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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나눌레오

[인류학을 나눌레오] 갇힌 눈

by 북드라망 2024. 7. 5.

갇힌 눈

강평(인문공간 세종)

 


다르게 볼 수 있을까?
인문세에서 허남린 선생님과 함께 임진왜란(1592~1598)을 중심으로 한 <중세 여행기>를 공부했다. 이 중 김성일(1538~1593)의 <해사록(海槎錄) 제3권~제5권>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자기 생각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지, 그 결과는 멀리서 보면 얼마나 웃픈 것인지 보여준다. 이 글을 쓰면서 처음에는 김성일이라는 한 사람의 갇힘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이 글을 완성할 무렵 뉴스에서 국민 영웅 골프 여제의 기자회견을 보게 되었다. 내막은 자세히 모르지만 요컨대 아버지 채무에 대한 끝나지 않을 대리 변제를 그만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인터뷰 중 내가 주목한 것은 ‘지금껏 해야 하고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소중한 것들, 그간 나의 생각과 노력들 그 모든 게 착각이자 욕심이었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라도 깨달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여제가 자기 생각에 갇혀, 밑 빠진 독에 물을 더 부을 수 없을 만큼 부은 뒤에, 아버지와의 연을 끊는 정도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갇힌 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갇히면 끝까지 모르고 죽을 수 있고, 나오려면 거의 죽고 다시 태어나는 정도로 힘들어야 가능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해사록>을 읽고 처음에는 김성일이, 인터뷰를 보고는 그 여제가 갇혔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특별한 사연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이유든 모두 자기 시대와 자기 눈에 갇혀 살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에 대한 믿음이 나이브했던 것으로 판명 되더라도, 당장의 편안함이 주는 안식이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하는 벽이 될 때도 많다. 나도 공부 공동체 생활을 하며 갸우뚱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상대의 버릇을 고칠 것도 아니고, 더 들어가서 복잡하게 되는 지옥을 경험하기 싫어서 상대에 대한 인정을 명분으로 덮을 때가 있다. 알면서도 덮었다기보다 심리적인 기제가 상대를 내 편할 대로 ‘내 마음처럼’ 믿는 것으로 계속해서 작동되었던 것 같다. 다름 아닌 내 믿음이 내 눈을 갇히게 한다. 


다르게 보는 것은 왜 어려울까?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시대 전체가 처한 조건 하에서 나의 지식, 경험이 켜켜이 누적된 ‘확신’의 눈으로 투과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막연하게 편견을 없애자, 다르게 생각해보자는 말은 공허하게 들린다. 다르게 보는 것은 어렵다. 갇힌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갇힌 곳에서 나와야 하는가, 그렇게 어렵다는데 어떻게 나와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 글에서 다루지 못했다. 얼마나 지독하게 갇혀 있는지만 주로 생각해보기로 한다. 역사 공부는 맨눈으로는, 바로 볼 수 없는 당면한 현실을 거울삼아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김성일의 <해사록>을 통해 피할 수 없는 시대의 관점, 자기 중심의 눈, 그 관점들의 충돌이 만드는 파괴력을 생각해본다. 

 

 


