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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나눌레오

[인류학을 나눌레오] 이상한 나라의 신뢰

by 북드라망 2024. 6. 7.

이상한 나라의 신뢰

진진(인문공간 세종)

 
나는 사실 이 글이 공개되지 않았으면 한다. 나를 아는 사람, 특히 나와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는 더더욱 그런데, 그들이 이 글을 본다면 이중인격자 같은 내 모습에 기막혀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 약속을 못 지키기로 유명하다. 아니, 이 글 이후로 이젠 ‘안’ 지키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연애를 할 때도 남편이 집 앞에서 한두 시간을 기다리는 건 예사였고, 친구들은 약속 시간을 나한테만 한 시간은 당겨서 말해야 한다고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와 연을 끊지 않은 친구들이 참 고맙다. 그렇다면 이제는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느냐? 그럴리가. 예전보다는 많이 양호해졌지만, 여전히 내겐 약속 시간 지키는 일이 참 어렵다.

사람과의 약속뿐만이 아니다. 수업 참여, 영화나 공연 관람, 대중교통 이용 시에도 먼저 가서 기다리는 법이 없다. 어차피 시작 전에만 들어가면 되지, 왜, 굳이, 뭐하러 미리 가서 시간을 죽이냐는 생각이다. 그러다 보니 항상 간당간당하게 시간 안에 세이프하거나 지각하기 일쑤다. 나는 어디에서도 시간 약속에 있어서 신뢰를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인문공간세종에(이하 인문세)만 가면 시간 약속을 지키고, 심지어 사람들을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 같은 사람인가 싶게, 인문세만 가면 변신하는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남편은 기막혀 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대견해 하기도 한다. ‘뭐 참, 드디어 쟤가 이제 인간이 되려나’하는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다.

나의 변신은 시간 약속 지키기 말고도 또 있다. 인문세에 가면 청소를 참 열심히 한다. 평소 집에서 청소하고 정돈하기를 좋아는 한다. 문제는 회사 일에 책을 읽고 숙제까지 하려면, 쓸고 닦고 정리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방안에는 머리카락과 먼지가 구석에서 굴러다니고 찬장을 열면 물건들이 뒤죽박죽 뒤얽혀 있다. 결국 급한 대로 대충 먼지만 휘리릭 닦아 청소하고, 물건들을 적당히 쑤셔 넣는 일이 다반사가 돼버렸다. 인문세만 가면 나는 왜 이렇게 시간과 사람, 물건에 마음을 다하게 되는 걸까? 인문세는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사람을 두 얼굴로 만드는 걸까? 무슨 사이비 종교도, 갑을의 위계적 단체도 아니고, 함께 공부를 좀 해보겠다고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일 뿐인데 말이다. 공간에 들어서면 딴 사람이 되는, 이상한 나라의 정체를 한번 파헤쳐보자.
 


  
숙제를 싣고 떠나는 호박마차
인문세에는 자정이 되면 떠나는 호박마차에 숙제를 던져 넣으려 정신없이 내달리는 학인들이 있다. 흡사 12시가 되면 호박마차에 몸을 싣고 무도회장을 떠나야 하는 신데렐라 같다. 지금은 숙제 제출 시간이 밤11시, 저녁6시로 세미나별로 조금씩 조정이 되었지만, 12시가 되면 마법이 풀리고 마는 공주들처럼 인문세 네이버 카페는 마차에 올라타려는 숙제들로 어김없이 분주하다. 온라인뿐만 아니라, 좌충우돌 현실 세계에서도 대화 시도 및 접근 금지 명령에, 집안 분위기는 자못 살벌해진다. 시간 안에 숙제를 안착시켜 놓고 나면 그제야 헤벌쭉해져서는 아까 하려고 했던 말을 해보라며 주위를 둘러본다. 과제 제출 임박 시간이 다가오면 말도 시키지 마라, 가까이 오지도 말라며 잔뜩 날을 세우는 것이, 비단 나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과제가 뭐라고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일단 숙제부터 좀 내고 보자며 안달복달인 것일까? 신데렐라처럼 호박마차에 못 올라탄다고 마법이 풀릴 것도 아니고, 신분 상승의 미래가 펼쳐질 인생 역전의 순간도 아닌데 말이다. 인문세에서 공부하는 학인들에게는 지켜야 하는 몇 가지 약속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과제 제출과 시간 지키기이다. 약속된 시간 안에 업로드된 과제만을 가지고 세미나는 진행되며, 단 일 분이라도 늦은 글은 토론의 주제로 논의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한 학인에 의해 이름 붙여진 ‘숙제를 싣고 떠나는 호박마차’는 여기에서 연유했다. 한데 이게 뭐 절대반지 같은 거냐 하면 사실 또 그렇지만도 않은 게, 시간 안에 과제가 들어왔다고 해서 프리 패스권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시간 내 과제 제출은 세미나에 충실하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에 불과할 뿐, 과제의 내용과 형식은 세미나에서 따로 문제 삼아진다.

