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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나눌레오

[인류학을 나눌레오] 선으로서의 배움

by 북드라망 2024. 9. 6.

선으로서의 배움

 

진진(인문공간 세종)

 

두 명의 학생
우리 집에는 학생(學生)이 둘 있다. SKY이 인서울이니 좋은 대학 진학을 목표로, 시험에서 고득점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수험생과 인문공간세종에서 세미나를 하고 책을 읽고 숙제하고 답사를 가며 인류학을 공부하는 내가 그 주인공이다. 공부는 뭣보다 많이 아는 게 제일이기에 아이는 오늘도 책상에 머리를 파묻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중요한 개념들을 열심히 외운다. 그날그날을 허투로 보내지 않으려고 촘촘히 시간 계획을 짜고 실행 여부에 따라 ○, ×, △를 체크하며 모든 일과를 공부에 집중하고자 애쓴다. 외식 한 번 하자 해도 시간이 아깝다, 책을 추천해줘도 그럴 바엔 문제집을 풀겠다며, 대학 합격 전까지는 공부에 필요한 것 외에 어떤 것도 안 하겠단다. 나 또한 어떻게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까를 걱정하며, 시험 점수가 인생의 성적표인 마냥 노심초사다. 그래서 공부는 잘하느냐는 논외로 하고, 아이의 모든 일상은 좋은 성적 내기에 올인(all in)되어 있다.


나도 아이처럼 분량의 책을 읽고 숙제를 하고 세미나를 한다. 여기까지는 뭔가 비슷한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부하는 내용이나 방식이 다르다. 인류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게 뭘 배우는 거냐고 묻는데, 사실 거기에 명쾌한 답을 할 수 없는 게 인류학은 배워야 할 것이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읽었던 인류학 저서들은 모두 타문화 연구를 통해 인류 전체를 이해하고자 했는데, 나의 경우 매번 이전의 내 앎이 틀렸다는 것만 발견할 뿐이었다. 그 이해 안에서 내가 있는 곳을 새롭게 보게 되고 내 자리는 달라졌다. 학인들과 함께 하는 세미나도 정답인 선생님의 설명을 듣는 게 아니라 책을 읽고 각자에게 떠오른 생각들을 나누며 진행되기에, 오늘은 뭐에 대해 배웠다라는 식으로 정의되지 않았다. 내 생각이 책을 따라가고 오선민 선생님과 학인들과의 토론을 통해 각자의 생각은 서로에게 침투하고 얽혀드는데, 이때 나는 사실 뭘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생각들에 의해 나는 일상에서 이전에는 안 보였던 것들을 보게 되는 경험을 한다.


아이 눈에는 엄마가 매일 공부를 한다며 분주하게 지내긴 하는데, 뭘 많이 아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답사를 간다는데 꼭 놀러 다니는 것만 같은 게, 딴에는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아이의 눈에만 그런 게 아닌 것이, 주위 사람들도 의아한 눈초리로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하고 다니느냐고, 뭣하러 공부를 하냐고 묻는다. 그럴 바엔 돈 되는 자격증을 따라, 대학원에 가라며 충고하고 책은 언제 나오냐 묻는다. 그들이 뭐래도 나는 정답을 찾아가는 아이의 공부보다 매번의 앎이 깨지고 관점이 확장되는 내 공부가 실제 삶을 이해하는 데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세상을 제대로 배웠다고 느꼈을 때가 언제인지를 떠올려 보면, 그때보다는 지금의 방식으로 공부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된 공부같이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세상을 보는 눈이 확장되었다고 느끼는 이 배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품고 있던 중 나는 팀 잉골드의 <선인류학:line-anthropology>을 접하게 되었고, 그의 ‘선학(線學)’을 통해 배움에 대한 두 이미지와 그 중 하나인 선으로서의 내 공부를 설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글에서 그 시도를 해보려고 한다.

