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욕망하는 욕망
들뢰즈는 일찍이 프랑스 문학은 치유불능일 정도로 지적이고 비판적이라서 그것들은 삶을 창조하기보다는 삶을 흠잡기 더 좋아한다는 로렌스의 혹평을 소개(질 들뢰즈,『디알로그』 98쪽)한 바 있다. 들뢰즈가 이를 소개한 맥락은 프랑스 문학이 갖고 있는 히스테리컬한 면모를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시선을 끈 것은 프랑스 문학에 대한 이해보다 그것이 삶을 창조하지 않고, 삶을 흠잡는다고 하는 들뢰즈의 관점이었다. 들뢰즈는 프랑스작가들과 등장인물들 중에 히스테리 환자가 지나치게 많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증오와 사랑받으려는 욕망은 많은 반면, 사랑하고 사모하기에는 너무나도 무능한 상태에 있다고 덧붙였다. 아마도 들뢰즈는 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이 평가가 프랑스 작가나 등장인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받으려는 욕망. 우리는 이상하게도 ‘사랑하기’를 생각하면 순식간에 그것을 ‘사랑받기’로 바꾸어 버린다. 오로지 ‘사랑받기’ 위해서 ‘사랑하기’가 필요했던 것처럼 말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순수한 ‘사랑하기’를 아예 상상하지도 못하는 함정에 빠진듯하다. 사랑하려고 하면, 순식간에 사랑받으려는 것으로 뒤바꾸는 이 희한함이라니! 어쩌면 우리는 모두 나르시시즘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제각기의 감옥을 하나씩 가지고서 말이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 아마도 행복과 불행이라는 환상도 대부분 이것으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자기가 사랑하는 자신’에만 맞추어 그 기준에 모자라는 부분을 매번 채워 넣으려는 자신을 상상해보라. 항상 모자라기만 하는 세계, 그것은 사랑받기의 세계, 나르시시즘의 세계이다.
윌리엄 워터하우스, <에코와 나르시스>
욕망은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는 사랑받으려고만 하는 이 욕망을 사랑하고 사모할 줄 아는 역량으로 바꿀 수 있을까? 내게 닥치는 어떤 일이든 그것에 의연하게 대하면서, 그것이 어떤 상태에 있든 그것으로부터 사랑스러운 것을 끌어낼 수 있을까? 왜 나는 나에게만 관심을 빼앗기고 있었던가?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 욕망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지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단순하게 정의한다면 ‘욕망’이란 ‘무엇을 하고자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하려는 아무런 추동력이 없는데 하게 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또 ‘무엇을’ 해야 할 것이므로 힘이 어디로 움직일지에 대해 방향을 정해야 한다.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것, 그것은 ‘의지’다. 그래서 니체는 욕망을 ‘힘의 의지’라고 불렀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이 있다. ‘무엇을’이라는 말 때문에 이것을 ‘~에 대한 의지’로 오해해선 안 된다. 흔히 사람들은 마치 ‘나’[주체]에게 물이 부족하니까 목마름이 생기고, 그래서 ‘물에 대한 욕망’이 뒤이어 파생되는 것처럼 오해한다. 즉 대상이 먼저 생기고 주체에게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이 뒤이어 발생한다고 말이다. 이 관념에선 대상-주체가 선차적이고 욕망이 후차적이다. 욕망을 주체와 대상 사이에 놓인 다리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런 구도에서라면 욕망은 ‘받고자 하는 것’으로만 규정되어야 한다. 부족한 대상을 충족하기 위해서 주체가 받고자 하는 것. 이것이 욕망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이다.
그래서 사랑도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으로만 규정하게 된다. ‘나’에게 사랑이 부족하니까 사랑에 대한 ‘나’의 갈구가 생기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고자 하는 욕망”이 파생되어 생성된다. 사랑에 대한 욕망=사랑 받고자 하는 욕망. ‘나’[주체]는 모자란 사랑을 채워야만 한다. 만일 이것조차 경제적으로 수행하고자 하는 또 다른 욕망이 포개지면 ‘나’는 최소한의 사랑을 주고, 최대한의 사랑을 받아내는 전략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오로지 최대한 사랑받기 위해서만 효율적으로 사랑한다.
블라디미르 쿠쉬, <우리의 함께했던 시간>
그러나 이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사람의 목마름을 상상해보자.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사람에게 물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인 층위에서의 생물학적인 판만을 상정했을 때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내가 사막이 된다면? 내가 해골이 된다면? 만일 더 이상 물을 찾을 가망이 사라지고 지금 남아 있는 수분으로만 사막을 건너야 하는 상황이라면, 물은 더 이상 결핍이 아니다. 그가 현자라면 새로운 욕망의 판을 짜야 하고, 기꺼이 그 판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이제 곧 죽을지 모르지만 갈 때까지 가 보는 것이고, 설사 곧 죽게 되더라도 그것은 지금의 육체가 생명을 다한 것일 뿐이다. 이제는 혹시라도 될 수도 있을 ‘사막 한 가운데 해골’로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이제 곧 다른 우주 속으로 들어가리라 생각하고 지금의 생과 마지막 투쟁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게 좀 황당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 그런 상황이 되면 아마도 정말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때는 그게 사는 방법이다. 이런 구도로 확 지평을 바꾸고 나면, 물은 그저 없는 것일 뿐 부족한 것이 아니다. 결핍은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생물학적인 몸에게만 강요할 수 있는 관점이고 용어일 뿐이다. 그마저도 새로운 욕망─해골로서의 삶, 사막의 모래로서의 삶 등─으로 전환하고 나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무의미해져버린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몸을 사막에게 주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났을지 모른다. 그는 새로운 욕망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내주어야 한다. 여기서 그에게 욕망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현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기양양하게 결핍을 향해 나아간다. 오히려 그에게 결핍이 찾아오면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판을 구성해서 즉시 결핍을 통과한다. 결국 결핍은 부족이 아니라 그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욕망은 단순하다. 모든 형태의 움직임 자체가 그것으로 욕망이다. 그것은 그때그때 있는 것들을 가지고 뭐든지 생성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여러분은 욕망이 얼마나 단순한지 아십니까? 자다는 욕망입니다. 산책하다도 욕망이고요. 음악을 듣다, 아니면 음악을 연주하다, 아니면 글을 쓰다. 이 모두가 욕망입니다. 어느 봄과 겨울도 욕망이지요. 노년 역시 욕망입니다. 심지어 죽음도. 욕망은 해석할 필요가 전혀 없고 단지 경험하기만 하면 됩니다.