일이 분은 봐줄 만도 한데, 인문세는 시간에 왜 이렇게 팍팍할까? 그렇다고 왜 또 우리는 여기에 맞추겠다고 목숨 걸고 매달리고 있을까? 인문세 세미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병행되어 진행되는데, 물리적 거리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장점 때문에 ‘zoom’의 온라인 방식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내가 처음 인문세에 접속한 팬데믹 시기는 집합 금지명령으로 대부분의 세미나가 온라인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네이버 카페는 벽이나 문으로 구획되고 책상과 의자가 놓인 물리적 장소는 아니었지만, 세미나 모집 공지와 신청 댓글, 과제와 후기로 만들어진 공간이었고, ‘zoom’ 세미나실은 시간에 맞춰 어디에서나 펼치고 접을 수 있는, 인문세의 공부가 펼쳐지는 또 하나의 장이었다. 나는 네모난 화면을 펼치고 손가락 몇 번만 까딱하는 편리한 방식으로 바로 치열한 공부의 현장으로 이동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온라인 공간은 무슨 순간이동인 양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즉각적으로 접속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신체적 연결이 부분적이어서 접속의 힘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화면을 사이에 두고 접속하기에 화면 바깥의 격식들은 생략되었고, 오프라인 공부 공간에서는 불가한 일들이 온라인상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몸이 다 나오지 않는 온라인 공간에서 세미나가 진행되기에, 우리는 약속된 시간을 절대로 건드리지 않고 그 시간 동안 모두가 화면을 켜서 세미나 참여자들의 연결 접속을 강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온라인의 힘을 가져갔다. 일 분이라는 작은 시간도 지키고자 각자의 자리에서 쏟고 있는 힘들이 온라인 공부 공간을 단단히 가져갈 수 있게 했고, 이곳이 배우는 사람이 모인 곳임을, 배우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해주고 있었다. 공부란 대단한 앎을 얻는 일이 아니라, 시간 약속에 있어서 작은 부분도 지키려고 애쓰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자본이 떠받치는 공간의 무게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심리학회 강연문을 엮은 책 『몸 테크닉』(마르셀 모스 지음, 박정호 옮김, 파이돈)에서 인간의 신체란 그가 속한 사회의 형식에 의해 모든 행동 양식이 깎인다고 했다. 시간을 지키는 신체로 그렇게 깎으려 해도 안 깎이던 내 몸이 인문세에서 공부하고부터는 시간 안에 숙제를 장착시키고 시작도 전에 자리에 앉아 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시간 약속 지키기는 인문세에서 공부하려면 몸에 꼭 새겨야 하는 하나의 형식이었다. 이 신뢰 관계에 나를 밀어 넣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일찍 시작하고 미리 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공부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고, 약속을 지키는 신체가 되다보니 공부에도 힘이 붙기 시작했다. 또 온라인에서 만들어진 신체 형식을 오프라인 공간에서 실험하면 그 힘이 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생겼다. 그래서 <들뢰즈의 천의 고원> 세미나에서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오프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공부를 더 밀도 있게 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또 온라인으로 만든 형식을 오프라인으로 그대로 가져오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세미나에 참여하는 학인들이 어디에서 뭘 타고 오는지, 이후 스케줄이 있는지 없는지, 끝나고 어디로 몇 시까지 돌아가야 하는지, 세종, 용인, 서울, 부천 등지에 흩어져 사는 학인들이 한 곳에 모였다가 각자의 자리로 복귀해야 하기에 이동 수단과 시간, 거리, 비용 등을 치밀하게 고려해서 장소를 정해야 했다. 인문세의 본 캠프 세종에서 만나려면 다수의 학인들이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하는 부담이 있었고, 그걸 감수하더라도 생업에 복귀해야 하는 학인의 시간이 안 맞았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세미나를 위해 만난 곳은 모든 길이 그곳으로 통한다는 서울역 주변이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여기가 중심이다 보니 땅값이 비싸고, 그러다 보니 또 공간이용료가 어마무시했다. 세미나가 3시간인데, 기본이용료가 12만 원에 시간이 조금이라도 오버되면 추가 금액을 내야 했다. 게다가 맨입으로 공부할 수 있나, 입에 ‘달달이’라도 하나 넣고 기분 좋게 공부하려면, 이건 세미나비보다 부대비용이 더 나가게 생겼으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다. 그렇다고 음료 한 잔만 주문하면 몇 시간이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카페에서 세미나를 해보니, 또 음료 한 잔으로 그 자리를 죽치고 있는 게 누가 눈치를 주지는 않는지, 자리가 없어 못 앉는 손님은 없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또 설명을 나눌 만한 칠판이 없는 것도 불편하고 주위 테이블의 대화들도 귀에 쏙쏙 들어와 세미나에 집중이 안 됐다. 공부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돈의 무게가 떠받치는 공간의 힘에 흘리고 있으니 공부가 잘될 턱이 없었다.