 

 


덩이 말고 선
인문세 <선인류학:line-anthropology> 특강은 『라인스Lines』(팀 잉골드 지음, 김지혜 옮김, 포도밭, 2007)의 일부분과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 The Life of Lines』(팀 잉골드 지음, 차은정 권혜윤 김성인 옮김, 이비, 2015) 전체를 읽고 진행되었다. 팀 잉골드는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에서 배움을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닌,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먼저 생명을 선으로 정의하고, 세상을 선의 뒤얽히는 생성의 공간으로 바라보는 그의 관점부터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생명을 체적을 가진 덩어리의 모습으로 떠올린다. 어떤 형태를 띠고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생명은 자기 신체를 가지고 있으며, 이 몸을 유지하고 자기 자리를 지켜내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이를 잃어버리는 순간 생명은 이 세상에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팀 잉골드는 생명의 이런 모습을 ‘덩이’라고 하며, 실제 생명은 외부와 구별되는 명확한 경계가 있는 덩이의 형태가 아닌 선의 뒤얽힘이라고 한다. 자신의 저서 『라인스』에서 그는 균사체를 생명의 전형으로 삼는데, 균사체는 내부와 외부가 없고 균사체의 선들은 온갖 방향으로 뻗어가며 주변에 침투한다. 생명을 덩이로 바라보는 관점은 너와 나를 구분하고 자기 자리와 서로의 경계만 확고히 할 뿐, 각 개체들이 서로 얽혀드는 삶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고 그 모습을 설명할 수도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에게 삶이란 너와 나를 구분하고 자기 영역을 지키고 확장하는 일이 아닌, 서로의 경계가 중첩되고 상호 침투하는 동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생명을 덩이가 아닌 선의 얽힘으로 바라볼 때 달라지는 것을 뭘까? 덩이적 사고는 형체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에 남아 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사라진 것들과 남겨진 흔적이나 영향은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개체의 삶은 자신을 지키거나 상대를 무화시키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선으로서의 삶the life of lines’은 주위의 생명과 사물, 온갖 것들을 붙잡기도, 쓸고 지나가기도, 침투해서 빠져나가기도 하며 서로 뒤얽힌다. 이때 선으로서의 생명에는 대기, 날씨, 분위기와 같이, 덩어리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까지도 포함된다. 선으로서의 생명은 온갖 것들과 쉼 없이 연결되고 뒤얽히기에 자기 자리를 지키고 고집할 수 없다.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흔적으로 남아 있기도 한 선을 알아보기 위해 다른 선들의 흔적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생명을 덩이와 선의 조합으로 정의하게 되면 배움의 이미지도 달라진다. 덩이는 배움에 있어 선생님과 학생, 배움의 목적과 배워야 할 것이 명확히 구분되고 정해져 있다. 학생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선생님이 가르치는 지식을 얼마나 빨리 많이 아느냐가 덩이의 공부다. 덩이로서의 배움은 세상을 제대로 배우지도 세계 속에 얽혀들지도 못한다. 팀 잉골드는 덩이가 배우는 지식은 현실의 세계와 동떨어져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선line은 누구에게나 선생님이 될 수 있으며 누구에게서나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할 것이 따로 없으며 어떤 것으로부터도 배울 수 있다. 선의 배움에서 선생님은 곳곳에 있고 배워야 할 것 또한 도처에 있다. 선은 앞선 선들이 지나간 흔적을 잘 살피고 그 뒤얽힌 선들 속에서 자신이 배울 만한 것을 찾아내야 한다.

 


선으로서의 인류학 『빙하 이후』
인문세에서는 ‘인류학’을 공부한다. 이번 시즌 인류학 세미나에서는 『빙하 이후』(스티븐 마이든 지음, 성춘택 옮김, 사회평론아카데미)를 통해 기원전 20,000년부터 기원전 5,000년 전까지 현생 인류의 삶을 따라가 보았다. 석기시대의 그들은 빙하시대 이후 급변하는 자연환경 속에서 야생의 다채로운 생물종들로부터 먹거리를 구하고 원거리 교역도 했다. 지구 곳곳으로 이동하며 수렵채집생활을 하던 인류의 모습은 내게 풍요롭다는 게 뭔지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인간 편의대로 동식물을 길들이고 먹고 쓸 것들이 넘쳐나는 삶이 풍요롭고 자유롭다고 믿었는데, 사냥한 동물을 하나 남김없이 먹고 생활에 이용하는 그들을 보니 내 식탁의 음식과 물건들이 초라하고 참 볼품없이 느껴졌다. 내가 그것들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걸 보니 길들여진 것은 외려 나인 것 같았다.


