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하지 않는 자의 지배
사람들은 흔히 정치라고 하면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라고 하면 의회주의 체제를 상상한다. 의회주의란 서로 다른 견해를 갖는 집단들이 갈등을 조정하는 체제이다. 이런 관점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일을 합의 처리해야할 것으로 여긴다.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단 한 가지를 바란다. 제발 이 모든 갈등들을 진정시켜주소서! ‘합의’를 지배적인 목표로 받아들이자, 사람들은 정치가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합리적인 '경영'일거라는 생각을 갖는다. 급기야 사람들은 ‘정부’야말로 이런 갈등을 잘 해결하는 전문가 집단이어야 할 것으로 여긴다. 특히 갈등이 가장 첨예한 ‘경제’야말로 잘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제대통령’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대통령도 나왔다. 요즘은 ‘경제민주화’라는 그럴듯한 용어도 회자된다. 이제 대통령도 시험으로 뽑아야 할 지경이다. 경영과 경제학에 특히 가점을 주는 시험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민주주의가 갈등을 조정하는 것일 뿐이라면, 사람들이 굳이 민주주의를 찾을 이유가 있을까? 이른바 ‘갈등’을 품은 사람들 입장에선 내편이 되어줄 사람들이 필요하지, 내편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를 민주주의에 운명을 걸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들이 서로 다툴때 자기편이 되어달라고 내게 오지,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해달라고 오진 않는다(일단 내 자식들은 그렇다!) 내 경험으로도 갈등을 ‘민주적’으로 조정하면 오히려 양쪽 불만이 더 커지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 그런 경우, 민주적으로 해결하자는 말은 내 몫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일단 지금 상황을 봉합하자는 말로 이해된다. 봉합의 민주주의. 의회주의로 대표되는 민주주의는 봉합을 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뜻이 다른 소수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면, 하나의 의견만을 쫓아야 하는 '독재'와 무엇이 다른가? 그것을 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는 불화를 일으킨다
만약 정치를 갈등 해결 차원으로만 이해하면, 정치는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고, 그 위에 그 갈등을 해결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간 관계를 지칭하는 구도가 된다. 다시 말하면 역할이 분리된 두 집단이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과 이 일상 생활을 관리하는 사람들. 결국 정치가 갈등 해결이라고 보는 입장은 정치가 후자의 사람들, 즉 일상 생활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생활을 할 뿐이고, 간혹 발생하는 갈등을 관리자들에게 해결해달라고 찾아가는 정도에서 정치와 관계할 뿐이다.
이 경우, 정치는 단지 '통치의 과정'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공동체로 결집하여, 그들의 동의를 조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갖가지 사안들, 이를테면 어느 지역을 개발한다거나, 의료보험의 대상을 확대한다거나 하는 사안들에 대해서 정책 설명회를 하거나, 힘으로 밀어붙여 동의한 것으로 치거나 하는 것들이 그런 것이다. 간혹 그것들은 큰 이슈가 되어 투표를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정치는 공동체 내 구성원들에게 갖가지 자리들과 기능들을 위계적으로 분배하는 것을 쉬지 않는다. 통치란 바로 이런 정치행위—즉 갈등 해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갈등 해결이라는 관점 자체가 이런 위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고안된 관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 ) 같은 정치철학자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랑시에르는 정치를 전복적으로 정의한다. 그에게 정치란 공동체를 지도하는 기술이 아니다. 더더구나 공동체를 조화롭게 이끌기 위한 권력은 더욱 아니다. 만일 정치가 공동체를 조화롭게 이끌기 위한 권력이고 이를 위해 구성원들의 자리와 기능들을 위계적으로 분배하고 지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저 '치안'일 뿐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갈등 해결을 정치로 보는 관점이야말로 '치안'의 대표적인 시선일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가 다른 사람의 권위 아래 있는한, 다른 이들에게 매우 합벅적으로 의존한다. -스피노자, 『정치론』, 23쪽
