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존재
내 집엔 TV가 없다. 결혼 때 사들인 TV가 고장 나자 다시 사지 않았다. 이제는 굳이 TV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론 아주 가끔 인구에 회자되는 개그프로나 드라마를 보고 싶을 때가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프로를 꼭 봐야만 할 것처럼 이야기되는 것은 확실히 이상하다. 더러 보고 싶기는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본방사수’라는 말이 가져다주는 강박은 수상쩍다. 방송사가 만들어놓은 시간표대로 움직여야 할 것처럼 여기게 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나도 올림픽이니, 월드컵이니 하는 것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이럴 때면 인터넷 생중계 화면을 이용해야한다. 투덜대는 아들 녀석과 컴퓨터 화면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가끔 ‘버퍼링’님이 찾아오시면 아들의 불평은 하늘을 찌른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데 있다. 생중계이지만 실제 TV생중계보다 30초 정도 늦다. 그래서 골을 넣는 장면에선 TV를 보는 이웃들의 함성소리를 먼저 듣고서 봐야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이미 결과를 알고 ‘생중계’를 보는 것이다. 골에 환호하는 함성이 들리면 앞으로 전개될 화면들을 한껏 기대에 부풀어 보게 되지만, 함성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아주 결정적인 찬스여도 이내 김이 빠진다. 이건 참으로 기묘했다. 내가 맞이하는 ‘현재’와 이웃들이 맞이하는 ‘현재’가 아주 다른 것이었다. 바다 건너 멀리서 진행되고 있을 축구 경기의 ‘현재’가 이곳으로 도래하면서, 나와 이웃에게 다른 ‘현재’로 드러나고 있는 셈이었다. 분명히 기술 매체들의 차이가 나에겐 ‘다른 현재들’로 나타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기술, ‘현재’를 만들다
우리는 흔히 인터넷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생활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여긴다. 특히 트위터나 유투브 같은 이른바 소셜네트워크가 발달하면서 친구들과의 소통이 더욱 생생해졌다고 느끼게 되었다. 더욱이 인터넷 생방송 같은 쌍방향 실시간 미디어를 보고 있노라면 TV생방송보다 더 세계적이고, 즉각적이다. 아마도 스마트폰은 그 기능들을 더욱 다채롭게 발전시킬 것이고, 따라서 갈수록 그런 생생함은 더욱 강렬해질 것이다. 예컨대 아랍에서 발생한 사건은 수 초 만에 전 세계로 파급되고, 반응은 거의 실시간으로 유통되었으며, 그 결과 사건은 ‘과거와 다르게’ 전개되었다. 분명 우리는 서로 직접적이고 생생하게 대면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긴 하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또는 현대적인 기술과 근대 이전의 기술 사이에는 어떤 단절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산업과 과학적 활동이 서로 연관되면서 발생한 하나의 거대한 기술, 즉 테크놀로지의 발전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기술이 근대 이전의 기술과 다르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기술로 인식되는 것은 당연하다. 미사일 불꽃이 오고 가는 전쟁터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뉴스를 알리고 있는 기자를 상상해보면, 이런 주장에 쉽게 수긍이 간다. 전쟁 상황을 기껏해야 신문 지면에 소설처럼 묘사했을 뿐인 1, 2차 세계대전 때와 비교해본다면 이런 인식이 틀려 보이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이런 새로운 형태의 생생함에 대해서 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생생한> 통신의 새로운 자원들(비디오 카메라 따위)의 신비화를 비판하면서도 그것들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선 <생생한> 통신과 <실시간>이 결코 손수하지 않다는 것, 즉 그것들은 우리에게 해석이나 기술적 개입이 들어 있지 않은 어떤 직관이나 투명성, 지각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증명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증명은 이미 그 자체로 철학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 자크 데리다, 『에코그라피(Échographies de la télévision:Entretiens filmes)』
과연 생방송이나 SNS의 컨텐츠가 우리가 느끼는 것만큼이나 생생한 것인가는 다시 질문해야 할 것이다. 물론 과거의 여러 매체들—이른바 인쇄매체—보다 이 새로운 매체를 통해서 더 생생하게 느끼는 것은 맞아 보인다. 하지만 그 생생함이 진정 생생한 것-생생함 그 자체, 즉 현존(現存, présence) 그 자체-인지에 대해서는 더 세밀하게 사유해야할 문제인 것이다.