자기 눈으로 보는 세상
 <해사록(海槎錄)>은 바다(海)를 뗏목(槎) 타고 건넌 기록(錄)이라는 뜻으로, 여기서 바다는 현해탄으로서, <해사록>은 조선시대 일본에 파견된 외교관인 조선 통신사의 출장 보고서  명칭이다. 외교관의 공식 보고서이면서도 일기(日記)같이 글쓴이의 소회도 담겨 있는,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기록물로서 글쓴이의 인식을 함께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김성일의 <해사록>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출장을 담고 있다. 전쟁이 임박한 중요한 시기, 일본 현지에서 김성일은, 지금의 내 눈으로는 일본을 오랑캐로 보고, 유교에 따른 절차, 형식을 사사건건 문제 삼느라 전쟁 대비 골든 타임을 흘려보낸 사람이다. 이런 실책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발당해서가 아니라 김성일이 <해사록>에서 자신의 언행을 스스로 자세히, 자랑스럽게 기술해서 알려졌다. 김성일 자신뿐 아니라 후대 역시 이런 김성일의 원칙과 기개를 칭송했다는 점이 더욱 놀랍다. 임진왜란 발발이라는 결말을 알고, 오늘을 사는 내 눈에는 기이하기만 한 장면들이 왜 김성일과 조선의 후예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을까? 모르기는 해도 500년 뒤 후대도 지금의 모습을 보면 내가 김성일을 보고 한 이야기를 똑같이 할 가능성이 높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일본에서 돌아와 한양에 막 도착한 통신사 사절에게 선조(宣祖)(1552~1608)는 묻는다. 저들이 전쟁을 일으킬 것 같으냐? 정사(正使) 황윤길(1536~미상)은 필시 병화(兵火)가 있을 것이라고, 부사(副使) 김성일(1538~1593)은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선조는 김성일을 붙잡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냐고 여러 차례 묻는다. 사실 황윤길과 김성일은 같은 사건을 다르게 보았고, 어떤 사건에 대해서는 기꺼이 보려하거나 한사코 보지 않으려 하는 등 다른 태도를 보였다. 같은 유학자라도 황윤길은 이국이라는 ‘장소’, 우호적이지 않은 ‘때’를 고려해서 김성일의 유학 논리를 자제시키지만, 오랑캐 앞에서 벌벌 떠는 겁쟁이라는 반응이 돌아올 뿐이었다. 유학의 명분이 대세인 조선에서 황윤길의 눈이 예외적이었고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김성일의 눈과 같았다. 


유교가 전부인 김성일의 눈은 일본을 오랑캐로 보았다. 중국-조선을 이어주는 중화주의 라인의 핵심인 유교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은 ‘아무 것도 모르는 오랑캐’라는 것이다. 하지만 허남린 선생님과 함께 한 <일본 철학> 강의에 따르면 일본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불교 철학이 있었다. 조선 통신사가 머문 숙소도 대각사라는 절이었고 쓰시마섬에서 다이묘와 함께 적극적으로 협상을 벌였던 이도 승려였을 정도로 일본은 불교 철학이 지배적이었다. 조선이 유교가 전부인 것처럼 말이다. 일본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철학이 있었다.

 

김성일이 일본을 오랑캐로 본 것처럼, 일본은 조선을 아무 힘도 없는 무능력자로 보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일본명:豐臣秀吉)(1537~1598)는 약한 조선을 6개월이면 함락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다. 실제 부산에 도착한 일본 선발진은 한양까지 보름 만에 도착했다고 한다. 부산항에서 서울 경복궁까지 T-map 검색을 해보니 400Km이다. 경부 고속도로가 없었으니 이동 거리를 적어도 600Km라고 보면, 낯선 땅에서 하루 평균 40Km를 보름동안 매일 뛰어야 가능한 거리다. 웬만한 마라톤 훈련 코스도 못따라 갈 극한 동선이다. 이는 일본의 군사력도 군사력이지만 조선의 국방이 얼마나 뚫린 상태인지 보여준다. 하지만 일본의 예상은 여기까지만 맞았다. 일본은 우두머리 선조만 인질로 잡으면 전쟁은 끝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선조가 의주까지 빛의 속도로 줄행랑을 친 뒤였다. 일본 사무라이들의 세계에서는 전장의 우두머리가 할복을 하거나 잡히는 것 외에 도망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옵션이었다. 선조의 웃지 못할 공이다. 일본은 조선을 자기 기준으로만 보고 있었다.  