사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정치를 통치의 과정으로만 해석하고 만다면 이 세상은 두 부류로만 분리되고 만다. 갈등을 일으키는 자와 그것을 해결하는 자.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자와 그 생활을 조직하는 자. 관리되는 자와 관리하는 자. 지배받는 자와 지배하는 자. 이렇게 되면 항상 두 집단 간에 위계가 발생한다. 항상 우리는 평등하지 않은 존재들로 전제된다. 즉 불평등이 출발점이다. 애초에 두 집단이 불평등할 뿐 아니라, 그런 불가피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통치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 점에서 통치는 항상 불평등을 전제로 한 과정인 셈이다. 따라서 정치는 아무리 진보적으로 나아가도, 전제된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으로만 나타난다. 그것들은 '조화'를 목표로 끊임없이 진보할 뿐이다. 언제 도달할지도 모르는 그 조화를 목표로 말이다. 그것은 딜레마로 가득하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여기에 '평등의 과정'을 도입한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 과정은 "아무나와 아무나 사이의 평등 전제와 그 전제를 입증하려는 고민이 이끄는 실천들의 놀이"(『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 '정치, 동일시, 주체화')로 이루어진다. 랑시에르는 이 놀이를 '해방'이라고 이름붙였다. 이 구도 아래에서는 일단 '정치 무대'(의회 같은 체제)가 없다. 항상 '치안의 과정'과 '평등의 과정'만 존재한다. 그런데 '치안'이 자꾸 '평등'을 방해하는(faire tort) 일이 생긴다. 원래 우리는 평등했는데, 그 평등을 방해하는 흐름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바로 그 흐름이 치안이다. 그 흐름 때문에 평등했던 것이 불평등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원래 평등했노라고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만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적인 것이 생성된다. 평등을 입증하는 과정으로서의 정치. 이렇게 되면 의회정치만 정치가 아니다. 장애인들이 자신들의 평등함을 입증하기 위해서 관공서와 싸우는 것은 정치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평등은 치안의 관점과 달리,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데 있다. "우리는 언제나 항상 평등했다. 그런데 치안이 이 평등을 방해한다. 그래서 애초부터 있었던 우리의 평등을 입증하기 위해서 치안과 마주한다."
랑시에르는 정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3가지 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치안, 해방 그리고 정치적인 것. 여기서 해방은 바로 정치다. 그리고 '정치적인 것'은 치안과 해방(정치)이 마주치는 현장을 말한다. 불평등한 것으로 보이는 것, 그래서 실제 그렇게 대우받는 것을 걷어 내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원래 평등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아니, 입증하기만 하면 된다. 평등의 과정은 평등을 방해하는 치안과 마주하면서 자신들이 평등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과정이고, 또 그런 입증을 위해서 자신만의 '정치적인 것'들을 발명하고 실행하는 과정이다. 이를테면 19세기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평등을 입증하기 위해서 '파업'이라는 정치를 고안하였다. 20세기 볼셰비키는 러시아 인민들의 평등을 입증하기 위해서 '전위당'과 '소비에트'라는 정치를 발명하였다. 21세기 빈민들은 금융자본주의 하에서 자신들이 평등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오큐파이(occupy)'라는 정치를 발명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도는 오히려 정치는 불일치하는 행동들이라는 관점을 낳는다. 정치는 인간 집단의 결집과 명령을 작동시키는 규칙들에 대한 일종의 ‘예외’로 작동한다. 다시 말하면 정치는 조화롭게 만들기가 아니라, 일종의 불일치이며 충돌인 셈이다. 정치는 예외들을 끊임없이 불러들인다. 어쩌면 정치는 예외들로만 이루어져 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치안이 평등이라는 공리를 어기고 항상 '불평등'이라는 예외를 만들어내니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랑시에르는 정치와 권력(대통령, 의회 같은 권력기관의 행위)을 분리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술 취한 선원들의 삼단 노 전함처럼 고약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변덕스럽고, 시끄럽다. 항상 예외적인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일이니까.
우리가 외치는 '평등'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인지 이제 다시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지배하고 지배받는다
그렇다면 해방의 과정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앞에서 랑시에르가 말했던 그 '아무나'란 누구인가? 랑시에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용어를 둘러싼 블랑키의 유명한 일화를 소개한다.