이런 점에 남다른 주의를 기울였던 데리다는 우리가 어떤 사물, 어떤 사건을 생생하게 보고 있다는 것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의 사유를 시작한다. 흔히 논자들은 인터넷이라는 기술 발달로 우리 생각이 타인들에게 아주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는 가정 하에 어떻게 하면 더욱 생생하고 직접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지에만 매달린다. 오로지 기술의 발달이 이런 타인과의 접속을 더 강하게 해줄 거라는 믿음을 갖고서 말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기술을 통해 사실들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을 순수하고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식의 유혹적인 인상을 제거하려 했다.
TV의 경우 여전히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편집하고 조정한 화면과 내용만을 전달한다. 그리고 조작하지 않은 화면 안에도 항상 이미 ‘인위적인 구성’ 그 자체가 있다. 아무리 생생하다고 느끼더라도 그 느낌이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 생생하다는 효과 그 자체가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축구경기장의 관중들의 함성,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 하늘에서 수직으로 찍은 경기장의 웅장한 모습, 그리고 함께 이동하는 카메라에 잡힌 선수들의 태클. 이 생동감, 이 세밀함 같은 것들은 사실 경기장에서조차 느끼기 힘든 생생함이다. 그것은 ‘생생한 현재’인 것이 아니라, 차라리 ‘생생한 현재’라고 느끼게 하는 일종의 <효과들>이다. 아무리 생생하다고 느끼더라도 그것 자체가 ‘생생한 현재’ 그 자체는 아니라는 말이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생생하게 중계되는 것은 사실상 “중계되기 이전에 생산”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이미지는 그것이 ‘재생한다고 간주되는 것’—이를테면 사실 그 자체—에 대한 온전한 재생물이 아니다. 더군다나 화면에 찍히고 전달하는 통신시간—그것이 단 0.001초라고 할지라도—을 감안한다면 이 ‘생생한’ 화면들은 ‘지금의 현재’가 아니라 0.001초 전 ‘과거의 현재’라는 점도 분명하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생방송조차 ‘과거의 이미지’이고, 더군다나 ‘편집된 이미지’이다. 결국 현대적 매체기술도 생생함을 과거보다 더 ‘정교하게’ 혹은 ‘다르게’ 구성하고 있을 뿐 ‘생생한 현재’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 그리고 만일 속도가 급격히 발달하여 카메라로 찍히자마자 동시에—0.001초도 차이나지 않는 속도로—내가 보는 TV화면에 나오는 통신기술이 극적으로 개발되었다고 하더라도, 화면과 내 눈 사이의 거리 때문에 내가 보고 있는 그 화면은 ‘지금의 현재’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들은 반드시 ‘과거’-만약 그것이 있다면-인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TV생방송이나 인터넷 소셜네트워크라는 새로운 매체기술들이 과거—만일 그것이 있다면—와 새로운 관계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과거’—설사 그것이 단 0.001초 전일지라도—는 TV생방송이라는 매체기술을 통해서 우리에게 ‘현재’로 도래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새로운 매체기술 덕분에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다른 생생함을 전달해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다른 관계의 토대 위에서 다른 장래를 맞이하게 된다. 이 속에서 우리는 과거와 다른 관계를 맺으면서 현재를 다른 ‘생생함’으로, 기존과 다르게 구성한다. 아마도 이것이 기술이 가져다주는 <효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구성된 현재는 미래를 예측해줌으로써—매일 매일 알려주는 일기예보라든가, 주식시장전망들을 보라—새로운 것들은 미리 알고 있는 것들로 만들고, 동시에 신체적으로는 그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한다. 결국 기술은 과거-현재-미래를 다르게 구성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TV생방송과 같은 현대적인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이전과는 다르게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기술’이다
