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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치1

동양의 몸과 서양의 몸, 달라도 너~무 다른 두 개의 관점

by 북드라망 2013. 6. 5.

몸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라쇼몽,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서양 이야기는 이쯤에서 정리하기로 하고, 이번 회차부터는 동양에서 몸과 정치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넘어가기로 하자.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번 주는 쉬는 시간으로 가볍게 동양과 서양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라쇼몽 이야기에 대해 알고 계시는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로도 유명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속 『라쇼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미스테리에서 단 두 가지만 확실하다. 그것은 한 여인이 강도에게 겁탈당했고, 그녀의 남편은 칼에 찔려 죽은 채로 숲에 누워있다는 사실이다. 강도는 체포된 후 자신이 여인의 남편을 죽였으나 이는 여인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 변명했다. 살인하려는 의도까지는 없었는데 여인이 그렇게 하라고 꼬드겼다는 것이다. 그녀는 강도에게 겁탈당한 후 이러한 수치를 목격한 남편과 강도라는 두 증인을 견딜 수 없었고, 강도에게 자살하던지 아니면 남편을 죽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강도는 어쩔 수 없이 남편을 죽였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여인은 다른 진술을 한다. 그녀 스스로 자신의 남편을 죽였다는 것이다. 남편이 강도에게 묶인 채 굴욕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의 눈은 분명히 경멸과 증오로 가득 찼으며 부인에게 “나를 죽여라”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여인은 그 때 자신과 남편 둘 다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을 죽이고 나서 실신해 버려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실패했다.

<라쇼몽>은 등장인물들이 모두 다른 '사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사실'이 무엇인지에 관해 보는 이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만든다.


과연 이 이야기의 사실(real)은 무엇일까? 이 서로 다른 이야기 중 누구의 이야기가 진실일까? 그러나 이때 죽은 남편이 영매를 통해 증언한다. “나는 자살했다!” 그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아내가 처음에는 강간을 당했지만 나중에는 흥분하는 것을 보고 있는 동안 느낀 공포와 무기력은 너무나 컸다. “제 남편을 죽여주세요. 그리고 저를 어디든 데려가 주세요”라고 여인은 말했다. 그의 부인이 그런 말을 했을 때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남편은 그의 아내에게 살해당한 것인가? 아님 강도에게 살해당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자살인가? 혹은 죽었다는 것조차 속임수인가? 아쿠타가와는 어떤 버전을 믿으라거나 혹은 그들 중 어떤 것을 믿는지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진실은 무엇인가? 강도 혹은 아내 둘 중의 어느 것이 진실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죽은 남편의 고백은 과연 진실일까? 

이 이야기는 시게히사 쿠리야마(Shigehisa Kuriyama)의 『몸의 표현성과 그리스와 중국 의학의 갈라짐(The Expressiveness of the Body and the Divergence of Greek and Chinese Medicine)』이라는 책의 서문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는 이를 통해 신체를 바라보는 관점 혹은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비슷한 수수께끼가 의학의 역사에 중심부에도 나타난다. 신체의 구조와 작동은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 어디서나 똑같으며 보편적으로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사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요동친다. 강도와 여인, 죽은 남편의 증언처럼 다양한 의학 전통 속에서의 몸에 대한 설명은 상호 이질적으로, 거의 다른 세계인 듯이 묘사되곤 한다.


─시게히사 쿠리야마, 『몸의 표현성과 그리스와 중국 의학의 갈라짐』



활수와 베살리우스, 두 개의 진실


시게히사는 이를 동양과 서양의 신체 해부도를 통해 살펴본다. 활수(滑壽)의 『십사경발휘(十四經發揮)(1341)의 그림 1과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Fabrica)(1543)를 비교해보자. 양편을 놓고 봤을 때 두 그림은 각각 어떤 공백을 나타낸다. 우선 활수의 그림에서 우리는 베살리우스인의 근육에 대한 디테일을 놓치게 된다. 사실 중국의 의사들에게는 ‘근육’이라는 특정한 말조차 없었다. 근육이라는 것은 특이한 서구식 집착이다. 반면, 베살리우스의 그림에서 보이듯 침술의 자리들은 서구식 해부학적 실재의 버전에서는 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17, 18세기에 중국의 의학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중국의 몸에 대한 묘사가 ‘환상적’이거나 ‘어리석은’것인 것처럼 비춰졌다. 마치 상상의 땅에 대한 이야기처럼 말이다. 