시대 전체는 그렇다 치고 김성일처럼 배울 만큼 배우고 경험도 많은 사람이, 일본까지 가서도 왜 수많은 전쟁 징후를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김성일의 ‘자기 눈으로 본 세상’은 지식, 경험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때문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김성일의 ‘오랑캐’ 발언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그의 뿌리 깊은 인식을 보여준다. 김성일은 유학(儒學)으로 이론적 무장되었고 1577년 39살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파견된 연행사로서 명나라의 예(禮)를 경험하기도 했고, 명분을 중요시한 동인(東人)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었다. 조선은 당시 중국 중심주의였고 김성일은 지식, 경험, 이력상 ‘중국바라기’, ‘일본 무시’라는 믿음 체계가 있었다. 김성일의 <해사록>에는 <주역>,<논어>,<춘추>,<예기>,<시경> 등 사서오경(四書五經) 인용문, 형식과 절차를 따지는 예(禮), 중국, 조선, 일본과의 관계 설정에서 위-아래 위계를 두는 의리(義理), 체모(體貌)라는 단어, 오랑캐, 야만인 등 일본에 대한 멸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경전에는, 명나라는, 연행사로 갔을 때’라고 말하며 자신의 경험, 지식을 확고한 인식 기반으로 삼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조선에서 통하던’이라는 조건이 걸린 ‘로컬 인식’이 전쟁이 임박한 때, 적지 일본에서 그대로 적용될 리가 없었다는 점이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았기에 무엇을 보든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자기 중심으로 보는 세상  
사람들은 단체 사진을 찍으면, 제일 먼저 자기를 찾아본다. 자기 얼굴이 크게 나왔다는 등 마치 개인 사진처럼 자기를 중심에 둔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다른 이가 내 맘 같지 않다는 탄식도 어쩌면 타인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중심으로 둔 시선의 문제일 수 있다. 조선도 자기를 중심으로 피아식별(彼我識別)을 한다. 김성일은 쓰시마섬(對馬島)을 조선의 동쪽 울타리라고 칭하며 조선 편으로 믿는다. 조선은 쓰시마인이 상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관시(關市)를 열어주고, 벼슬도 주고 있었고, 쓰시마도 조선 조정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쓰시마를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지켜야 하는 속국(屬國)으로 보았다. 하지만 조선이 쓰시마를 조선 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한 점이 많았다. 우선 쓰시마는 일본말을 쓰고 있고, 일본 지방 정부 중 하나였다. 조선이 쓰시마와 관계를 맺은 것은 태종(太宗)(1367~1422) 때 쓰시마가 자주 부산 등지에서 노략질한 것 때문에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한 뒤 나온 차선책이었다. 조선은 노략질을 막고, 쓰시마는 노략질 대신 무역을 통해 조선의 인삼, 호피를 본국에 파는 것으로 입장 정리를 한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은 왜 그들을 품게 되었는지 기원도 잊고, 힘으로 제압할 수 없어 곁에 두었던 쓰시마를 자신들의 편이라고 믿었다. 쓰시마 입장에서 사실 자기편이 어디 따로 있었을까. 도움 되고, 피해 안주는 편이 자기편이었을 것이다. 

 

쓰시마를 사이에 둔 조선과 일본의 관점이 꼬인 것은 조선이 쓰시마를 자신들의 편으로 생각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나는 믿었다’, ‘내 맘 같지 않다’는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다. 조선 입장에서 일본은 오랑캐이고, 쓰시마는 조선의 속국으로서 조선의 동쪽 울타리였다. 반면 일본은 쓰시마가 조선에서 받은 호피, 쌀 등의 선물을 조선이 쓰시마에게 바친 조공으로 오해하고 있었기에 조선은 별 볼 일 없는 쓰시마보다도 아래였다. 쓰시마를 사이에 두고 조선과 일본은 서로를 아래로 본 것이다. 게다가 조선과 일본은 태종 이후 거의 100년간 통신사도 없이 연락 두절된 사이였다. 그 기간 동안 조선은 전쟁 없는 평화의 시기가 길어졌고 명나라만 어버이로 믿고 있었다. 반면 조선이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일본은 내전을 통해 인적, 물적 군사력이 대폭 강화되었고 1590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조선과 명나라까지 접수할 야욕을 품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단체 사진에서 자기만 보듯 조선은 쓰시마를 자기편이라고, 자기를 중심으로 본다. 

