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기여 고개를 들라, 오리온과 자수 삼수 이야기
손영달(남산강학원Q&?)
죽음과 휴식의 계절, 겨울 별자리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겨울 별자리 이야기를 미뤄두고 짧은 휴가를 다녀왔다. 두어 달, 하루에 8시간씩 자며 핑핑 놀았다. 어찌나 놀았는지 자판을 치는 손가락이 길을 못 찾을 정도. (어때 류도사, 부럽지 않나?!) 겨울엔 모름지기 놀아야 한다! 음양오행을 공부하며 이것 하나 확실히 배웠다. 생장수장 중 장(藏), 만물이 감추어지는 시기가 곧 겨울 아니던가. 사람도 천지의 운행에 맞추어 씨앗처럼 웅크리고 쉬어야 한다. 말 나온 김에 지난 학기 갑자서당에서 어린이 친구들과 함께 공부했던 글귀를 여기 소개해 보련다. 『황제내경』 「소문(素問)」에 실린 사기조신대론(四氣調神大論)이란 글이다.
겨울 석 달은 만물이 움츠러들고 갈무리되어 휴식하는 시기로 물이 얼고 땅이 갈라진다. 사람도 이를 따라서 양기(陽氣)를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일찍 잠자리에 들고, 늦게 일어나야 하는데, 해가 뜨는 것에 맞추어 일어나야 한다. 품고 있던 뜻이나 의욕을 펼치기엔 좋지 않아 마음속으로 간직하고 드러내지 않으며 때를 기다리는 여유를 찾아야 한다. 추위를 피하고 따뜻한 곳에 머물며 땀을 흘리거나 피부를 함부로 드러내 기운이 빠져 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 겨울에 맞는 양생법이다.
지난 해에 못다 이룬 일을 두고 미련을 품지도 말고, 뭔가를 새로 해보겠다는 의지를 품지도 않은 채, 유유자적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게, 겨울스러운 삶의 자세다.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기, 수고로 몸을 혹사시키지 않기, 멀리 여행을 떠나지 않기 등. 겨울엔 일상의 템포를 늦추는 절제의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 완전히 끝내고 충분히 쉬어야 따스한 봄날, 힘차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자, 모두 빈둥빈둥 귤이나 까먹으며 죽은 듯이 겨울날을 보내보자. 어쩐지 저 깊은 곳에서 샘 솟듯 양기가 터져 오르는 것 같지 않은가.^^
겨울엔 일을 벌이지 않는 게 양생의 도이건만, ‘양기 손상’을 무릅쓰고 겨울 별자리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생각 같아선 노는 김에 겨울 석 달을 꼬박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입춘을 목전에 두고 겨울 별자리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뭣하니, 입춘이 된 다음에 봄철 별자리부터 새로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심산이었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새 뽀얗게 먼지가 덮인 별자리 책들을 다시 폈다. 하지만 어디를 펴건 겨울엔 놀아야 한다는 말 일색이었다.^^ 겨울 별자리는 다름 아닌 ‘휴식과 죽음’ 을 주관하는 신들이었던 것이다. 원고를 쓰겠다고 작심하고 앉은 내게, 겨울 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일제히 ‘겨울엔 놀아야 해, 겨울엔 놀아야 해’ 하며 속삭이는 듯한 느낌?! 이래저래 후회막심이다. 이 가여운 필자는 짧디 짧은 겨울 휴가를 마치고, 다시 헤어 나올 길 없는 연재의 늪으로 빠져들어 간다. 하지만, 부디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님들께서는 필자의 과오를 발판으로 삼아 휴식과 재충전으로 가득한 ‘양생 겨울’을 만끽하시기를!
겨울철 별자리 이야기, 이제 시작합니다!
