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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걷다보면

[기린의 걷다보면] 기억을 잇는 걷기

by 북드라망 2024. 9. 4.

기억을 잇는 걷기

 

세월호 10주기_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올해는 세월호 참사 10주기였다. 공동체 홈피에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참사 10주기 기억식이 열린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4월 16일 오후 2시, 기억식에 참석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안산 화랑유원지에 갔다. 햇빛이 여지없이 쏟아지는 유원지 주차장이 식장이었다. 식순에 따라 기억식이 시작되었고, 희생자분들의 이름이 한 명 한 명 호명되는 순서가 되었다. 삼백 사명의 이름이 다 불리는 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지나갔다. 2014년에 마을 작업장 월든에서 단원고 교실 의자에 놓을 방석을 만들었던 일, 바느질을 하면서 읽었던 <416 단원고 약전>, 책의 구절을 읽으며 울먹이던 친구의 목소리. 10년이 지나는 동안 사고의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유가족들의 요구에 정부의 대응은 여전히 답보상태인데, 정부에서 나온 기관장들의 추도사에는 알맹이 없는 계획들이 연이었다. 이 간극을 메우려면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릴까.

그날 이후 한국일보에서 세월호 참사 10주기 특별기획으로 <산 자들의 10년>이라는 기획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 중에는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구조하러 온 해경지시를 잘 따라서 조심히 나오라”고 말한 남편을 10년 내내 원망했다는 아내의 이야기도 있었다. 벼락같이 닥친 그 일로 가족의 일상은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던 일을 접었고 살던 곳에서도 떠나서 아무도 모르는 외진 곳에서 살고 있다는 유가족이었다. 하지만 올해 10주기를 계기로 다시 한 번 힘을 내보기로 했다는 이야기였다. 지난 2월 25일부터 3월 16일까지 세월호 참사 10주기 전국 시민행진에 함께 나서서 304km 전 구간을 완주했다. “아들이 수학여행을 갔어야 할 제주부터 시신이 돼 돌아온 팽목항, 23개 도시와 지난 6년간 가지 못했던 안산을 거쳐 서울로 향하는 일정”이었다. 걷는 내내 눈물을 멈출 수 없었지만, 그 시간동안 남편에 대한 원망도 잦아들었다. 완주하는 날 마중 나온 남편에게 자신이 전화를 받았어도 그렇게 말했을 거라고 했다. 걷기의 힘으로 또 한 번 슬픔의 우물을 벗어난 유가족분들의 이야기에 가슴이 저릿했다.
 



팽목바람길을 걷다
공동체에서는 3년 전부터 팽목바람길을 걷고 있다. 매월 6월 첫 주 토요일, 참가 신청을 받고 미니밴을 예약해서 진도 팽목항까지 왕복하는 당일치기 일정이다. 그동안 다른 일정과 겹쳐서 같이 못 갔다. 이번에는 토요일 세미나에 결석계를 내고 팽목바람길 걷기를 신청했다. 팽목바람길은 ‘세월호 기억의 벽'을 만든 동화 작가들이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2018년 팽목항 주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만든 도보여행길이다. 팽목항을 기점으로 주변 마을과 바닷가, 숲길, 갈대밭을 끼고 한 바퀴 도는 약 13.5㎞ 코스이다. 2018년 길을 조성할 때부터 함께한 임정자사무국장님과 올해 공동대표가 되었다는 안병호님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매달 첫 주 토요일 열리는 걷기 모임에 이번에는 우리만 신청을 해서 오붓하게 걸을 수 있었다.

걷기가 시작되는 팽목항에는 416 팽목기억관이 있었다. 기억관 안으로 들어가서 묵념을 하고나서 밖으로 나오니 옆으로 전시물이 설치된 건물이 하나 더 있었다. 세월로 참사 10주기 기억 전시로, 지상의 304인이 하늘의 304인을 다시 부르는 이름 전시였다. 304인이 그린 이름표가 사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건물밖에도 걸개그림으로 프린트되어 걸려 있었다. 기억하기를 약속하는 이들이 정성을 다해 부르는 마음이 전해졌다.

6월 초여름으로 들어서는 하늘색은 명징한 파란빛이었다. 바람길이라는 이름답게 탁 트인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쓰고 있는 모자가 날리기 일쑤였다. 팽목마을을 지나면서 오래된 팽나무를 보았다. 팽목마을이라는 이름도 팽나무가 많아서 지어진 이름이란다. 파란 하늘을 향해 구불구불 뻗어나간 가지에서 바닷바람을 탈 줄 아는 리듬이 느껴졌다. 동해바닷가에서 자란 나는 바다라고 하면 망망대해와 가파른 해안선을 떠올린다. 하지만 진도 앞바다는 시선이 닿는 곳에 작은 섬들이 드문드문 떠있는 잔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이곳에서 그 많은 이들이 구조되지 못했다.  국가의 무능과 잔인이 얼마나 큰 비극으로 비화될 수 있는지 저 바다가 톡톡히 보여준 것 같았다. 하늘과 바람과 바다와 나무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에 그저 젖을 수 없는 곳, 그래서 그 감각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걷기였다.




기억의 또 다른 방법_ 영화 <너와 나>
팽목바람길을 걷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영화 한 편이 생각났다.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였다. 2023년 개봉할 당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영화라는 소개를 보고 지나쳤다. 영화를 보고 온 친구가 좋은 영화라고도 했다. 봐야겠다 했다가 차일피일 그렇게 잊힌 영화였다. 다음 날 오티티에서 영화를 찾아보았다. 열 여덟살인 주인공 하은과 세미가 보내는 하루의 이야기였다. 이들은 다음 날 수학여행을 가야하는데, 하은이는 자전거에 치이는 사고를 당해 수학여행을 못 가게 되었다. 세미는 하은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찾아가 함께 수학여행을 가자고 조른다. 세은의 간절한 눈빛과 하은이 개구진 웃음으로 의기투합한 둘 사이에 미세한 어긋남이 도드라지면서 영화 속의 시간은 해가 저물고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하은이와 세미의 이야기가 304명이 저마다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 중의 하나로 느껴졌다. 좋아하는 친구를 독차지하고 싶은 열 여덟의 열망, 그 열망의 서투름 때문에 번지는 오해와 화해의 몸짓. 감독은 수학여행 전날이라는 시간 속에 그 순간들은 너무도 섬세하게 그려 놓았다. 영화 중간 중간 다음 날의 수학여행을 준비하는 고딩들의 다양한 표정들, 집으로 돌아온 세미가 가족과 보내는 저녁시간의 천진한 평안, 그 모든 장면들이 “이름 없는 무수한 슬픔”을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정말 아름다웠다. 슬픔으로 기억되기 이전의 무수한 이름들이 어떻게 살았을지 상상하게 하는 영화, 그래서 그 이름들을 잊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먹먹하게 느끼게 하는 영화였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이 지난 올해 6월, 팽목바람길을 걸었고 영화도 보았다. 이렇게 또 한 번 그 시간을 기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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