그러나 기술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런 <효과>가 오로지 현대과학기술, 현대적 테크놀로지로부터만 발생하는 것일까? 흔한 말로 자동차, TV, 컴퓨터 같은 현대 테크놀로지 기계들에서만 그 <효과>가 생성되는 것일까? 아니, 만일 이 <효과>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기술은 차라리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데리다는 기술의 범위를 현대 과학의 테크놀로지만을 두고 사유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언어’도 각자의 생생한 생각을 타인들에게 전달하려할 때 사용하는 기술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흔히 ‘말’이 ‘글’보다 더 생생하게 내 생각을 잘 전달한다고 여긴다. 마치 책(20세기 이전 매체)보다 텔레비전(현대 테크놀로지적 매체)이 더 나은 매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글보다 말이 더 생생한 ‘기술’매체라고 느끼는 것이다. 플라톤도 『파이드로스』에서 말이 관념을 전달하는 개인의 생생하고 육체적인 현존에 더 가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플라톤 자신이 명시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 주장 뒷면에는 이런 기술간 위계가 깔려 있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 데리다의 지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가 기술이라는 관점에서 TV나 인터넷 매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만약 ‘글’을 전달하려는 관념이 기입(inscription)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마음은 그 관념이 기입되는 영적 질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관념과 좀 더 가까이, 좀 더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로 ‘말’을 ‘글’보다 좀 더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큰 소리로 말하면 친구들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전달하려는 사실들을 ‘글’로 써서 전달하는 것보다 좀 더 ‘각인’시킬 수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생생하다고 느끼는 <효과>일 뿐이지, 생생한 그 사실, 그 관념은 아니라는 게 데리다의 생각이다. 즉 ‘말’이나 ‘글’을 다양한 기술들 중 하나이며, <효과>로서 그것들을 위계화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글은 내가 쓴 의도를 항상 벗어나서 전달된다는 ‘단점’ 때문에 항상 ‘말’보다 떨어진 매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말한 것이 우리가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말하거나, 똑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이해되어 난처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글’의 단점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또한 ‘말’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말과 글은 항상 본래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나의 ‘의식(consciousness)’과 어떤 불일치가 있다는 점에서 똑같다. 모두 기술일 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은 ‘글’의 한 형태라고 간주해도 무방하다. ‘말’은 ‘공기’라는 종이에 써서 혹은 상대의 마음에 각인시켜서 전달하는 ‘글’이다. 말은 글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술이다.
