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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은퇴 이야기

[나의 은퇴 이야기] 설레는 낯섦의 세계로

by 북드라망 2025. 4. 14.

설레는 낯섦의 세계로

수니(고전비평공간 규문)

 


때를 맞이하다

나는 2024년 6월 말에 직장에서 퇴직했다. 퇴직 전부터 규문 크크랩에서 그림, 사진, 영화 등 예술 관련 공부를 3년째 하고 있다. 화가 반 고흐의 그림에 대한 작가론이나 파졸리니 감독의 영화 <마태복음> 비평을 쓰는 경험들은 어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 이런 기쁨이 공부를 이어오게 한 게 아닐까 싶다. 퇴직 전까지는 평일에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아침과 저녁, 주말 시간에 공부를 해 왔다. 바쁘게 일과 공부를 병행하다보니 어느 순간 ‘정년 퇴직’ 시기가 코 앞에 와 있었다. 기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해진 연령인 만 60세가 되면 직장을 떠나야 한다. 손꼽아 보니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반을 보낸 직장이다. 이런 직장을 떠나야 한다 생각하니 여러 마음이 오갔다.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 중 하나의 이미지가(<Gold, Serra Pelada, Brazil>, 1986>) 떠오른다. 광산에 금을 캐기 위해 수천명의 노동자가 절벽을 오르내리며 노동하는 모습을 먼 거리에서 포착한 사진이다. 마치 절벽꼭대기부터 절벽아래까지 걸쳐진 기다란 사다리에 노동자들이 꼭 바퀴벌레처럼 붙어 있는 형상이다. 이 사진이 무척 끔찍스럽게 다가온다. 사진 속 사람들 중 한 명이 사라진다 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다. 이 사진에서 인간에 대한 어떤 냉담함이 느껴지는 이유이다. 그러다 문득 나 자신도 그들처럼 직장에 매달려 앞만 보고 일했던 한 사람이었음을 자각한다.

     



나의 처지가 살가도의 사진 속 노동자와 비슷한 형상이라는 생각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내가 다니던 회사 직원은 3천 명이 넘는다. 서른 살이 된 1995년에 입사(이직)하여, 2024년 7월 1일부터 ‘공로연수’(정년퇴직 전 준비기간, 정식으로 따지면 2025년 6월이 ‘퇴직일’이다.)에 들어갔으니 햇수로 29년이다. 29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을까? 30대 젊음에서 시작하여 40대를 지나 5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삶의 중요한 시기들을 지나왔다. 그간 여러 경험의 흔적과 기억이 쌓였을 것이고, 그렇게 응축된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을 것이다. 또 퇴직을 했다고 나의 운명이 크게 바뀌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느 순간에 지나온 경험들이 떠오를 것이고 그런 기억속에서 지나온 것을 마주하기도 하고 새롭게 깨닫기도 하리라. 퇴직을 하고나니 그 모든 경험을 공부의 계기로 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늘 다니던 길이 낯설어지다
내가 요즘 가장 크게 실감하는 것은 나의 신체이다. 퇴직 후 달라진 일상 중 하나는 집 밖을 나가는 시간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내가 외출한 시간대는 보통 태양 빛이 내리쬐는 낮 시간(오전 10시에서 오후 2시 전후)이다. 퇴직 전에야 이 시간에 외출할 일이 거의 없었다. 회사 사무실에서 일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직장인에게 활동의 공간은 두말 할 것 없이 직장 사무실이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 출근해 어둠이 내린 저녁에야 건물을 나오는 일상의 연속. 그런데 퇴직 후 태양 빛이 가득한 대낮에 바깥과 접촉하면서 나 자신이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온 때가 2015년이니 10년 가까이 살아온 곳이다. 아파트 바로 옆엔 작은 공원이 있다. 공원을 벗어나면 병원, 약국, 음식점, 미용실 등의 건물이 있고, 도로와 차도로 연결된다. 특히 공원은 내가 출퇴근시 지하철을 타기 위해 매일 가로질러 지나가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대낮에 공원을 걸어가면 높게 뻗은 나무와 그 위 하늘과 내리쬐는 햇빛까지 모든 것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동네 거리도 마찬가지였다. 자주 가던 도로 상가 건물들이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해지면서 보도 블록 위에 몸과 발이 순간 붕뜬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낯섦을 더해주는 것은 태양 빛이다. 한동안 나는 한낮의 밝음, 태양빛이 주는 자극을 자연스럽게 만나지 못했다. 길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길을 헤매다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일도 일어났다.

