 인생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봄이 생명의 탄생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청소년기까지라면, 여름은 꽃으로 피어나는 약동하는 힘의 청년기다. 가을은 잎도 꽃도 떨구어 열매를 맺는 중장년의 시기이며, 생명의 씨앗 하나로 응축하는 기운의 겨울은 노년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연의 흐름에 따라 때에 맞는 삶을 살아야 생명력을 보존할 수 있다고 한다. 


은퇴는 어떤 계절일까? 가을이지 않을까? 외부로 발산하는 기운이 충만한 여름과 달리, 안으로 수렴하는 기운으로 무성한 꽃과 잎을 다 떨구어 내고 전혀 다른 형태의 열매를 살찌우는 계절. 여름을 충실히 살아내고, 폭풍우와 작열하는 태양의 열과 빛을 온몸으로 다 받아내고, 가을을 맞이한다. 열매를 맺기 위해 봄과 여름을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은, 공감과 함께 위안이 되었다. 치열하게 살아온 지난날이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여름을 맹렬히 살아낸 것이구나 하는 자각은, 지금의 나를 공감하게 했고 위안이 되었다. 이제는 나의 에너지를 내부로 향하게 하여, 새싹이나 꽃이 아닌 열매를 맺어야 하는 때라는 것에서 나는 안도했다.

 

 


오늘날 여러 매체에서 은퇴와 노년을 우울하게 전제하며, 노후를 위해 준비하라고 부추긴다. 일을 계속하라고 일자리(노인 일자리 사업)를 마련하거나, 여유자금 확보 방법을 강조하기도 한다. 동의보감의 시선으로 보면 가을인데 여름의 삶을 계속 살아내라는 것처럼 여겨진다. 한편, ‘은퇴’를 노년과 연결하고 생명력이 고갈되는 시점이니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하고 이를 대비하여 보험을 들어야 한다고 광고하는 것(치매보험과 치매간병보험 등)은, 은퇴와 노년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보험을 늘리는 것보다 노년의 생계에 대한 공공적이고 실제적인 대책이 우선적이고 필수적으로 마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한편, 고대 인도인은 인생을 4주기로 구분했다. 태어나서 25세까지는 공부하는 학습기(学習 期, brahmacarya), 50세까지는 결혼하고 자식을 키우고 가정을 운영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가주기(家住期, grhasthya), 사회적 책임을 마치면 숲으로 들어가 깨달음을 추구하는 임서기(林棲期, vanaprastha), 깨달음의 지혜를 나눠주러 정처 없이 떠도는 유행기(遊行期, sannyasa)가 그것이다. 은퇴는 아마도 임서기에 해당할 것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깨달음을 찾아 공부하러 가정을 떠나는 사람들. 여자든, 남자든 자기 삶의 이유를 찾아 스승을 구하러 가는 것 아닌가! 또한 죽음은, 깨달음을 얻은 후 그것을 나눠주러 떠돌다 맞는 사건이다. 매우 충격적이지만 참신했다. 이보다 더 늙음과 노년, 그리고 죽음을 유쾌, 상쾌, 통쾌하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 있었던가? 


고전의 지혜로 들여다보니 어쩌면 인생의 은퇴는 ‘죽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에서 물러남을 은퇴라 하는데, 우리들의 일이라는 것이 크게 보면 ‘삶을 살아감’ 아니겠는가 싶은 것이다. 그렇게 따져보면, 정년, 퇴직, 은퇴는 동의보감의 언어로는 절기를 건너가는 일이고 인도의 지혜로는 마디를 넘어서는 것 아닌가. 그러하다면 나의 은퇴 이야기는 새롭게 만난 절기와 마디를 어떻게 충만하게 채우게 되는지를 새롭게 써가야 할 것이다. 아마도 자신으로 돌아오는 여행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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