따라서 말이 글보다 더 생생하다는 관점보다, 글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우리의 관념을 좀더 생생하게 표현하려한다는 기술적 관점에 더 주의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 서면 TV나 인터넷이 언어의 본질적인 특성과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점을 깨닫는다. 아무리 통신속도가 빨라진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발화자와의 ‘거리’, 애매성과 혼동 가능성, 기만, 불신 같은 것들은 기술이 갖고 있는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특성들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TV생방송 화면에 나오는 축구장의 생생한 장면들은 축구장에서는 도무지 알 수도 없거니와, 그런 장면이 축구 그 자체를 보다 사실적으로, 보다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는지도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시선의 특정한 감각으로 포획된 사실이고, 우리는 그런 포획된 사실을 화면을 통해 바라보며 그것이 지금의 생생한 현재라고 느끼고 있을 뿐인 것이다. 현대 테크놀로지는 다른 사실, 다른 현재를 구성해주고 있을 뿐 언어라는 기술에 비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차연, 기술을 작동시키다
그렇다면 이 기술은 어떻게 작동되는가? 데리다는 언어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차연 개념을 창안하였다. 차연(差延, différance)은 소쉬르의 개념인 '기호(sign)'를 데리다식으로 전유(appropriation)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소쉬르는 의미가 기호들의 차이를 통해서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축구’라는 운동경기의 의미를 알려 한다고 해보자. 사전을 찾아보니 축구는 ‘11명의 선수로 구성된 두 팀이 발과 머리로 공을 다루어 상대 팀 골문에 골인시키는 경기’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정의를 하자마자 우리는 곤란에 빠진다. ‘선수’의 뜻은?, ‘팀’이란?, ‘발’은 또 뭐며, ‘머리’는 무엇일까?, ‘공’은? ‘골문’과 ‘골’은? ‘경기’는……? 결국 축구라는 단어의 의미는 이 단어를 정의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들의 또 다른 의미에 의존하여야 한다. 우리가 사전에서 축구의 의미를 찾아보면, 다시 축구를 정의하는 다른 단어들에 이끌려서, 그 단어들의 의미로 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정의는 또 다른 정의들을 부른다. 결국 축구의 분명하고 확정적인 의미는 계속 유보될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어떤 단어의 의미는 그것을 정의하는 ‘다른’―즉 차이를 일으키는[미분적(微分的, differential)]― 단어의 의미에 연쇄적으로 의존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와 차이가 나는 ‘다른’ 단어의 의미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개념과 ‘동일하게’ 정의된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끊임없이 차이를 일으키는 다른 단어의 연쇄에 빠지면서 확정되지는 않는다. 의미는 계속적으로 이연된다.
이렇게 의미는 현존하지 못한다. 단지 ‘현존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현존’의 <효과>만 있다. 모든 의미는 확정되지 못한 채 연쇄 속에 있을 뿐이다. 아마 이 연쇄의 발생 순서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단어들이 도미노를 만들며 운동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연쇄적으로 차이 나는 다른 의미를 찾아가며 끊임없이 운동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차연’이다. 차연은 A와 B 라는 두 항 사이의 ‘고정된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A=B=C…처럼 A=B 라는 외관상 ‘동일성’을 낳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A는 A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A와 차이 나는 다른 B를 산출해내야 하는 이유가 발생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차이로 이행하게 하는 운동이 발생하는데, 바로 이 운동 자체가 차연이다. 바로 이렇게 동일하지만 차이가 나게 만드는 무한한 [미]분화(微分化, differentiation)의 이행(passage)을 차연이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A는 B로 연결되느냐, C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A의 의미는 끊임없이 ‘달라지고’, 의미의 확정 혹은 현존은 영원히 ‘지연된다'.
그런데 소쉬르조차도 이를 두고 기의(記意, 축구의 개념적 뜻)와 그 기표(記標, 축구라는 소리값, 즉 'ㅊ-ㅜ-ㄱ-ㄱ-ㅜ'와 같은 음값들)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의미에서 자연적이지 않다고 말을 한다. 이것은 앞서 말했던 플라톤의 시선, 즉 ‘글’이 ‘말’보다 못하다는 위계적 인식에서 소쉬르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여전히 원본에 대하여 기호 자체를 ‘평가절하’하는 관점에 서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소쉬르가 글을 묘사하기 위해 축어적이고 경멸적인 의미로 ‘기호의 기호’(그는 아마도 ‘이차적인 복제에 불과한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라는 관념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는 또한 기호들은 언제나 기호들의 기호들인 것이라고 기호들에 대한 보다 광범위하고 일반화된 정의를 효과적으로 제공했다.