 

158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교류하고 있는 쓰시마 다이묘(지방 영주)에게 조선 국왕을 자신에게 데려오라는 명을 한다. 쓰시마 다이묘는 히데요시의 무서운 칼과 조선의 돈 되는 관시 둘 다 무시할 수 없었다. 조선 왕에게 일본에 와서 무릎을 꿇으라고 전할 수도, 그렇다고 히데요시에게 조선 왕을 못 데려온다고 할 수도 없다. 진퇴양난이다. 그는 고민 끝에 일본에는 왕이 아파서 신하가 대신 오는 것으로 둘러대고, 조선에는 일반 국왕 등극 축하 사절로 통신사 파견을 요청한다. 조선은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조선인 포로 문제 등에 쓰시마가 적극적으로 나오는 성의를 보이자, 1590년 거의 100년 만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한다. 이렇게 조선은 통신사절로 알고 있지만, 상대는 항복사절로 알고 있는 이 웃픈 사기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에서 한양까지 친히 안내하며 조선 땅 침략의 길라잡이를 한 것은, 다름 아닌 조선이 동쪽 울타리라 믿었던 쓰시마인이었다. 문제는 조선만 자기 중심적인 눈을 가진 것이 아니라 쓰시마와 일본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서로의 자기 중심적 눈은 사건의 인식을 뒤틀리게 한다. 그 시작은 상대를 보지 않는 자기 중심에 갇힌 눈에서 비롯된다.   

 

 

어긋난 눈
첫 단추가 이 모양이니 다음 단추도 줄줄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1590년 황윤길, 김성일 등은 일본으로 향한다. 그들의 미션은 선조의 국서와 선물을 전달하고 답서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항복사절로 간 줄 모르는 통신사절의 인식은 쓰시마섬에 도착하자마자부터 다음 문제를 일으킨다. 김성일은 통신사 예우를 문제 삼는다. 내가 누구인줄 아느냐, 나는 조선의 통신사다!라며 가르친다. 전례상 선위사(宣慰使)가 본국에서 와 안내를 해야 하지만, 일본 입장에서 항복 사절을 모시러 올 일이 없었다. 중간에 낀 쓰시마는 선위사 도착이 풍랑으로 시간이 길어진다고 둘러댄다. 김성일은 오랑캐들의 예의 없음에 분노하며 조선도 일본이 왔을 때 선위사를 보내 부산에서 한양까지 이끌었음을 말하며, 잘못된 전례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위사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황윤길이 나서서 조선 조정에서 선위사를 기다려서 떠나라는 명은 없었고, 쓰시마에서만 거의 1달을 지체한 뒤라 우선 가자고 하지만 김성일은 듣지 않는다. 그의 마음속에는 명나라 연행사 경험이 작동했을 것이다. 예를 중시하는 명나라라면 있을 수 없는, 오랑캐들이나 하는 일을 그는 눈감을 수 없었을 것이다. 

 

쓰시마 다이묘가 통신사들이 머무는 숙소 뜰 안까지 가마를 타고 온 것으로 2차 사달이 난다. 다시, 김성일은 선배 통신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에서도 이런 전례가 없고, 조선도 물론 일본 사신을 무례하게 대한 방식이 없으며, 이런 전례를 남길 수 없다고 항변한다. 가마를 제지하지 못한 조선 통역관의 곤장을 쳐서 항의를 표현한다. 쓰시마 다이묘는 사과의 뜻으로 가마꾼들을 붙잡아, 곤장이 아니라 목을 친다. 살벌하다. 그제야 김성일은 잘못된 일이 자신의 기개 덕에 바로 잡혔다고 자평한다. 이에 김성일과 다른 파인 서인(西人) 정사 황윤길뿐만 아니라 같은 파 동인(東人) 서장관(書狀官) 허성(1548~1612)까지 나서서 오랑캐들은 서로 따질 상대가 아니라 은혜와 신뢰로 회유해야 한다고 말리지만, 조그마한 왜놈(키가 작다는 외모 비하까지 한다)들의 무례를 바로 잡지 않으면 사신을 우습게 봐서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강하게 나간다. 김성일은 이후에도 계속 목숨보다 예, 체모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에게 예와 체모가 없는 것은 죽음보다 못한 것이었다.