오리온의 머리, 자수(觜宿)
오늘의 주인공은 그 유명한 오리온(Orion) 상 되시겠다. 우리에겐 과자 회사 상표로 익숙하지만 알고 보면 그는 그리스 신화의 유명 인사 중 하나다. 오리온, 그는 내노라 하는 사냥꾼이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 찬란한 식스팩을 장착한 다부진 몸매의 거인이다. 집안도 빵빵하다. 그의 아버지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 여친 또한 대단한 퀸카다. 아르테미스(Artemis)라고 들어는 봤나? 그녀는 사냥의 여신이자 야생동물의 수호신, 그리고 달의 여신이다. 사냥의 신끼리 만났으니, 궁합은 볼 것도 없겠다 싶다. 하지만 이 선남선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있는 집 자제들이란 원채 걸리는 게 많은 법, 아르테미스의 쌍둥이 오빠인 아폴론이 이들의 만남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불붙은 사랑을 어찌 한 두 마디 말로 갈라놓을 수 있으리오. 아무리 말로 해도 들어먹지를 않자 아폴론은 급기야 오리온을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그것도 아주 처절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자는 오리온의 사랑하는 연인 아르테미스. 아폴론은 오리온의 눈을 보이지 않게 만든 뒤, 아르테미스를 꾀어 화살을 쏘게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의 살해자임을 알게 된 아르테미스는 비탄에 빠졌고, 제우스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오리온을 밝은 별자리로 만들어 주었다. 추운 겨울 하늘에 유독 이 별 오리온자리가 환히 빛나는 것은 못다 이룬 이들 남녀의 애틋한 러브 스토리 때문이라고 한다.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의 연인답게, 오리온은 아주 건장한(!) 장수의 모습이다!
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오리온의 머리 부위다. 세 개의 별이 나란히 오리온의 머리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동양 별자리로는 자수(觜宿)이다. 동서양의 별자리 모두 이 별자리를 머리에 해당한다고 봤다는 점이 흥미롭다. 동양의 별자리에서 자수는 서방 백호 별자리 중 호랑이의 머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이 세 별의 어떤 특징이 이들을 머리로 보게 만든 것일까?
비통한 죽음으로 최후를 장식한 청년 오리온의 한 맺힌 머리라... 한이 맺힌 사람의 마음은 음기로 가득하다. 그런점에서 동양의 자수 별자리와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서방백호 별자리의 머리. 저 하늘의 호랑이는 지금 음기 작렬하는 울음을 울고 있다. 세상을 향해 ‘음기여 고개를 들라’고 울부짖는 음(陰)의 전령사!
자의 풀이를 보자. 자(觜)는 무척 재미있는 글자다. 부엉이의 머리 위에 뿔처럼 난 털을 뜻하는 글자다. 부엉이란 짐승은 요즘 유행하는 모히칸 스타일을 하고 있나보다. 정수리에 삐쭉 털이 솟아 있는데, 이걸 자(觜)라 부른다는 거다. 여기서 ‘뾰쪽한 끝’이라는 뜻이 파생되어 나왔다.
자수는 입동인 11월 8일 경, 지는 해와 맞교대 하며 동쪽 하늘을 밝힌다. 입동은 만물이 수렴의 시기를 지나 시들어 죽는 스산한 시기다. 앙상하게 얼어붙은 산천의 초목을 보면 우리의 입에선 절로 탄식이 흘러 나온다. ‘아, 성장과 번영의 시기가 끝나고 고단한 겨울이 찾아오겠구나.’ 하고 말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이 당시의 심정을 담아 저 하늘의 별에 자(觜)라는 이름을 붙였으리라. 만물의 양기를 죽게 만든 음(陰)의 뾰족한 끝. 그 이름, 아마도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천문류초』에서는 이 별을 ‘하늘의 관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자는 하늘의 관문을 주관한다. 별이 밝고 크면 천하가 평안하고 오곡이 잘 익는다. 움직여 다른 곳으로 가면 임금과 신하가 지위를 잃게 되고, 천하에 가뭄이 든다.