-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De la grammatologie)』
데리다는 이를 해체하여―여기서 ‘해체한다’는 소쉬르가 자신의 주장을 모순되게 주장한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사실상 원본은 없고 오로지 기호는 ‘원본의 기호’가 아니라, ‘기호의 기호’들일 뿐이라는 주장을 한다. 원본은 없고 오로지 기호들만 있다는 말이다. 차라리 기호는 원본에 앞서 있다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결국 소쉬르는 현존의 <효과>들은 무한한 분화[차이화]로부터 발생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이 기호들에 기원적이라는 관념 또한 지니고 있었다. 데리다는 이 부분을 해체하여 소쉬르를 재전유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 ‘차연’이 언어나 TV매체와 같은 ‘기술’들이 작동하는 이유이면서 방식이다. 데리다는 이를 맑스주의적 비평가 바르트(Roland Barthes)의 ‘사진효과’를 가지고 좀 더 쉽게 설명한다.
(…) 사진효과란―사진 효과, 또는 오히려 사진 효과의 상관자인 지향적인 노에마라고 분명히 해두겠습니다―우리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부정할 수 없도록, 현재였던 어떤 과거 앞에, 있던 그대로 현재가 되어 있을 바로 그 과거 앞에 데려다 놓는데 있고, 이 때문에, 돌연히, 그 사진 효과가 진실한(authentique) 증언의 힘을 가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즉 그것이 거기에 단 한 번 있었다. (…) 어쨌든 대체할 수 없는 그 현재를 포착했다고 여겨지고 구조적으로도 그렇게 간주됩니다. (…) 물론 우리는 이것이 우리 안에 산출하는, 바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그 <효과>와 <폐부를 찌르는 듯한> 감동을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효과는 구성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항상 인위적으로 구성될 위험이 있습니다. 조작하지 않은 사진 안에도 구성 그 자체가 있습니다.
-자크 데리다, 『에코그라피』
‘사진기’로 대표되는 현대적 테크놀로지는 단순히 ‘과거의 현재’일 뿐인 ‘어떤 현재’를 우리가 부정할 수 없도록―정말 정교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총동원한다― 우리들 앞에 ‘가져오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래서 우리는 딱 하나뿐인 현재를 정확하게, 사실로 포착했다고 느낀다. 그것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사진기에 의해서 현재는 유일무이하게 하나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마치 단어의 의미가 단 하나로 서술할 수 있을 것처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차연의 논리는 우리들에게 다른 것을 가르쳐 준다.
이는 절대적인 현실적인 시간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즉 일상적 어법에서 차이화된 시간과 어떤 점에서 대립되는지 쉽게 사람들이 이해하는 실시간이 사실은 결코 순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시간이라 불리는 것은 단지 매우 축소된 어떤 <차이>에 지나지 않으며, 시간화 그 자체가 파지나 예지이고, 따라서 흔적들의 놀이에 입각해서 구조화되기 때문에 순수한 실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생한 현재, 절대적으로 현실적인 현재의 가능 조건은 이미 기억이자 선취, 즉 흔적들의 놀이인 것입니다. 실시간의 효과는 그 자체로 <차이>의 한 특수한 효과입니다.
-자크 데리다, 『에코그라피』
TV생방송이나 인터넷과 같은 현대적 테크놀로지의 기술적 구성작용은 끊임없이 [미]분화된(즉 차이가 나는, 다른) ‘현재들’ 생성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차연에 의해서 단어의 의미가 끊임없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결국 ‘생생한 현재’의 기원은 ‘현재’가 아니라 ‘차연’이다. 결국 현재라는 효과를 만들어내는 기술은 차연을 통해서 작동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그것들의 효과를 ‘실시간’이라고 혹은 ‘지금’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단지 그 자체로 <차연>의 한 특수한 효과이다.