근대 프랑스에서 그 말[프롤레타리아-인용자]이 처음 쓰인 사례 중 하나는 1832년 오귀스트 블랑키(Auguste Blanqui)에 대해 행해진 소송이다. 검사장이 그의 직업을 묻자, 블랑키는 "프롤레타리아"라고 대답한다. 검사장은 "그것은 직업이 아니잖아"라고 반박한다. 그러자 블랑키는 그에 이어 "프롤레타리아는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우리 인민 대다수의 직업이다"라고 응수한다. 치안의 관점에서 보면, 검사장이 옳았다. 프롤레타리아는 직업이 아니며, 블랑키도 우리가 흔히 노동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블랑키가 옳았다. 프롤레타리아는 사회학적으로 지정할 수 있는 한 사회 집단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셈-바깥을 가리키는 이름, 내쫓긴 자(ouscast)의 이름인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정치, 동일시, 주체화'
사실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은 고대 로마 시민 계급 중 최하층을 가리킨다. 너무 가난해서 재산세는커녕 군복무도 할 수 없었던 계급. 그런데 프롤레타리아(라틴어 proletarii)는 proles 즉 자식, 아이라는 뜻의 단어로부터 파생된 말이다. 이들은 아이를 낳는 한에서만 로마에 봉사할 수 있는 계층들이었고, 그런 한에서만 자신들의 '몫'을 가질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낳은 아이들을 통해서만 국가에 '셈'해지는 계층이었다. 정작 자신들은 셈-바깥에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저 살고 번식하는 자들일 뿐인 거였다.
블랑키는 바로 이를 비틀면서 '치안'—그러니까 '검사장'—과 마주하고 있었다. 블랑키는 프롤레타리아를 '노동자'라는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것들을 전부 소멸시키는 이름으로서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다.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우리 인민 대다수'를 지칭하기 위해서 선택한 단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노린 것은 기존의 계급 질서에 속하지 않는 자들, 더 나가서 기존의 계급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들을 말하고자함일 터이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프롤레타리아는 '사이에 있는(in-between)' 자들이고, 그런 한에서 '함께(ensemble)' 있기도 한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여러 이름들, 지위들, 정체성들 '사이에' 있다. 그것은 어떤 지위에 있든,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든 기존 사회 계급의 이름으로 지칭되는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존재한다. 어떤 이가 자본가 계급에서 태어나 자본가 교육을 받았더라도(그러니까 그의 정체성이 자본가에 가까울지라도), 만일 그가 기존 계급을 넘어서서 셈-바깥인 것들과 '함께' 있고, 그들 '사이로' 들어가서 계급을 소멸하는 것으로 운동한다면 그는 프롤레타리아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도 프롤레타리아를 '해체 그 자체'(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서문』)라고 말하였다. 모든 계급의 소멸인 계급, 프롤레타리아. 어쩌면 프롤레타리아는 현존하는 계급이 아니라, 모든 평등한 자들이 스스로 평등하다고 주장할 때에야 비로소 부를 수 있는 비-존재 혹은 도래할 존재가 아닐까 싶다.
이응노, <군상>
바로 이것이 평등의 주장들 중 최극단의 형태이다. 기존 계급 질서를 모두 무화시키는 곳으로 가는 주장. 아니, 원래 이런 질서 자체가 없었다고 말하는 주장. 그러니까, 모두가 프롤레타리아라고 말하는 주장. 그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모든 평등한 자들이다. 랑시에르는 정치를 평등한 자들의 지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치는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계급을 소멸하는 행위로서의 지배. 만일 랑시에르의 말대로 정치가 치안에 대항해서 평등의 과정을 진행하는 것이고, 바로 그런 자리에서 '정치적인 것들'이 발명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기존 계급 질서 '사이'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생성되거나 발명되는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 따라서 정치는 프롤레타리아가 지배하고 또 아울러 지배받는 것이다. 평등한 자들이 지배하고 또 아울러 지배받는 것이다. 기존 계급 질서 '사이'에서 평등의 공리를 입증함으로써 그 질서를 무너뜨리는 작업, 바로 그것이 정치이고 민주주의인 셈이다. 평등한 자들인 우리가 지배하고, 다시 그것으로부터 지배받는다. 어쩌면 이 세계는 말 그대로 '우리'만 있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다른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지배는 평등한 우리의 몫이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는 시작 없는 시작이며, 지배하지 않는(지배할 자격이 없는) 자의 지배"(『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느 누가 지시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언제나 이미 평등하였고,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지배하고 지배받고 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치안'은 한마디로 가소로운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리 불평등의 그물을 씌우더라도 언제나 이미 평등했었던 사실은 지워지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원래부터 평등했다. 이것을 끈질기게 입증하라. 바로 그것이 정치이며 민주주의이다.
-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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