사람의 몸에서 머리가 기가 통하는 관문이듯, 하늘에는 호랑이의 머리가 천기가 드나드는 출입구가 되는 것이다. 또한 금에 배속된 장부인 폐가 내외의 경계를 가르고 납기를 주관하는 역할을 하듯, 하늘에서도 금의 계절인 가을의 별자리가 그 관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 별자리가 밝고 크면 하늘의 관문이 원활이 소통되니 나라가 평안하고 풍년이 든다고 본 것이다. 반대로 자성이 움직이거나 오성에 침범당하면 정치가 불안해지고 흉년이 든다고 보았다.
오리온의 몸통, 삼수(參宿)
아무리 별자리 문외한인 류도사라도 이 별자리가 팔다리를 벌리고 선 사람의 형상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뚜렷하고 명징한 외연을 자랑하는 겨울 별자리 중에서도 대표 주자에 해당하는 게, 바로 이 오리온이기 때문이다. 삼수는 오리온의 몸통과 팔다리 사지에 해당하는 별자리다. 우연의 일치인지, 동양 별자리에서도 용맹스런 장수의 모습으로 봤다. 사냥꾼이거나 장수이거나. 어쨌거나 이들 모두 오행으로 수렴의 금(金) 기운에 배속되는 것들이라는 점,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오리온 자리. 오리온의 머리에 위치한 푸른 별 세 개가 자수이고, 오리온의 팔다리 몸통을 그리는 10개의 별이 삼수이다.
『천문류초』에 실린 노래 보천가 중 삼수를 읊은 대목을 청해 들어 보자.
총 열 개의 별로 이루어진 삼은 자수와 서로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네. 삼은 두 어깨와 두 다리가 있고, 두 다리 안에 있는 세 개의 별이 심장이 되며 벌(伐)의 세 별은 배 안에 깊이 들어가 있다네.
먼저 이름, 삼(參)의 뜻을 알아보도록 하자. 삼이란 관여하거나 참여한다는 의미다. 이 별이 뜨는 것은 입동에서 소설에 걸친 11월이니 음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동양인의 안목으로 삼수를 그려낸다면 아마도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선 사납고 용맹스런 장수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까.
이 별의 몸통을 기준으로 윗부분은 황도와 백도의 중간 지점이라고 한다. 그래서 점성학적으로 몹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를 부월(鈇鉞)이라고 한다. 부와 월 모두 도끼를 뜻하는 글자다. 그러니 이곳은 밤하늘에 새겨진 섬짓한 도끼자국과 같은 것이리라. 이 부분의 별들은 만물을 베어 죽이는 음기의 화신과 같다.
또한 몸통의 가운데 나란히 선 세 별과 팔 다리의 네 별은 각기 장군을 표상한다. 특히 왼쪽 어깨에는 좌장군, 오른쪽 어깨는 우장군, 왼쪽 다리는 후장군, 그리고 오른쪽 다리에는 편장군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들 일곱 장수는 천하의 군사를 주관하는 별이다. 또한 몸통에서부터 아래로 나란히 내려붙은 세 별은 벌(伐)이라 하여, 북방의 오랑캐를 뜻하는 별로 이해했다. 그렇기에 벌은 어두워야 좋다고 생각했다. 흥미롭게도 이 별들은 고구려의 고분에 종종 등장한다. 중국인들이 보기에 북방 오랑캐에 속하던 고구려인들에게는 벌성이 환히 밝아지는 것이 오히려 호재로 여겨졌던 것이다.
동양에서 삼(參)은 전쟁의 날카로운 금기운을 담은 별이었다! 중국이냐, 고구려냐 그 지역에 따라서 별을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도 흥미롭다(^^).
자수와 삼수. 서방백호의 마지막 별자리에 속하지만 이들은 대표적인 겨울 별자리에 속한다. 가을 막바지에 하늘을 밝히며 겨울이 찾아옴을 널리 알리던 별자리인 것이다. ‘만국의 음기여 고개를 들라!’ 자수와 삼수가 음의 도래를 선포하고 지나갔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겨울 별자리들의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가을철의 칙칙하고 어둔 별들 대신 현란하고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겨울 하늘의 주인공들이 선을 보일 예정이다. 자 함께 하늘을 보자.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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