차연은 ‘존재화 기술’이다
우리는 이런 차연에 대한 데리다의 설명이 보통 ‘기원은 없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철학적 장치로 이해한다. 즉 우리는 오로지 의미의 연쇄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의미들만을 가질 뿐, 의미를 지칭하는 확정적이고 구체적인 ‘무엇’[기원 혹은 현존]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우리는 뒤집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런 차연 때문에 ‘기록’이라는 기술이 가능해졌고, 그래서 그런 ‘기록’을 반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기원’을 기록할 수 있게 되면서 ‘기원’의 효과를 생성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오히려 이런 기록을 통해서 기록의 기원이었던 <현재>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처럼 효과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실제로 현존하지 않는 것들을 현존하게 만들기 위해서 차연이 필요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차연 때문에 ‘기원의 현존’이 영원히 지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지연을 통해서 없었던 현존이 있는 것처럼 의식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역설을 만난다. 데리다는 차연을 통해서 기원 없음을 주장하였지만, 그것은 동시에 현재라는 ‘기원’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무엇으로부터 ‘기원’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 꼴이었다. 데리다는 오히려 이 점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차연’을 통해서 ‘없음’으로부터 ‘현존’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기술이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술은 현존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형태의 매개들이다. 따라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자신들을, 사물들을 현존하게 하는 다양한 기술을 가져야만 생명체로서 구성적 토대를 가질 수 있게 된다. 현존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언어뿐 아니라 가족, 공동체, 모임과 같은 관습적인 규범들 그리고 재판 같은 사법 활동, 교육기관, 국가와 같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제도적인 활동들이 모두 이런 기술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른다. 다시 말하면 언어, 관습, 제도 같은 것들이 모두 기술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다음 말을 보자.
(…) 엄밀히 말하자면 현재성이 만들어진다는 점입니다. (…) 이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위계화하고 선별하는 작위적이거나 인공적인 다수의 장치들―<주체들>과 행위자들(현재성의 생산자들이자 소비자들인 이들은 또한 때로는 <철학자들>이며, 항상 해석자들입니다)이 결코 충분히 지각하지 못하고 있는 세력들과 이익들을 위해 활용되는 장치들―에 의해 능동적으로 생산되고 가려지고 투여되며 수행적으로 해석됩니다. <현재성>이 준거하고 있는 <현실réalité>이 아무리 독특하고 환원 불가능하고 완강하며 고통스럽거나 비극적이라 하더라도, 이는 항상 허구적인 공정을 통해 우리에게 도착합니다.
-자크 데리다, 『에코그라피』강조는 인용자
앞서서 우리가 이야기해왔듯이, 기술은 현재성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런 기술은 언어, 제도, 관습들을 광범위하게 포괄한다. 근대과학으로부터 비롯된 현대적 테크놀로지들, 이를테면 TV생방송, 인터넷 네트워크, 스마트폰 같은 것들도 현재성을 구성하는 기술들의 다양한 형태들일 뿐이며, 그것들은 학교기관, 사법기관 같은 장치들과 다를 바 없는 것들이다. 이런 기술들이 구성되면서 작위적이거나 인공적인 다수의 장치들이 작동하게 되는데, 바로 이 장치들이 <현재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라는 실체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현실réalité>이라고 하는 어떤 ‘느낌’이다. 데리다는 이런 구도 아래에서 이것들이 항상 허구적인 공정을 통해 우리에게 도달한다고 말한다. 현재는 과거와 맺는 관계, 즉 기술의 다양한 발현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기술들 덕분에 우리의 신체에 변화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기술적인 변화들, 지금 여기서 우리를 구속하고 불편하게, 딱딱하고 인위적인 방식으로 말하게끔 강제하는 것을 포함한 이런 것들을 통해서 변화하는 것, 일어나고 있는 것, 그러나 우연이 아닌, 그것은 바로 육체의 실질적인 전환입니다. 기술에 대한 관계는 주어진 육체가 순응하고 적응해야만 하는 등의 어떤 것이 아닙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육체를 전환시키는 어떤 것입니다. 이 모든 기계장치들 앞에서 움직이고 반응하는 것은 동일한 육체가 아닙니다. 어떤 다른 육체가 조금씩 발명되고 변경되고 미묘하게 변이되기 시작합니다.