한편 조선 조정과 조선 통신사는 천황과 관백의 관계를 몰랐다. 천황은 일종의 상징적인 왕이고 관백이 나라의 정무를 총괄하는 관직임에도, 관백을 천황의 신하로 잘못 알고, 조선 국왕과 관백은 서로의 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 관백이 바뀐 것을 두고 일종의 쿠테타로 인한 신하로 오해한다. 조선 왕에게는 일본 자체가 오랑캐인데다가 히데요시는 그 오랑캐의 수장을 무력으로 바꾼 오랑캐 중의 오랑캐였다. 김성일은 왕도 아닌 이에게 절을 하려면 뜰 안(庭下拜)이 아니라 밖(楹外拜)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관철시켰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 의하면 당시 히데요시에게 절을 하는 장소로 뜰 안은 아예 존재하지 않아서 밖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사자들에게 당시 상황은 심각한 다큐였으나, 후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코메디 같은 장면이다.  


쓰시마섬 도착 후 결국 히데요시가 있는 사카이를 갔지만, 축하사절로 그토록 간절히 초대했다던 조선통신사가 기다리는데도 히데요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히데요시가 관동정벌을 나섰기 때문인데, 쓰시마는 사신을 맞을 궁궐 신축이 늦어지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항복사절인 통신사절, 선위사 대기 허위 보고, 있지도 않은 사신 맞이 궁궐 신축까지, 계속 거짓말을 부른다. 통신사 일행이 부산을 떠난 것이 1590년 3월이고 사카이를 간 것이 그해 11월이다. 거의 8개월이면 단기 여행이 아니라 거의 현지 체류를 한 긴 시간이다. 이 기간 동안 김성일은 위에서 설명한 에피소드 외에도 여러 차례 오랑캐들의 도에 어긋난 무례를 가르치고 호통친다. 히데요시가 조선이 감히 일본을 이길 꿈조차 꿀 수 없는 규모의 군대 위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숙소인 대각사로 나서서 관광을 하라고 반강제하지만 김성일은 응하지 않는다. 조선 사절로서 한 발자국도 대기 장소를 벗어나 밖을 나서지 않겠다고 버틴다. 황윤길이 일본의 정세 파악도 통신사의 임무 중 하나라고 설득해보지만 통하지 않는다. 김성일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밖으로 나섰고 세간의 전쟁 임박 이야기를 듣고 군사력의 위력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 후에 황윤길은 필유병화(必有兵火)라며 전쟁을 확신했다. 당연하다. 황윤길은 정세 파악을 위해 밖을 나섰기 때문에 징후를 봤고, 김성일은 밖을 나간 적이 없기에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과 눈의 충돌
우여곡절 끝 통신사들은 선조의 fine thank you, and you 수준의 의례적인 신의를 적은 국서를 전달한다. 하지만 의례적인 국서에 대한 히데요시의 답서 내용은 구체적으로 조선이 일본에 항복한 것임을 명시적으로 적은 글이었다. 일본은 답서에서 조선 국왕을 각하(閣下)라고 하며 속국의 왕으로 칭했다. 중국(명나라) 정복을 통해 일본의 군대가 들어갈 예정이니, 조선이 입조(入朝) 즉, 버선발로 먼저 뛰어들어라 내용이었다. 아버지의 나라로 섬기는 명나라를 일본과 함께, 앞장서 친다는 이야기이다. 방물(方物)을 잘 받았다는 확인 내용 중 방물은 공물(貢物)이라는 내용이다. 즉, 조선의 왕은 일본 왕의 밑이고, 공물을 일본에 선물로 바쳤다는 것이고, 앞으로 일본을 도와 명나라를 치는데 앞장선다는 뜻이다. 