(왼쪽) 활수(滑壽), 『십사경발휘(十四經發揮)』 (오른쪽) 베살리우스(Veslius),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Fabrica)』


몸과 같이 기본적이고 친근한 것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숲에서의 죽음의 경우에서처럼, 우리는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거짓말쟁이의 거짓말 뒤의 어떤 숨겨진 동기에 절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작동 중인 명백한 힘의 사고를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떤 실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신체를 바라보는 관점은 어떤 차이에서 나오게 되었는가? 물론 이를 크게 서양과 동양이라고 한꺼번에 단정지어 어떤 차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가령 서양은 이원론이고, 동양은 전체론이라고, 혹은 서양을 기계론으로, 동양을 유기체론으로 환원시켜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신체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그리고 크게는 어떤 에피스테메의 차이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둘 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고, 둘 다 진실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관점들이 각각의 전통들을 만들어 내었고, 이는 단지 신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생각의 틀거리들을 만들어 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지금은 잊어버린, 서양과는 다른 몸에 대한 해석을 만나볼 수 있다. 

일단 위의 그림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안과 밖의 차이에 대한 태도이다. 베살리우스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것은 안에 대한 집착이다. 인체 피부내의 근육을 세세히 묘사하는 태도는 우리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해부학의 발전과 함께 등장한다. 그러나 활수의 그림에서 안과 밖의 경계는 모호하다. 신체의 내부조차도 그것은 어떤 흐름을 보고자 한 것이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이를 다른 그림을 통해 좀 더 살펴보자.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 표지


베살리우스 책의 표지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사체의 배를 갈라 자궁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진을 이루고 있다. 마치 스트립걸을 보기 위해 모여든 관음증 환자들처럼! 해부학자들에게 인체 내부의 장기는 외부의 살 밑에 덮여있는 진실이었다. 그들은 신체 내부를 가르기만 하면 무언가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점에서 서양에서 신체의 안과 밖은 확연히 구분된다. 안은 죽음, 밖은 삶을 상징한다. 피부가 깨끗하고, 건조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면, 신체 내부는 더럽고, 습하고, 추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사람의 구멍을 살펴보는 것은 옛날부터 추한 행위로 여겨졌다. 콧구멍이나 입 안을 들여다보는 것, 음부 안을 들여다보는 행위에 대한 터부가 그런 예이다. 그리고 그 ‘안’을 열어보면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내부와 외부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밖은 안이 드러난 것이고, 그 안에 무언가 더 심오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안과 밖은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안을 통해 밖을 보고, 밖을 통해 안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동양에서 안을 굳이 보지 ‘않으려’ 했던 것 일뿐, 안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감각의 차이


그러나 이는 다만 안과 밖의 차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본다’는 행위 자체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서양에서 본다는 것과는 달리 동양에서 본다는 것은 그 ‘색(色)’을 본다는 것이다. 이 때 ‘봄’은 단지 있는 것을 보는 행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기도 했다. 즉 망진이라 했을 때 그것은 단지 지금의 얼굴의 형태와 색깔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앞으로의 병을 보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본다는 것은 어쩌면 ‘상상’하는 것이기도 했다.