-자크 데리다, 『에코그라피』
사실 우리는 어떤 사물들을 만지면서 그 사물이 ‘구체적인 물질성’을 원천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들이 그런 속성을 언제나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를 앞서 말한 ‘차연’의 구도로 설명하면 내용이 아주 달라진다. 만일 그 사물이 ‘마우스’였다고 하자. 우리는 마우스를 만질 때 어떤 촉감들, 즉 미끌미끌한 느낌, 손아귀에 딱 들어맞는 착용감과 같은 느낌들을 느낀다. 그런데 이 느낌은 느낌만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느끼기 위해서는 그런 느낌이 발생하도록 하는 어떤 ‘차이’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물들과 느낌이 다르다고 생각되어야만 마우스는 ‘마우스’가 배경으로 갖고 있는 ‘책상’과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바로 이 차이에 수많은 ‘기술들’이 개입한다. 언제나 이미 나에게 작동하고 있었던 언어는 몇 가지 느낌만을 세팅해 놓는다. 미끌미끌하다. 거칠다. 울퉁불퉁하다……. 사실 느낌을 표현하는 언어는 몇 개 없다. 그것들은 한정적이다. 의식은 이 몇 가지의 언어화된 느낌들 중 하나를, 손을 통해 들어오는 촉감에 연결시킨다. 그 순간 ‘의식’은 이 느낌들 중 한 느낌만을 느낀다. 따라서 우리는 느낌의 가능성을 몇 가지로 한정해 놓았던 셈이 된다. 이것들 이외에는 느끼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이미 구성되어진 현존이다. 마치 느낌이 편집되고 있는 것이다. 언어가 이미 ‘미끌미끌하다’는 의미만을 가지고 편집된 매체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가서 이와 유사한 느낌의 다른 사물들을 동일한 느낌으로 묶어서 동일한 것으로 느끼게 한다. 이처럼 기술은 나의 손에 언제나 이미 몇 가지 한정된 형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기술은 이를 통해 육체를 실질적으로 전환시킨다. 기술이 만들어놓은 몇 가지 프레임으로 육체를 구획 짓고 있는 것이다. 기술은 현재성을 구성하고, 우리의 육체를 실질적으로 전환시킨다.
결국 의미화를 이끌어 내는 ‘차연’이 감각까지도 생성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 구도에서라면, 마우스라는 미끌미끌한 존재, 딱 내 손아귀에 들어맞는 이 사물은 애초에 언어 속에서 구성되어 있었고, 그것으로 포착되면서 그 순간 ‘현존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의 ‘효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즉 존재는 차연의 ‘효과’인 셈이다. 그래서 데리다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라고 말할 때 바로 그 텍스트는 사실은 바로 이 차연을 말하는 것이다. 기원과 존재는 언제나 이미 텍스트의 효과로서만 찾아온다. 차연은 존재를 만들어낸다.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차연은 존재를 생산하는 기술에 해당한다. 태초에 기술이 있었다. 차연이라는 ‘존재화-기술’ 말이다.
이쯤 되자, 우리가 TV를 켜는 것이 아니라, TV가 우리를 켜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런 매체기술이 TV, 인터넷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생활”이라고 불리는 ‘생중계 화면’이 갖가지 기술들, 이를테면 언어, 학교, 국가, 법률에 의해서 온통 편집되어 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편집이 불가피하고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러자 이런 것들이 생생하다는 환상이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육체 자체가 수많은 기술덩어리가 아닌지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외부 기술에 의해서 편집되고 구성되고 있었을 육체이지만, 언제나 이미 나의 눈, 나의 귀, 나의 코, 나의 입도 그것과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오랜 역사를 거쳐서 스스로 자신의 현존을 구성하는 기술을 우리 몸 안에 형성시켜 놓았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우리 자체가 존재를 만들어내고 허무는 무시무시한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_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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