나는 이번 시즌 『빙하 이후』를 읽으며 종종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에서야 내 불편을 팀 잉골드의 선학(線學)으로 해석해보니 나는 스스로 덩이적 사고에 갇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의 저자 스티븐 마이든은 존 러복이라는 역사가를 여행자로 내세워 구석기로 시간여행을 하게 한다. 존 러복은 빙하 이후 사람들의 유적지를 따라 대륙을 이동하고 함께 생활하며 당시 그들이 어떻게 지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러복의 유적지 여행 다음에는 이 유적지를 발견하고 유물들을 발굴한 고고학자들의 연구와 주장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들의 견해는 다른 고고학자나 스티븐 마이든에 의해 지지를 받기도 반박되기도 한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역사가 존 러복과 고고학자들, 저자 스티븐 마이든 모두 정답을 말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견해는 미래에 발굴될 유적지나 유물에 의해 언제 뒤집어질지 몰랐고, 존 러복이 여행하는 구석기 사람들의 생활도 검증된 게 아니었다. 나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고 명백하게 밝혀지지도 않은, 단지 유물에 남겨져 있는 흔적을 통해 당시의 생활을 유추해 볼 뿐인 이야기를 왜 공부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중 진실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만 애썼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남겨지지 않은 것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했고 알 필요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한번은 책상에 마주앉은 딸아이가 시험을 앞두고 역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겨우 한두 페이지로 구석기와 신석기를 정리하고 설명한 교과서와 달리, 주먹도끼만큼의 타격감을 가졌다고 해도 될 정도로 방대한 양의 석기시대 인류생활을 공부하고 있는 나는, 드디어 내 공부의 위력을 드러낼 때가 왔구나 싶었다. 하지만 막상 아이에게 내가 책에서 만났던 구석기인들의 생활을 이야기해주려 했을 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나는 학교의 역사 공부와 인류학 공부의 결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교과서는 ‘구석기-이동-수렵채집-무리’과 ‘신석기-정주-농경-부족국가’의 셋트로 시기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었지만, 실제 연구를 통해 밝혀진 그들의 삶은 그런 식으로 명확히 구분되지도 않았고 정주하며 수렵채집생활을 하는 유적지는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또 구석기-뗀석기, 신석기-간석기 식으로 남아 있는 유물과 시대를 연결하는 공부는 실제 석기시대 사람들의 삶을 그려볼 수 없었다. 반면, 『빙하 이후』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남겨진 흔적으로부터 생활을 유추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형태를 남기는 덩이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교과서의 관점과 유적지나 유물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부터 인류가 지나간 길을 유추해내는 인류학의 선적인 사고가 대비되어 내게 다가왔다. 

 

 


선으로서의 인류학 답사
인류학 세미나에서는 공부하고 답사하고 글을 쓰는 ‘인류학 답사’를 떠난다. 이번 시즌에는 구석기인들의 만능 도구 주먹도끼를 보기 위해 공주 석장리 박물관과 연천 전곡리 유적지를, 동굴벽화를 그린 인류를 이해해보기 위해 울산 반구대의 암각화를,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이들로부터 구석기인들을 이해해보기 위해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전시에 다녀왔다. 책을 통해 바라본 구석기인들의 생활은 지금과는 그 간극이 너무 커 사실 잘 와 닿지 않는다. 유물을 직접 보고 이해해보려 애써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삶이 드라마틱하게 이해되거나 현실적으로 다가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답사를 왜 떠나는가 묻겠지만, 분명한 건 세미나에서 공부한 내용을 확인하고 그 앎을 확실히 하고자 답사를 가는 것은 아니다.