활수의 그림에서 보이는 경락은 실제 지금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야말로 더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지금으로 보자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자면 ‘본다’는 것과 ‘상상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이질적인, 정반대에 위치한 행위이다. 봄은 객관적인 사실을 보는 것인 반면, 상상한다는 것은 있지 않은 주관적인 감상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살리우스의 그림에서 근육질을 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봄이 동양에서는 존재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양의들이 제일 처음 중국의학을 접했을 때 했던 비판 역시 이것이었다. 그들은 보기를 게을리 한다는 것. 그러나 본다는것이 지금 가시적인 실재를 보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 여기서 더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실재(real)는 하나인가? 무엇이 더 실재적(realistic)인가? 라쇼몽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시각뿐만이 아니다. 맥을 짚는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서양에서 맥박은 단순히 심장의 고동수, 일분에 몇 번 뛰는가, 그 빠름과 느림을 재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맥의 깊고 얕음, 부드러움과 강함, 미끄러짐과 거침, 가득 차있음과 비어있음을 느끼는 행위였다. 그런 점에서 맥은 맥박과 다르다. 서양의들이 처음 동양의학을 접했을 때 가장 이해 못했던 바 역시 이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진맥을 짚는 이의 주관적인 감각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진다는 감각 자체가 달랐던 것은 아닐까? 서양과 동양에서 이들은 몸을 서로 다르게 ‘보았고’, 서로 다르게 ‘느꼈고’, 서로 다르게 ‘알았다’.    


맥진에는 촉맥, 긴맥, 미맥 등등 지금으로는 구분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다양한 진단법이 존재했다.


이처럼 시게히사는 시각, 촉각, 청각등의 감각의 차이를 통해 서양과 동양에서의 몸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몸에 대한 차이일 뿐만 아니라 에피스테메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드화와 춘화


서양의 누드화가 혼자 쉬고 있는 여인을 그릴 때조차 관능적으로 그 여인을 그린 반면, 동양에서는 성행위를 하는 춘화조차도 왠지 성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게 단지 기술의 차이만일까? 서양의 누드화가 여체를 그릴 때 그것을 벽안에 가두어 놓는 반면, 춘화는 섹스 장면 역시 자연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실내에서 행해질 때 조차도 그것은 항상 밖과 함께 그려진다. 오히려 섹스 장면은 자연을 그려내기 위한 조연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렇다면 이처럼 전혀 에로틱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섹스가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닌 장수와 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배려 차원에서의 성! 이때 섹스는 자연의 일부다. 그것은 자연과 감응하는 차원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섹스라는 행위 자체가 아닌, 자연의 음양과 함께 그려짐 속에서만 그 의미를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림 속의 신체는 거대한 자연이라는 신체의 일부분이다.

내경도, 인체를 자연물로 표현했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에서 몸의 그림 역시 다시 살펴보자. 이 그림이 희한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위의 내경도를 보고 이것이 사람의 신체 내부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림에서 보듯이 신체 안에 산맥이 있고, 강이 흐른다. 나무가 있고 바위가 있다. 그러나 신체는 자연에서 외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이라는 커다란 신체가 내 몸이라는 작은 신체에 오롯이 들어와 있다.  

(왼쪽) 고지도 (오른쪽) 장부도


그렇다면 고지도를 한 번 살펴보자. 이 그림과 옆의 신체도와의 어떤 유사성이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 동양에서 몸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몸을 그린게 아니라, 땅을 따라서 그린 것이다. 물을 따라서 그린 것이다. 그럼 조금 더 확실해지지 않았는가? 이 이상한 그림들의 실체가! 신체를 그린다는 것은 더 커다란 신체인 자연을 나타내는 것이자, 지금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는 에피스테메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몸과는 다른 방식의 몸에 대한 이해도 가능하지 않을까?


다시 라쇼몽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진실은 누구에게 있는가? 아마 진실은 각자의 것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믿고 있고, 사유하도록 훈련받은 진실만이 유일한 진실이 아닐 가능성은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새로운 신체-공동체의 모델을 사유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는 동양에서의 신체-국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기로 하자.



_담담(남산강학원 Q&?)



몸의 노래 - 10점
구리야마 시게히사 지음, 정우진 외 옮김/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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