아슬아슬하던 공간 문제는 마지막 에세이 발표날 여실히 드러났다. 애초 세미나 모집에 공지된 장소는 세종의 인문세 연구실이었다. 학기의 공부를 마무리하기 위해 고려된 장소였지만, 세미나 학인 중 두 명이 세종까지의 이동이 시간상 어렵고 서울에서의 세미나만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기존의 계획대로 세종에서 세미나를 진행할 것이냐, 다수의 참석을 위해 공지와 달리 장소를 서울로 바꿀 것이냐. 사실 두 학인은 이전 오프라인 세미나에도 결석이 잦았던 이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서울에서 세미나를 진행하더라도 불참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하지만 또 그렇게 단정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혹자는 그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냐고, 세종에서 해도 두 사람은 온라인으로 접속할 수 있고, 서울에서 하더라도 참석한 사람들끼리 하면 되지, 굳이 안 올 수도 있는 사람까지 고려해야 할 일이냐 할지 모른다. 하지만, 공부가 잘되는 공간을 찾아 매번을 실험했던 우리에게 이는 중요한 문제였다.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마지막 시간인 만큼 ‘다 같이’ 세미나를 마무리하는 데에 방점을 두고 서울 정동길의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 대관을 예약했다. 
 

 

예상대로, 그리고 혹시나 했던 우리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그 두 학인은 마지막 세미나에 결석했다. 세미나 참석의 약속이 깨지자 크게 잡은 공간은 허전하게 느껴졌고, 공부의 힘이 그 빈자리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매번의 세미나에서 우리는 전체가 만들어갈 공부를 염두에 두고 그 인원이 공부하기에 적당한 크기의 공간을 알아보고, 비용과 곳곳에서 오고 가는 학인들의 이동시간을 고려해서 세미나 장소를 예약했다. 공간을 이동하며 그곳을 공부 공간으로 만든다는 것은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 것이냐를 고려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동 거리와 시간이 돈으로 환산되고 돈을 낸 만큼 그 장소를 사용할 수 있는 오프라인의 공간은 시간 약속을 지키는 신뢰로 만들어가는 우리의 방식과는 잘 맞지 않았다. 세미나 신청에서 이미 비용은 지불했으니 참석하고 안 하고는 그 사람의 자유가 아닌가 하겠지만, 공부하는 공간은 돈을 내면 오든 말든 그만인 방식으로는 돌아가지 않았고, 그런 식으로는 공부하는 공간의 신뢰를 만들 수 없었다. 오프라인 공간에서 자본이 떠받치는 힘은 생각보다 강했고, 그곳을 사용하는 한 우리는 그 힘 밖에 있기 어려웠다.
  

쓸고 닦고 조이며 공간선물에 답하기
이렇게 매번 다른 공간을 선택하고 실험하던 우리에게 선물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고미숙 선생님께서 필동의 <지니 스튜디오>를 인문세 학인들이 언제든 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내주신 것이다. 일정한 비용을 지불해야만 공간을 점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못 하나 박는 것도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한 시대에 선생님은 우리의 뭘 보고 아무 조건 없이 그곳을 허락해 주셨을까? 선생님의 마음은 알 길이 없지만, 나는 이 선물이 너희라면 이 공간을 맡겨도 되겠다고 여기신 선생님의 신뢰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이곳을 인문세의 서울 캠프로 부르고, 어떻게 하면 공부가 더 잘 되는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실천했다. 

서울 캠프에서 첫 세미나를 시작하기 일주일 전, 우리는 각자 청소도구를 들고 집합했다. 계약서 한 장 없이 공간을 얻어 쓰는데 뭐라도 해야지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그곳이 어떤 물건들로 들어차 있는지 책상과 의자가 인원수만큼은 있는지와 같은 상황 파악도 필요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딱히 청소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깨끗하고, 내일 당장 세미나를 시작해도 될 정도로 공부하기 안성맞춤이었다. 그래도 이제 우리가 공부할 공간이라고 생각하니, 굳이 청소하지 않아도 될 만한 곳이지만 구석구석을 살피며 없는 먼지도 끌어내 쓸고 닦기를 열심히 하게 되었다. 그러고서는 어떻게 하면 공부가 더 잘 될까를 고민하며 칠판을 여기에 뒀다 저기로 옮겼다 하며 둘러앉아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화장실 청소는 매주 하겠다, 나무에 물도 매주 주겠다고 우리끼리 약속하고, 몇 번이나 주면 되는지 푯말을 달자, 커튼을 바꿀까, 벽지를 새로 바를까를 의논도 하며 말이다. 