통신사들은 무례한 답사를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일본은 아래 왕을 지칭하는 각하(閣下) 대신 동등한 왕을 뜻하는 전하(殿下)로, 조공을 뜻하는 방물(方物) 대신 동등한 관계의 선물인 예폐(禮幣)로 수정한다. 하지만 입조(入朝)의 주어는 문맥상 조선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라고 우격다짐하며, 입조 단어는 수정하지 않는다. 후문에 의하면 전하, 예폐로 단어를 대체할 수 있지만, 입조라는 단어는 대체할 단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입조라는 단어를 바꾸라고 주장하며 김성일은 남았지만 그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보름이 또 흘렀다. 제일 중요한 입조(入朝)라는 단어가 있는데 너네 왕을 귀국(貴國) 왕, 공물을 선물로 바꾼다고 문제가 달라질까도 싶다. 김성일의 마음이 편해지는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이후 전쟁 준비는 제대로 되지 못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 파견된 연행사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은 화살, 조총 만드는 재료부터 군사, 그 군사들이 먹을 식량까지, 거의 전 품목을 명나라에 원조 요청한다. 준비가 이렇게 안 될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전쟁이 여태 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수준이다. 전쟁은 났고, 준비가 이토록 미흡하고 그동안 명분과 탁상공론만 내세운 조선이었지만 많은 피해에도 불구하고 승전했다. 내륙에서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의병이 일본의 군수물자 내륙 수송로를 막고, 바다에서는 수군들이 온몸을 던져 적을 막고 배 밑에서는 노꾼들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노를 저었다. 전쟁의 영웅은 이름 없는 의병, 수군, 노꾼들이었다. 조선은 선조와 선조의 탈출을 돕는 자들을 최우선으로, 조선의 가오를 살린 명분주의자들만을 기록에 남겼다. 전쟁을 막지 못하고 적을 피했던 자들이 승전의 공이 있는 자들로 둔갑되어 있었다. 하지만 <해사록>에는 조선이 감추고 싶은 사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다른 것을 보는 어려움
<해사록>에 나오는 생소한 단어, 배경을 알지 못하면 까만 글씨에 불과할 문장을 허남린 선생님의 상세하고 자상한 설명 덕에 블록버스터 영화보다 재미있게 매달 임진왜란을 만날 수 있었다. 아마도 그 재미는 김성일의 이야기를 남 이야기처럼 웃프게 보다가 점점 그에게서 나와 내 이웃들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에 생겼던 것 같다. 나는 처음에는 선위사, 숙소 가마 진입, 관백 대우, 답신 문구가 뭐 그리 문제인가, 힘의 불균형으로 전쟁이 나는 와중에 절차와 명분이 가당키나 한 주제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김성일에게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었다. 지금 나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붙잡고 있는 주제들이 있다. 붙잡고 있는 대상이 중요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포기할 수 없다는 믿음의 눈, 그 갇힌 눈이 발생시키는 전쟁, 채무 대리 변제 등의 문제이다. 갇혀 있다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빠져나올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갇힌 눈에는 출입문이 없다. 죽을 만큼 아프고 힘들게 깨고 나오거나 강제로 무너져서 빠지게 되는 정도의 어려운 문제이다.  


벌거숭이 임금님처럼 주위에 말해줄 사람 없이 고립된 처지의 사람들을 보며 안타까운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친한 사람들에게 내가 혹시 저런 모습으로 살아가면 불쌍하게 내버려두지 말고, 말하기 곤란하더라도 꼭 나에게 알려달라는 말을 한다. 적극적으로 남의 말을 듣겠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나는 절대로 그런 모습이 아닐 것이라는 믿음도 포함되어 있다. 김성일도 황윤길과 동료들이 그에게 말을 안 한 것이 아니고, 그 골프 여제도 그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갇힌 곳에서 나오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공부 공동체에서도 예의를 갖추기는 하지만 껄끄러운 이야기를 한다. 들리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을 뿐이다. 아마 내 친구도 내가 그런 험한 상태이면 이야기해달라는 말에, 작은 따옴표로 어제까지 이야기했는데, 뭐 들었지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나도, 누가 귀에 대고 소리를 질러도 갇힌 곳에서 나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나도 지금 어딘가에 갇혀 있을 것이다. 내가 옳다고 확신할 때 김성일의 <해사록>을 떠올리며 숨을 한번 골라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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