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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치1

정치에 대한 두 가지 시선, 강력한 군주 vs 대중의 역능

by 북드라망 2013. 5. 8.

근대를 넘는 근대의 가능성, 집합적 신체



홉스와 스피노자, 너무나도 닮은 너무나도 다른


앞서 살펴본 홉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로 그와 대비되는 인물이 있다. 그렇다. 스피노자(1632~1677)다. 당시 유럽은 수많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반스페인 독립전쟁, 독일의 30년 전쟁을 비롯해 수많은 종교적 갈등 분쟁이 이어졌다. 이는 오랜 기간 유지되어온 중세적 질서와 이를 부정하려는 새로운 세력들 간의 충돌이었다. 홉스가 살았던 17세기 영국은 청교도 혁명(1640~1660),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의 왕정복고, 그리고 명예혁명(1688)으로 이어지는 격변 속에 있었으며, 스피노자가 살던 네덜란드 역시 공화파를 매국노라고 공격하면서 지도자 비트 형제를 살해하고 왕정복귀(1672)가 이루어지는 등 내란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렘브란트, <야경>



이러한 혼란의 상황 속에서 홉스와 스피노자의 질문은 동일했다. 어떻게 평화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이든지 집어삼킬 듯한 저 두려운 대중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홉스와 스피노자의 ‘대중들에 대한 공포’를 읽을 수 있다. 대중이란 원래 유동적인 존재들이다. 어떤 때는 자유를 향해 불같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자신을 예속하는 체제를 욕망하는 파시스트적 기질을 보이기도 한다. 근대 이후 정치사상가들의 주요 고민은 이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잠재성의 덩어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였다.

그런 점에서 대중은 선한 존재도, 이데올로기라는 억압장치에 속고 있는 계몽의 대상도 아닐지 모른다. 그렇게 보는 것이야말로 현실을 너무 나이브하게 바라보는 것일게다.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면 대중들은 해방을 욕망할 것이라던지, 언제든지 대중은 자율적인 주체가 될 수 있다던지 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 방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스피노자 역시 『국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는 언제나 적보다는 국민들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 확실하다. 사실 선량한 국민이란 그리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홉스와 스피노자는 이러한 상황 하에서 어떻게 무정부상태를 종식시키고 자유를 보장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묻는다. 즉 국가가 인민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설립된 것이라면, 왜 그러한 평화와 안전은 위협 당하는가라는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들은 주권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라는 근대 정치 사상의 초석을 놓았다. 물론 이에 대한 해결책은 둘이 차이를 보인다. 홉스가 강력한 군주의 ‘권력’에 기반한 통치체제를 기획했다면, 스피노자는 대중의 ‘역능’에 기반한 정체를 옹호한 것! 다시 말해 홉스가 어떻게 대중의 잠재성을 거세하고 다수의 역량을 ‘일자’의 지배하에 둘 것인가 하는 방식으로 물었다면, 스피노자는 대중의 자기파괴적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의 역능과 이성에 기반한 공동체인 다자적 일자로서의 ‘집합적 신체’를 꿈꾸었다. 

이를 다음과 같이 대별해서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른다. ‘홉스-루소-헤겔-(하버마스)’라는 다수 노선에 대비해서 ‘스피노자-마르크스-니체-(들뢰즈)’라는 소수적 사유를 강조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 이 때 다수노선의 이념들은 보편자-동일자-인식론-심연-외재성(목적론)-본질(절대자, 신)-저 세계-권력(pouvoir)-재현-정신-이성-계약-양도(매개, 대표)를 강조하는 입장에 서있다면 소수노선은 무한자-차이-존재론-표면-내재성-특이성-이 세계-역능(puissance)-표현-신체-욕망-공포(희망)-직접성(대표 거부)을 강조한다. 보기 쉽게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다수

노선

보편자

동일자

인식론

심연

외재성

본질

저세계

권력

재현

정신

이성

계약

양도

소수

노선

무한자

차이

존재론

표면

내재성

특이성

이세계

역능

표현

신체

욕망

공포

희망

직접성


즉, 홉스가 근대정치철학의 기원이라면, 스피노자는 ‘근대’를 뛰어넘는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사상가로, 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생성과 창조’의 철학자로 평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이 놀라울 정도로 동일한 문제의식과 논리를 구성하는 방법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스피노자를 역량에 기반한 근대와는 다른 질서를 꿈꾼 사상가라고 평가한다면, 들뢰즈의 말대로 “진정으로 역량에 입각해서 사유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체에 관한 물음을 제기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스피노자가 ‘신체’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라는 관점을 가지고 설명해 보기로 하자.  