처음엔 ‘이런 느낌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다가 일을 하지 않게 되니 몸이 적응하려는 과정에서 생기는 현상인가? 아니면 일상의 공간이 달라져서 그런 것인가? 일을 하지 않아서라면, 움직이지 않고 집에만 있을 때 불편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가는 곳이 아니라 내가 늘 다니던 익숙한 곳에서 몸은 불편해했다. 그러니 단순히 일을 하지 않거나 공간이 바뀐 탓이 아닌 것이다. 리처드 세넷에 따르면 고대 아테네에서는 시민과 도시가 일체성을 느끼던 시대였던 반면, 19세기 근대 파리나 런던 같은 도시에서 인간의 신체는 주위 공간으로부터 점차 분리되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공간)에 대한 감각의 상실을 의미한다. 게다가 엘리베이터나 자동차 같은 기술로 신체가 더욱 편안함에 젖게 되면서, 도시 공간에서 인간의 신체는 점점 수동적으로 변모해갔다.

생각해보면, 29년간 거주한 사무실에서 나는 얼마나 수동적인 육체로 살았던가! 이 공간 안에서 적어도 하루에 9시간 이상을 일해야 했다. 사무실은 시간으로 계산된 경제적 공간이다. 시간뿐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를 최대한 사용하게 하는 공간이기도하다. 그 대가로 회사로부터 매월 급여를 받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돌이켜보니, 나에게 집과 그밖의 공간들은 회사를 위한 휴식의 공간으로서만 가치 있는 것이었다. 20대 서울에 온 후로 쭉 그렇게 살았다. 여기에 생각이 이르니 회사에서 그간 여러 가지 상황들이 이해가 된다. 사무실 공간에서 틀에 박힌채 사람들과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답답해 하면서 느꼈던 미움, 분노와 같은 정서적 경험들의 이유를. 어떤 경우든 경제적 이익이 따르지 않으면 신체가 반응하지 않는 신체, 그것이 직장인으로서 살았던 내 신체였다. 회사가 설정한 목표와 성과를 달성하는 것에 몸과 마음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니체가 평준화된 근대 인간에게 내재된 위험을 예고 한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다른 것에 마음을 내지 못하고 오직 일신의 안정만을 추구해온 결과, 난 사무실이라는 공간과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 외의 시간과 공간에 그토록 무심했던 것이다.

 



퇴직 이후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정년 퇴직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내가 어떤 공간에 살아왔고, 그것이 어떤 공간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한낮 공원과 거리에서 낯섦을 사소한 느낌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인간의 육체가 도시 공간과 관계 맺는 방식에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의 신체가 공간과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말해주는 징표였던 것이다. 또한 내가 지나온 시간의 흔적들을 말해주는 것이며, 앞으로 내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말해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덕분에 그동안 내가 살아온 공간, 이 도시 자체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내가 사는 공간과 분리되어 주위의 것들에 무감각한 채로 살아왔다는 것을.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회사 일과 가정에만 집중해왔다는 것을.

다행이다. 늘 익숙하게 다니던 공원과 거리가 전과 다름을 몸으로 느꼈지만, 그것을 깨닫게 한 것은 공부였기 때문이다. 리처드 세넷의 『살과 돌』을 읽지 않았다면, 그런 신체의 느낌을 운동을 하거나 다른 노력으로 극복하려 했을 것이다. 물론 도시 공간에서 감각의 상실, 무감각의 원인을 하나의 원인으로 추정할 수는 없다. 도시의 인간은 경제적 활동을 하며 살아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살아왔던 것처럼 다른 이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 공간의 빈틈을 탐색하는 일이 주어졌다. 그 ‘빈틈’은 퇴직 이후 나의 새로운 관계들과 공부들이 만들어낼 가능성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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