그렇다고 그곳을 우리 편의대로만 마구잡이로 바꿀 수는 없었다. 사실 나는 우리가 약간 애매한 처지에 있다고도 생각되었는데, 인문세가 그곳의 주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빌려 쓰는 처지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손을 대도 되는지, 어떤 규칙을 지켜야 하는 지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우리가 언제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주어졌지만 남산강학원, 감이당, 사이재와의 관계망에 있는 곳이었기에, 공동체들이 어떤 식으로 공간을 사용하는지를 보고 이곳의 물건들과 관계 맺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공간을 사용했던 방식을 이 연결망 안에서 구현해 내는 것이 고미숙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신뢰에 우리가 답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그 공간을 잘 살펴 있는 물건들을 이용하고 적당한 선에서 바꾸었다. 

그곳을 공부가 잘되는 곳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기존의 물건들 자리를 재배치하고 정돈하며 청소를 잘하려고 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내가 안 해서 그렇지, 먼지 하나 없이 청소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 매주 세미나를 마치고 친구들과 나는 서로 번갈아 가며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당기고 대걸레로 밀고, 청소할 거리도 없는 화장실을 일주일에 한 번씩 세제를 풀어 청소했다. 우리는 자기 집 화장실은 지금 몇 주째 청소를 안 해 물때에 곰팡이가 자리를 트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며, 우스갯소리를 하며 청소를 했다. 한번은 서울 캠프에서 사용한 걸레를 집에 가져가서 빨아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두말 않고 걸레를 자신의 가방에 넣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차마 내가 가져가겠다고 말하지 못했는데, 집 청소도 제대로 안 하는 내가 그 걸레를 들고 갔을 때 남편의 따가운 눈초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 캠프에는 다리가 쑥 빠져버리는 책상이 하나 있다. 누가 다칠까 책상을 바꿔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문득 그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상을 그곳에 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일단 고쳐보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누군가가 공구를 들고 가겠다고 했고, 우리는 책상의 구조를 고려해 잡다한 도구들을 들고 만났다. 고무장갑, 양면테이프 등등이 그것이었는데, 고무장갑을 잘라 다리와 책상의 연결 부위에 끼워 넣어 홈을 빡빡하게 고정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책상을 뒤집어 상판을 바닥에 놓고 각자 다리 하나씩을 쥐고 이렇게 저렇게 낑낑거리며 끼웠다. 와~ 됐다며 환호성을 지르며 책상을 바로 세웠는데, 웬걸 책상의 네 다리가 균형이 안 맞다. 다리는 끼워졌는데 책상이 이리저리 흔들거린다. 푸하하하! 우리는 다리가 안 빠지는 선에서 만족하고 책상을 제자리에 두었다. 그 책상에 얽힌 사연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 책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 책상에는 그곳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궁리한 우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의 눈에만 보이는 흔적 말이다. 책상뿐만이 아니다. 서울 캠프 곳곳의 물건과 공간이 우리의 자취들로 가득하다. 
 

 

공부하는 공간의 신뢰
나는 왜 인문세만 가면 시간 약속을 지키고, 먼저 가서 그 공부 공간을 열고, 열심히 쓸고 닦으며 그곳을 깨끗이 했을까? 그곳에만 가면 다른 사람이 되는 나를 되짚어 보며,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나를 본다. 학교 다닐 때도 지각을 밥 먹듯이 했다. 수업에 늦고 안 늦고, 참석하고 안 하고의 고려에 나는 내 앎밖에 없었고,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 또한 안중에 없었다. 나는 배운다는 것을 지식을 머리에 넣는 일로, 성적만 잘 받으면 되는 일로 생각했었다. 많이 알고 공부만 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내게 공부란 자세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 내가 인문세만 가면 공부하는 사람으로 환골탈태하며 다른 사람이 된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데서 시작해서 청소를 열심히 하는 일로 이어진다. 인문세 공부 공간은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기에 만들어졌고, 서울 캠프에서 그곳의 물건들과 관계 맺으면서 우리의 공부 공간은 확장되었다. 시간 약속에 있어 단 일 분이라도 허투루 보지 않으려는 노력,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할 별것 아닌 일을 도맡아 하는 것, 안 해도 그만일 것 같은 청소를 열심히 하며 그곳의 물건들과 엮어낸 일들은 함께 공부하는 공간의 신뢰를 만들어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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