에티카, 새로운 신체와 새로운 윤리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신체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면서 시작하자.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직 누구도 규정하지 않았다. … 왜냐하면 지금까지 아무도 모든 기능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신체의 구조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어떤 방식으로 어떤 것을 매개로 해서 정신이 신체를 움직이는지, 또한 어떤 정도의 운동을 통해 정신이 신체에 부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속도로 신체를 움직일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스피노자, 『에티카』


그는 지금까지의 신체와는 다른 방식의 접근을 한다. 스피노자는 새로운 신체, 새로운 윤리에 대한 책을 쓰고자 했다. 그것이 『에티카』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의 신체는 다른 본성을 가진 많은 개체들로 구성되어 있고 매우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 지금까지 이렇게 신체를 파악한 철학자는 없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피노자의 기본 개념들, 실체, 양태, 본질, 코나투스와 같은 말들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는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하는 성향(conatus)은 그 사물의 현실적 본질”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를 포함해 각각의 사물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한에서 자신의 존재 안에 남아 있으려고 노력한다. 이 때 코나투스는 이러한 본성, 즉 활동력을 의미한다. 이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기본이다. 그리고 이러한 코나투스를 바탕으로 자신의 활동력(이를 역능이라 바꿔부를 수 있다)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의 윤리학의 핵심 테마였다.

또한 양태란 구체적으로는 자연계의 모든 개물 및 우리들 개개의 신체나 정신을 가리키는데 그 본질은 어느 정도의 ‘역능’이고, ‘강도(intensity)’다. 이 때 양태들은 여러 부분들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인간이라면 무한히 많은 세포 차원부터 무한히 작은 여러 부분들이 개체의 본질을 이루는 구조하에 배치, 결집되어, 개물을 표현하는 외연적인 부분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 구조 내지 구성관계를 스피노자는 ‘비율(ratio)’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개물의 본질의 표현 그 자체이고, 이러한 본질이 무한히 겹쳐 세계의 모든 구체적 개물의 다양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크기가 같거나 다른 물체 두어 개가 다른 여러 물체의 압력을 받아서 서로 접합하거나, 아니면 두어 개의 물체가 같은 속도로 또는 다른 속도로 움직일 경우 자신의 운동을 어떤 일정한 방식으로 전달할 때 우리는 그 물체들이 서로 합일되어 있다고 말하며, 또한 모든 것이 함께 하나의 물체 또는 하나의 개체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스피노자, 『에티카』


따라서 스피노자에게 개체란 이 ‘운동과 정지의 비율’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인간의 신체는 손이나 발이나 머리같이 윤곽 지어지는 것들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계도 도구도 포함해 자연 중에 모든 것들은 이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전달하는 한에서 우리들 신체의 일부를 구성한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신체 역시 이 구성관계로서의 비율 그 자체이고, 여러 개체들이 각각 그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비율 속에서 구성될 때 ‘하나의 개체’를 이룬다. 그런 점에서 그가 “신체의 부분들이 서로 운동과 정지의 상이한 비율을 취할 때 나는 신체를 죽은 것으로 이해한다. 말하자면 혈액 순환과 신체를 살아 있게 하는 그 이외의 것들이 지속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신체가 그 본성과 다른 본성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선악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한다.


인간 신체의 부분들이 갖는 운동과 정지의 비율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은 선이다. 이와 반대로 인간의 신체의 부분들에 서로 다른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갖도록 하는 것은 악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자연에 선이나 악은 없다. 다만 좋음(bon)과 나쁨(mauvais)이 있을 뿐이다. ‘좋음’이란 한 개체가 나라는 신체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구성할 때, 그 신체를 통하여 우리 신체의 운동과 정지의 비율이 유지될 때를 가리킨다. 반대로 ‘나쁨’은 다른 신체가 우리 본질에 상응하지 않는 관계로 우리 신체의 관계를 해체할 때를 가리킨다. 가령 소화불량이나 독의 경우 우리 신체의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바꾸게 한다는 점에서 나쁘다. 이처럼 악이라던가, 병이라던가, 죽음이라던가하는 범주 아래 모여있는 현상은 다만 ‘나쁜 만남’일 뿐이다. 신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은 도덕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금지한 것이 아니었다. 신은 다만 선악과가 아담에게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한 것 뿐이었다. 자연에서 금지란 없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이런 좋음과 나쁨은 신체들의 만남에서 역량의 증감과 관련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의 유명한 정식인 “기쁨은 인간의 더 작은 완전성에서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슬픔은 인간의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은 이처럼 신체의 역량의 문제와 관련되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음식물을 먹어 역량이 증대될 때 우리는 더 큰 완전성으로 간다. 반대로 우리의 신체의 역량이 감소되는 만남 속에서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 이처럼 그의 윤리학은 선악이라는 도덕과는 달리 신체의 역량의 증가와 감소라는 기쁨과 슬픔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기쁜 만남, 집단적 신체


