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과 무능에 관하여
- 엘리자베스 문, 『잔류 인구』, 강선재 옮김, 푸른숲, 2021
대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서, 또는 자신에게서 참을 수 없는 것 한 두가지 쯤은 있게 마련이다. 나의 경우엔 내가 무능하게 느껴지거나, 무능하게 여겨지는 것을 참기가 어렵다. 지금은 그렇게 ‘참기 어려운 것’이 있다는 것 자체를 ‘무능’이라고 여기게 되어서 나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지거나 여겨지는 것에 대해 예전만큼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는다. 예전에는 그 ‘참기 어려운 것’ 때문에, 그러니까 그런 감각 자체 때문에 괴로웠고 그걸 이겨내려고 애쓰느라 힘들었다. 사실 이 문제는 내 인생의 주요한 몇가지 테마 중에 하나일 정도로 현재의 나의 인격이나 반응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점에 있어서 만큼은 꽤 유용한 괴로움과 힘듦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오늘의 내가 어떤 면에서 유능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능’이 너무 싫었던 나머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과정에서 겨우 얻어낸 것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거기엔 오직 ‘나’ 혼자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게 우리가 구사하는 언어가 가진 한계일텐데, 그래서 꼭 단서를 달아야만 한다. 세상에 어떤 것도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사실,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는 종종 그 점을 잊어버리곤 하는데 그럴 때면 내가 먹는 음식과 저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 태양을 가리는 구름과 비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불타는 큰 공이 이 세계의 무언가를 지탱해 주고 있지 않다면 모든 것이 의미를 잃고 사라지고 만다. 태양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그렇다. 태양계가 태양을 태양으로 지탱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에서 하찮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오필리아는 할머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간의 생활이 기술적인 것들과 더 긴밀하게 결합될수록 ‘할머니’들은 대개 무능하다고 여겨지게 마련이다. 당장 아이패드가 종종 화면에 띄우는 ‘앱 추적 금지 요청’ 창을 보면 곧장 나에게 전화를 걸어오는 나의 모친과, ‘그’를 대하는 나의 태도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할머니’들은 과거에, 과거의 세상에 대해 배웠을 뿐 오늘의 세상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 게다가 ‘할머니’들은 열에 여섯은 무릎이 아프고, 둘은 허리가 아프며, 나머지 둘은 팔을 머리 위로 들지 못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세 가지 모두에 해당하기도 한다. ‘그’들은 무능하다. 그래서 남편들은 ‘그’들에게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라고 함부로 말하고, 아들들은 ‘엄마 그건 그냥 제가 할테니까 가만히 좀 계세요’라고 제 아이에게 말하듯 말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하찮다’. 오필리아는 그게 싫었다. 아버지가, 남편이, 아들이, 아들의 아내가 끊임없이 자신을 혹처럼 여긴다는 점 말이다. 아니다. 오필리아가 정말 싫었던 것은 그들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들이 먹을 밥을 차릴 줄은 모른다는 점과 자신들이 입을 옷을 스스로 빨지 못한다는 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오필리아는 그들과 함께 살면서 단 한순간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가장 하찮게 여기는 존재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것들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그’는 컴퍼니가 콜로니에서 떠날 때, 숲으로 숨었다. 떠나지 않으려고, 40년을 살아온 행성에서, 자신이 일군 것들 속에서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극저온 탱크 속에 누워서 우주 여행을 할 개척민들 속에 있어야할 오필리아가 사라졌지만 누구도 ‘그’를 찾지 않는다. 개척민들이 콜로니에서 떠나기 전, 컴퍼니에서는 오필리아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극저온 탱크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오필리아에게는 추가요금이 필요하다고, 그의 아들 바르토에게 말했다. 그렇게 오필리아는 컴퍼니에게는 ‘어차피 죽을 사람’이었고, 바르토에게는 ‘돈만 드는 성가신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없어졌다고 한들 계획된 일을 멈출 수는 없는 법이다. 여느 회사들에서 그렇듯, 찾아냈을 때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을 덮어둘 줄 아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게 마련일테니까.
모두가 떠난 마을에서 오필리아는 다른 가족들이 살던 집의 넓은 침대에서 자기도 하고, 입고 싶었던 옷을 지어입고, 하고 싶었던 장신구들을 잔뜩 만든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면서 먹고 싶을 때 먹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맨발로 돌아다니고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자유로운 행동들을 한다. 그러던 중에, 폭풍과 함께 그들이 왔다. 새처럼 보이기도 하고, 도마뱀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른바 ‘외계인’들이 말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모두에게 쓸모없는 인간 취급을 받던 할머니가 외계인들을, 그리고 또 다른 외계인들을 물리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물리치는’ 방법은 많은 경우 상상하는 그것하고는 다르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물리치는 과정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능과 무능, 앎과 무지, 자유와 속박, 연결과 단절 같은 주제들인데, 남편이자 아들이고 여느 남성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유능’을 신조삼아 살아온 나로서는 중간중간 얼굴이 화끈거리는 장면들이 많았다고만 말해두자.
마흔을 넘긴 다음부터 가끔 거울을 보면 살짝 놀랄 때가 종종 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내 얼굴과 거울 속의 내 얼굴 사이의 거리가 꽤나 크다는 걸 인지할 때다. 좋은 소설은 바로 그런 거울 같은 소설이 아닐까 싶다. 내가, 우리가 생각하던 우리와 읽히고 있는 나와 우리 사이의 거리를 쨍하게 드러내는 소설 말이다. 엘리자베스 문의 『잔류 인구』가 그런 소설이다.
정승연(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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