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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걷다보면

[기린의 걷다보면] 걷기, 로망에서 리츄얼로

by 북드라망 2024. 7. 3.

걷기, 로망에서 리츄얼로

 

30대 중반을 통과하던 무렵이었다. 신문에서 일본 시코쿠섬에 위치한 88개의 절을 순례하는 도보 여행가의 여행기를 보게 되었다. 1번 절에서 출발해서 88번까지 이르는 완주 과정 자체가 내게는 경이롭게 다가왔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방을 빼고 적금을 깨 여행을 떠났다는 이력도 그랬고, 여자 혼자서 그 길을 완주하는 실행력도 멋있어 보였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좋았고, 오랜 걷기로 발가락에 생긴 물집 터뜨리기에 점점 능숙해지는 변화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홀가분하게 떠난 그의 도전이 부러웠다. 언젠가는 나도 한 번 해 봐야지 다짐했다.

그렇지만 나는 하던 일을 때려치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다짐은 서서히 잊혔다. 시간이 지나 인문학공부를 하게 되면서 다른 일상으로 접어들었고, 타고 다녔던 승용차를 처분했다. 집을 나서서 걷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그사이 걷기가 점점 더 많은 이들의 관심 영역으로 떠올랐다. 제주도 올레길이나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걷는 이야기들이 더 자주 들려왔다. 시코쿠 순례길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끌리지는 않았다. 그러다 고향집을 통과하는 해파랑길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긴 트레일 코스로 50개 코스로 이루어진 750km의 길이었다. 고향집 주변 코스부터 몇 코스를 걷기 시작하면서 다시 예전의 그 다짐이 떠올랐다. 나도 한번 해 봐야지.

 



해파랑길을 검색하다보니 완주한 사람들의 사연도 올라왔다. 명예퇴직을 한 후 이 길을 완주하면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는 50대 중년의 이야기도 있었고, 전국의 길을 다 걷겠다는 의지를 실천하는 걷기의 달인도 있었다.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 길을 걷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에서는 해야 할 일들이 뒤엉켜 떠올랐지만 이것부터다 싶은 것이 없었다. 친구들한테 해파랑길을 완주하고 싶다고 했더니 대부분 해보든지, 근데 왜? 이런 표정들이었다. 굳이 이유를 찾아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무작정 길을 나선다하기에도 어딘지 석연찮았다. 도보 여행가의 글을 읽던 시간에서 20년이 훌쩍 지나 50대 중반인 것도 한 몫을 했다.

<와일드>라는 영화가 있다. 개봉 영화 정보에서 알게 된 영화였는데 챙겨보진 않았다가 최근 넷플릭스에서 이 영화를 찾아보았다. 2014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셰릴 스트레이드 라는 여성이 20대 후반에 4285km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을 혼자서 완주한 이야기이다. 미국 3대 트레일 중 가장 길고 험하다는 이 길은 미국서부를 종단하는 길로 사막을 통과하고 해발 4천 미터가 넘는 산을 오르고 빙하와 눈이 쌓인 산길도 가야하는 장장 6개월이 걸리는 길이라고 한다. 영화 도입부에 야리야리한 리즈 위더스푼이 30키로가 넘어 보이는 배낭을 메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피시티’를 걷는 셰릴의 여정과 이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과거를 교차편집하면서 나아간다. 아버지의 학대, 어머니의 죽음, 뿔뿔이 흩어진 가족, 그리고 이혼까지 웬만한 인생의 역경은 거의 다 겪은 이야기는 걷는 길의 풍광보다 자극적이었다. 40대의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슬픔을 잊기 위해 마약에 빠졌다. 결국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임신까지 하게 되었을 때 그녀의 절망은 바닥을 쳤다. 그러다 피시티를 안내하는 책자를 보게 되었고 충동적으로 길을 떠나게 되었다.

길 위에서 마주치는 자연이나 사람, 동물까지 어느 하나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다. 사막의 열기는 극단의 갈증으로 위협했고, 낯선 남자의 도움을 받는 일은 긴장감을 증폭시켰다. 허허벌판에서 달랑 하나 텐트에서 잠드는 밤은 온갖 야생 동물들의 공격에 노출되어야 했다. 걷기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수도 없이 닥쳤지만 결국 그녀는 다시 걸었다. 걸으면서 겪는 자연이 험난하면 할수록 이미 지나온 삶이 주는 상실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는 시간이었다.
 
트레일의 중간 중간 물과 식량 등을 보급 받을 수 있는 휴식처도 있었다.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녀가 걸어오면서 남긴 방명록의 당사자임을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혼자서 걷고 있는 그녀의 대담함에 다들 놀랐고 어느 순간 그녀는 ‘피시티의 여왕’으로 회자 되었다. 이혼한 남편이 보내주는 보급품을 챙기는가 하면, 하룻밤의 연인을 만나는 장면도 있다. 드디어 길의 끝에 이르렀지만, 이후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때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는고백으로 영화는 끝났다.

 

 


영화다 보고 나니 뭔가 허전했다. 20대인 주인공의 드라마틱한 과거는 너무 자주 오버랩 되었고, 자연의 일부로 스며들어 걷는 풍광은 배경화면에 불과했다. 길에서 풍기는 야생미에 비해 여주인공의 젊음이 너무 인공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시코쿠 순례길을 상상하고 해파랑길 완주에 나서고 싶었던 기대로 가슴이 뛰었던 순간을 느끼고 싶었던 걸까. 주인공처럼 젊지도 않고, 후방에서 보급품에 돈까지 챙겨 보내줄 전남편도, 밑바닥이라 여길만한 과거도 없어서 일까. 영화를 다 보고나니 언젠가는 그 길들을 걷겠다는 생각이 더 이상 나의 로망이 아니라는 건 알게 되었다. 그 마음이 다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되는 허전함이었다.

4월, 온 천지가 봄의 꽃들이 화사하다. 점심을 먹고 나면 곧장 공간을 나선다. 광교산으로 통하는 등산로 입구 분홍빛으로 일렁이는 진달래 꽃빛깔들이 멀리서도 발길을 잡아 끈다. 그 뒤로 벚꽃나무 한 그루에서도 벚꽃잎이 하하 호호 하면서 부르는 것 같다. 종잡을 수 없는 기온의 변화로 한꺼번에 피는 꽃들이 안쓰럽지만, 한편으로 그렇게 만발하는 꽃들로 기뻐지는 것도 사실이다. 오르막으로 접어들면서 호흡을 가누고 한 걸음 한 걸음 몸의 무게를 땅에 싣고 걷다 보면, 산 밑에 있는 데서 공부하면서 보내고 있는 지금을 매번 감사하게 된다. 한 시간쯤 계절을 느끼면서 걷고 나면 오후의 일상에 활기가 돋는 것을 체감한다. 그래서 걷기는 여전히 나의 일상을 북돋는 리츄얼이자 또 다른 로망을 품게 하는 활동이다. 걷기 좋은 계절, 어떤 로망이 다가올지 기다려진다.

 

 

글_기린(문탁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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