그러나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단지 인간이라는 단일한 개체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집단적 신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신체의 다수성을 둘러싼 진술을 여러 군데서 하고 있다. 신체가 여러 힘의 합성과 조합으로 이루어진 개체라는 발상의 근저에 있는 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존재는 여러 개체들 간의 공통관계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단순히 운동과 정지 및 빠름과 느림에 의해서 서로 구분되는 물체들로 조직된 개체, 곧 가장 단순한 물체들로만 조직된 개체를 생각하였다. 만일 이제 본성이 다른 여러 개체로 구성된 다른 개체를 생각한다면, 그 개체는 다른 여러 방식으로 움직이면서도 자신의 본성을 유지할 수 있음을 우리들은 발견할 것이다. … 그러므로 만일 우리들이 이러한 제2의 종류의 개체로 조직된 제3의 종류로 개체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개체가 자신의 형상에 아무런 변화도 없이 다른 많은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들이 이렇게 계속하여 무한히 나아간다면, 우리는 자연 전체가 하나의 개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부분들 즉 모든 물체가 전체로서의 개체에는 아무런 변화도 미치지 않고 무한한 방식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된다.


─스피노자, 『에티카』


인간은 자신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돌파하고 외적 원인과의 돌발적인 만남에 대처하기 위해 더 큰 신체를 구성한다. 이것이 집합적 신체이다. 『신학정치론』에서 “이성과 경험은 … 구성원들의 힘을 하나의 신체, 말하자면 ‘사회적 신체’에 집중시키는 것보다 더 확실한 수단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혼자일 때보다 두 사람일 경우 더 많은 역량=권리를 누릴 수 있기에 역능의 집단적 조직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이 양태적 세계는 실체 중에 용해되어 버리는 정적인 세계도 아니고, 신인 자연의 품안에서 각각의 개물이 자신의 본질을 본분으로 해서 쉬고 있는 목가적 세계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끊임없는 투쟁의 장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보았듯이 양태들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하는 코나투스로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태상의 세계에서는 항상, 어떤 양태가 다른 양태의 제부분을 끌어들여 자신의 구성관계의 일부로 이루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다른 양태는 자신을 구성하는 제부분을 해체하고,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 점에서 개개의 양태는 이러한 자신의 본질인 구조를 유지하면서 그 외연적 부분을 귀속을 둘러싼 끊임없는 투쟁관계에 있다.



따라서 이 양태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개물을 구성하는 역능이 합성되거나 해체되거나 하는 과정 속에 있다. 즉 보다 큰 외연적인 힘들을 획득함으로서 자신의 역능을 증대시키는 경우와, 그것들의 힘들의 획득에 실패해 자신의 역능을 감소시키는 경우 둘 중의 하나에 의해 양태의 질서는 구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쉽게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스피노자는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 스피노자에게는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를 살리는 관계이다. 역능의 합성은 파괴가 아니라 생산이다. 다만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일뿐 그것은 먹고 먹히는 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둘째, 만인의 만인이라 할 때 홉스는 원자적 세계, 즉 환원불가능의 실체로서 개체를 접근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 인간이란 표상은 불충분한 인식의 전형적인 예일 뿐이다. 스피노자에게는 이른바 개인이라는 사고는 없다. 주관도 자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자연의 힘이 짜낸 효과, 결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셋째, 자연상태는 사회상태가 되어도 소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존의 권리이론이 홉스에게 보이듯 자연상태에서 국가상태로의 변화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면, 스피노자에게 자연권이란 활동력 그 자체다. 즉 역능만큼의 권리다. “각자의 권리는 그의 규정된 역량이 미치는 곳까지 전개된다.” 그런 점에서 권리란 시혜적으로 주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천부적으로 모든 개인에게 역능과는 상관없이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홉스 철학과 정반대에 위치한다. 지금까지 스피노자의 철학은 단지 윤리적 차원의 문제로서만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어느 의미에서는 스피노자의 모든 글은 정치적이라 할 수 있다. 니체가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라, ‘어떤 힘이 그것을 옳게 하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한 것처럼, 스피노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단순한 윤리학적 차원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게 하는가’를 보고자 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정치적이다. 그런 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이야말로 ‘존재의 범정치화’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그렇다면 홉스식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닌 코나투스들의 코나투스들에 대한 투쟁. 그리고 이 속에서 어떻게 집합적 신체를 구성할 것인가라는 스피노자식의 정치적인 문제는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줄 것인가. 다음 글에 이어서 이야기하기로 하자. 



_담담(남산강학원 Q&?)



홉스: 리바이어던의 탄생과 신체 읽으러 가기


※ 본문에 예고된 것처럼, 2편은 5월 22일에 포스팅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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