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에 대한 경의
덕후(인문공간 세종)
복날이 다가오니 마트에서 삼계탕용 닭을 할인 판매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복날이 있는 7월이면 1억 마리의 닭을 도축한다고 한다. 인구 5천만으로 단순 계산해도 한 달 동안 1인당 두 마리를 먹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털이 뽑히고 깨끗하게 손질된 채 판매되는 닭을 볼 뿐이고, 이 닭이 한때는 살아있는 생명이었음에 대해 대부분 무관심하다. 죽음에 이른 한 생명이라기보다는 음식의 재료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복날을 앞두고 무자비하게 도축될 닭들을 떠올리다가 생명에 대한 경의를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중인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의 유물 중에는 들소를 사냥하던 활과 가죽을 벗기는 도구가 있다. 활로 직접 들소를 사냥하고 손도구로 소의 가죽을 벗긴다는 것은 나에게 전혀 현실감 없는 이야기로 들렸다. 심지어 우리가 먹는 소고기는 그들이 잡았던 들소와 다른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산업화로 인해 우리가 식재료로 삼는 동물을 잡아 죽이고 손질하는 과정은 감춰졌고 우리는 고기가 된 그들의 생명이나 죽음에 대한 감사 따위는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북미 대평원 원주민의 삶에 들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다. 원주민들은 들소의 고기를 먹고, 뼈로 도구를 만들고, 가죽과 털로 옷을 만들고 집을 짓는데 사용했다. 들소의 모든 것이 원주민의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재료가 되었지만 원주민에게 들소는 지금 우리가 고기라는 상품 대하듯 하는 사물이 아니었다. 원주민에게 들소는 대평원을 함께 살아가는 주민이었고 생명을 나눠 가진 가족이었다.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의 사회는 인간과 동물의 대칭성이 살아 있는 세계였다. 사람들은 동물을 단순히 인간을 위한 도구로 보고 살육하지 않았다.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동물을 사냥해야 했으므로 자신들 대신 죽음을 맞이한 동물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는 의례를 행했다. 그들의 삶에는 죽음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고 내가 살기 위해 너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매일 의식하며 살던 시대였다.
대평원의 원주민들은 옷과 모카신, 그들의 집인 티피 등을 만들기 위해 들소의 가죽을 벗겨 준비하는데 사슴 뼈로 만든 손질 도구를 사용했다. 도구는 기역자로 생겨서 손으로 잡고 사용하기에 좋은, 한 손으로 쥐기 적당한 두께와 성인 팔뚝 정도의 길이를 갖고 있다. 누런 사슴뿔을 기둥삼아 안쪽에는 뿔과 같은 모양으로 구부린 금속 날을 대고 가죽으로 묶었다. 이전에는 돌이나 나무, 뼈로 만들었는데 이주민과의 교역 후에는 금속 날을 사용했다고 한다. 전시된 도구에는 금속 날이 있는 것을 보니 유럽과 교역을 한 후에 만들어진 도구인 것 같다. 하지만 지나치게 날카로운 날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날 부분은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의 손을 다치게 할 수 있으므로 가죽으로 감쌌다. 가죽을 접어 양 옆을 촘촘하게 실로 꿰매고 위쪽은 장화처럼 한 겹 접어 날을 넣었다. 뿔에 날을 고정시키는 역할은 가죽 끈이 하고 있는데 먼저 기역자로 꺾여 가죽을 벗기는 데 사용했을 날 부분을 뿔과 함께 세 번 감아 묶었다. 이 끈을 당겨 도구의 손잡이 쪽으로 다시 세 번 감아 매듭지은 뒤 남은 끈으로 날을 담은 가죽주머니가 끝나는 부분에 세 번을 묶어 손잡이에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사슴뿔의 중간쯤에는 작은 선들이 여러 개 그어져 있다. 가죽 몇 개를 처리했는지 표시한 것이라고 한다. 가죽을 처리한 장부의 기록일까? 국가 사회처럼 세금을 징수하거나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던 기록일지도 모른다. 전시된 유물의 자료만으로는 정확히 국가가 있던 사회의 도구인지 알 수 없다. 만약 이주민들에게서 전파된 셈법이 아니었다면 어떤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어쩌면 들소의 가죽을 벗기는 행위에 대한 의례였을지도 모른다. 들소의 희생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표시 말이다.
나카자와 신이치의 『곰에서 왕으로』에는 대칭성을 유지하던 원주민의 세계에서는 동물을 죽인 뒤에도 정해진 절차에 따라 의례를 지켜 해체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동물과 인간을 완전히 대등한 존재로 여겨 존중의 몸짓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냥을 하기 전에도 동물들과의 유대관계를 맺기 위한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그것은 북극 사람들이 푸누크 시대에 바다 동물 사냥에 사용했던 도구에 나타나 있다.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상아로 만든 작살촉과 손목 보호대에 선과 원을 연결한 동물의 형태를 조각하며 바다 동물을 잡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이런 무늬는 사냥꾼이 사냥한 동물을 기리기 위해 도구에 정교하게 조각하는 것으로 동물의 영혼에 존경을 표하는 것이었다.
현대에는 동물에 대한 의례를 담아 동물의 뼈와 가죽으로 만들었던 사냥 도구는 밀려났고 인간은 생명에 대한 감사와 경의를 제거해버렸다. 인간은 차가운 금속으로 날카롭게 만든 칼을 사용해 생명을 빼앗기만 하는 착취자가 되었다. 이주민들이 총으로 야생들소들을 대량학살하면서 원주민들이 들소 한 마리 한 마리에 정성스레 치르던 의례는 오히려 야만으로 치부되었다. 인간은 생명 유지를 위한 방편이 아니라 사냥하는 즐거움과 전리품을 얻기 위한 놀이로 동물을 죽이기 시작했다.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갖기 위해 사용하는 총이나 날카로운 칼, 대량 도축을 위해 현대화된 기계 등은 생명에 대한 감각을 더욱 무디게 만들었다. 우리는 동물을 인간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잊어버렸고 대칭성의 사고를 잃어버렸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만든 도구와 그것에 담았던 생명 존중과 따뜻한 경의는 우리의 차가운 기술로 만든 도구에 밀려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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