오선민 선생님은 답사에서 되도록 박물관의 오디오 가이드를 이용하지 않고 유물들을 관람해보라고 권한다. 그 정보를 정답으로 가져가고 거기에 내 생각이 갇히는 걸 피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여러 유물들(정말 많은 유물들을 본다)을 유심히 살펴보다 보면 인류학 수업을 통해 갖게 된 관점과 정보는 더욱 산만하게 흩어진다. 그러다 답사가 진행되는 동안 또는 마무리하며 학인들과 나누는 이야기들 중 몇 가지가 내 마음에 들어온다. 또 내가 처음 떠올렸던 생각거리는 버려지기도 하고 다른 학인의 생각으로부터 다른 생각거리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내 생각이 따라가고 얽히게 되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상상력이라고 팀 잉골드는 말한다.


침투하고 스며들고 얽혀든 생각들이 하나의 주제로 매듭지어지는 것이 답사기다. 답사기는 공부한 내용과 답사와 관련해서라면 어떠한 내용이어도 관계없다. 이 공부가 어떤 키워드(key word)로 매듭지어지고 이야기가 펼쳐질지는 정말이지 써봐야 알게 된다. 팀 잉골드는 알아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나아가면서 알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움직이는 것은 아는 것이다’고 그는 말한다. ‘답사 3단 콤보’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은 타자들의 삶을 통해 내가 있는 이곳으로부터 멀어지기, 내 삶을 낯설게 보기이다. 

 


정답이 없는 공부
인류학을 처음 공부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야였다. 나더러 지금 저들처럼 살라는 건가라는 반문이 드는데, 이게 덩이적 사고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이런 생각은 불쑥불쑥 올라온다. 그만큼 우리는 개체를 덩이로 사고하고 공부하는 데 익숙하다. 책이 정답을 알려주길 기대하고 그 안에서 그걸 잘 찾아내고 빨리 익히는 게 공부를 잘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내가 아닌 것들과 내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계속 쳐내려고만 한다. 덩이적 사고에 익숙해져 나도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성가셔하고 제쳐두려고 하는데,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면 공부로 인해 내 삶이 고립된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받는다. 세상을 알아가는 방법으로서의 공부가 유일한 목적이 되어버리면 삶은 정말 덩이로 무겁게 내려앉는다.


세상으로 풀려나와 다른 선들과 서로 뒤얽힐 때 필요한 것은 『빙하 이후』의 저자 스티븐 마이든처럼 앞서 간 이들의 뒤얽힌 선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힘이다. 마이든은 그곳을 지나간 여러 고고학자들의 연구와 정보를 충실히 따라갔다. 주석의 방대한 참고자료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 자료들은 책에서 정답으로 그대로 사용되지 않고 그에게 들어와 반박되기도 하고 그의 견해와 섞이기도 한다. 이렇게 매듭지어진 그의 주장은 유물과 자연의 흔적을 통해 구석기인들의 이야기로 얽혀진다. 개념과 전문용어 덩어리들이 아닌 이야기는 나와 같은 일반인들에게 더 쉽게 스며들고 얽혀든다.


이 글을 읽으며 다시 덩이로 되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그럼 학교 공부를 하지 말라는 건가, 『빙하 이후』를 읽으라는 건가, 인류학을 공부하라는 건가, 하고 말이다. (물론 인류학이 선으로 공부하기에 좋은 것은 맞는 것 같다.^^) 지식을 쌓는 공부도 물론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목적이 되어 정답만을 찾아 나서게 되면, 우리가 세상에서 보게 되는 것은 정답 아닌 것투성이일 것이다. 팀 잉골드는 선의 배움을 등에 사로잡히는 배움이라고 한다. 등에 사로잡히는 배움은 앞 사람의 뒤를 쫓아가면서 ‘이미 있는’ 수많은 것에 모든 감각을 열고 주의를 기울일 때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사로잡을 온갖 것들이 넘쳐난다고 그는 말한다. 방향은 있지만 정해진 경로가 없이, 앞선 사람들의 등을 보고 그들의 행로를 따라갈 때 배움이 일어난다. 사로잡을 만한 등을 찾아 두 눈을 크게 뜨고 온 감각을 열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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