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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나눌레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관람 후기] 미타쿠예 오야신

by 북드라망 2024. 8. 29.

미타쿠예 오야신

오월연두(인문공간 세종)

 

어떻게든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우주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아침에 우리는 무릎을 꿇고 만물을 지으신 이에게 ‘저를 용서하소서’하며 기도드린다.
풀줄기 하나 구부러뜨리기 전에

 – 호청크(위네바고)족의 말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덴버박물관이 소장한 북미 인디언들의 공예와 회화를 포함한 150점의 물품을 <우리가 인디언이라고 알던 사람들>의 이름으로 특별 전시하여 방문하게 되었다. 전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전시 중간중간에 쓰여있는 북미 인디언들의 기도문이었다. 누구는 이 기도문들을 읽으니 자신이 착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나 또한 그 글귀들을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든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은 없다는 말이 나에게 울림을 준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인간을 포함해서 자기가 아닌 무언가의 생명을 죽여야만 살 수 있다. 이는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운명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은 나의 생명이 다른 존재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뜻일 것 같다.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의 생명을 담보 삼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전시품은 카이오와Kiowa족의 타도Tado였다. 타도는 아기를 위한 요람(Cradleboard)이다. 카이오와족은 북미대륙 중남부 대평원에 사는 인디언들로 들소 떼를 쫓아 이동하며 살았다. 썰매 날처럼 생긴 2개의 나무판이 요람을 받치고 있고 나무판 끝은 금속 리벳으로 장식되어 있다. 요람은 화려한 색을 입히고 색 구슬을 엮어 부족 고유의 문양이 수놓아진 사슴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아이가 얼굴만 내밀고 요람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도록, 마치 우리가 큰 천으로 갓난아이의 몸 전체를 감싸는 것처럼 사슴가죽으로 몸을 덮고 끝에는 끈을 달아 레이스를 조이듯이 아이를 단단히 감싼다. 아이의 발이 닿는 요람 아랫부분에도 구슬로 수술을 만들어 매달았다. 구슬 한알 한알 엮어서 요람의 문양과 수술을 만드는 데에만 족히 수개월이 걸렸을 것이다.

 

 



타도는 엄마가 아이를 등에 업고 걷거나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게 해주고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엄마가 일할 때 나뭇가지에 매달거나 나무에 기대어 세워져서 늑대와 같은 동물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되고 아이가 엄마의 모습과 세상을 볼 수 있게 했다. 인터넷에서 카이와족의 타도를 찾아보니 가족사진을 찍을 때도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져 있기보다는 타도에 태워져 한결같이 세워져 있었다. 아이가 엄마 등에 업히거나 말에 매달려서 이동할 때도. 나무에 기대여 매달리거나 세워질 때도 아이는 어른과 같은 시선으로 자연을 보고 있었다. 아기가 눕혀져 혼자 다른 세상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아이가 보는 세상은 어른이 보는 자연이었다.

자연은 생명의 존재들이 살아가는 배경이다. 해를 비추어주고 바람을 불어주고 비를 내리게 하면서 하늘과 땅, 바다와 강, 해와 달은 세상을 사는 생명체에게 활기를 불어넣는다. 자연의 베풂 덕분에 자신들이 살아갈 수 있음을 북미 인디언들은 수렵하며 몸에 새기고 기도문을 읊으며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그들에게 생명을 내주는 방식으로 연결된 동물들과 함께 자신들을 정의했다.

대평원에 사는 커이오족은 들소를 사냥하면 살았다. 들소 떼가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그들도 들소와 같은 속도로 빠르게 이동해야 했기에 가볍고 조립과 해체가 간편한 티피 집에 살았다. 티피는 땅바닥에 나무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들소 가죽을 덮어 만든다.(『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자연과 삶이 함께하는 공간」, 38쪽) 들소 가죽 덮개에는 들소와 들소를 사냥하는 원주민들의 사냥 모습이 그려져 있다. 원주민들은 세상에 단독자로 존재하기보다는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로서 그들의 의식주를 정의했다. 들소의 가죽으로 사는 집을 만들고 들소 사냥을 하는 모습을 들소 가죽에 새기면서 인간과 들소는 세상에서 연결된 존재의 모습 그대로 한집에 같이 산다. 집은 자연의 축소판이다.

카이오와족은 아이들의 가장 큰 스승을 자연이라고 믿었다.(같은 책, 31쪽) 아기 띠에 아이를 태우고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만을 보거나 포대기로 아이를 안아 엄마의 등을 보게 하는 우리의 방식과는 달리 그들은 아이가 자연을 보도록 했다. 그들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이의 시선이 엄마만을 향하도록 하면서 아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은 엄마라고 알려주는 셈이다. 엄마와 아이 사이를 끈끈하게 만들고 그것을 애착이라 부르며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로 생각하게 만드는 씨앗이 아이를 양육하는 방식에서부터 싹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카이오아족은 아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은 자연이라고 알려준다. 아이를 살리고 키우는 것은 아이를 낳은 엄마가 아니라 자연이니 네가 맺어야 할 근원적인 관계는 자연에 있다고 알려주는 게 아닐까. 아이를 말에 매달아 어른들과 같은 시선을 갖게 한다는 것은 어른과 동등한 세상의 한 존재로서 아이를 존중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이에게 가끔 엄마가 널 지켜주겠다고 말을 한다. 내가 뭐라고 무슨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아이를 지켜줄 수 있으며, 세상의 무엇으로부터 아이를 지켜줘야 할까? 아마도 그건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지 못한 나의 고립감에서 오는 불안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 세상 무엇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큼 따뜻하고 든든한 말은 없다. 그 말이 나를 착하게 만든다. 말에 매달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자연의 향기를 들이마시는 요람 안의 카이오아족 아이를 상상해본다. 나도 아이에게 세상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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