─질 들뢰즈,『디알로그』 173쪽
다시 말하지만 결핍은 그저 없는 것이다. 그냥 공터일 뿐인 거다. 사람들은 공터를 결핍으로 오해하고 있다. 욕망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고 공터를 만나면 행로를 바꿀 뿐, 공터로부터 아무런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공터를 굳이 결핍이라고 부르고 여기에다 ‘부족하다’는 관점을 강요한다. 그것은 오로지 주어진 대상만을 욕망하도록 주체를 가둬두는 것이다. 그래서 고정된 주체와 대상들을 주고 기껏해야 이것들을 연결하는 것만을 욕망이라고 부른다. 수천 수 만개, 아니 갠지스 강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다른 가능성들을 보지 못하게 하면서 말이다. 아마 나르시시즘은 이런 노예화의 결과일 것이다. 애초부터 욕망은 받고자 하지 않는다. 욕망은 생산하기만 한다. 그래서 그것은 주기만 한다.
레메디오스 바로, <델 볼란테>
‘새판 짜기’가 욕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욕망은 원래 결핍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현재 있는 것만으로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것에 관심을 둘 뿐이다. 그런데 이런 욕망도 어떤 판 위에 갇히면 굴절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그 판위에서는 오로지 한정된 대상만을 욕망하도록 주체를 가둬두고 교육하고 조직한다. 엄밀히 말하면 욕망 자체가 굴절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욕망은 앞서도 말했지만 이런 것과는 하등 상관없이 끊임없이 생성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판 위에 갇히면 주어진 도안에 따라서만 작동하게 된다. 아이들을 입시 감옥에 가둬두고서, 그 아이에게 “대체 니가 원하는 게 뭐야”라고 말하면 기껏해야 입시에 구속받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런 입시구도 하에서 벗어날 방법이란 사실 없다. 결국 이로부터 벗어나려면 입시공부를 할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도안을 벗어나려는 욕망이 아니라 더욱 도안 안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욕망, 갇힌 욕망인 셈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들뢰즈는 구조적이고도 발생론적인 판으로서, ‘조직’이라고 이름 붙인 판을 갖고 이야기한다. 생명체의 기관들을 보자. 주어진 인체 도면에 입각해 이 기관들을 이해하고자 하면, 그것들은 수미일관하게 정합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어떤 기능을 하도록 구성되어진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판은 모든 것을 자연/본성, 아니면 무의식의 심연에다 밀어 넣고서 모든 사태를 항상 초월적으로 이해한다. 이런 판 위에서는 언제나 어떤 규준, 모범을 상상하고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어 욕망을 다스린다. “김태희 같은 몸매를 가지려면 나는 몸무게를 빼야해!” 먹고 싶고, 자고 싶고, 쉬고 싶은 것을 거기에 맞추어 통제한다. 이런 종류의 판은 바로 고정된 형식이나 장르를 조직하고 발전시키며, 참여자들에게 주체, 성격, 감정들을 할당하고 진화시킨다. 따라서 그것은 ‘법칙의 판’이다(질 들뢰즈,『디알로그』 167쪽). 그곳에선 항상 판 위에 솟아올라 있는 초월성이 존재한다. 즉 판 위에 있는 것들을 조감하는 청사진이 언제나 따라다닌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와 함께 전혀 다른 판을 제시한다. 위에서 말한 것들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판이다. 이른바 ‘고른판’(plan de consistance, 일관성의 판). 들뢰즈는 이 판에서는 흐름들에 쓸려가는 분자들이나 입자들이 서로 관계 맺는 것만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이 판 위에서는 사람, 동물, 사물이 움직임과 정지, 빠름과 느림, 변용(태), 강도에 의해서만 설명되고 정의된다. 나는 이것이다, 그는 저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다……이 판 위에서는 이와 같은 시선이 도대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판의 지도는 오로지 속도들과 강도들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만 속도가 달라져도, 약간만 강도가 변해도 지도는 순식간에 변한다. 일본 스모선수는 천천히 동작을 취하다가(이 순간은 지루하기 이를 데 없다!) 갑자기, 순식간에(들뢰즈의 표현대로라면 너무 빨라서 남들이 미처 알아차릴 겨를조차 없이!) 결정적인 동작을 취한다. 이 판 위에서는 느림과 빠름이 극적으로 관계 맺고 있다. 따라서 이 판은 일종의 무협의 세계, 신비의 세계와 다름없다. 때론 한없이 느리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지각불가능한 정도의 광폭한 속도로 움직이는 전사의 칼. 이런 칼들이 난무하는 세계가 바로 ‘고른판’이다.
이 판 위에 가면 신비주의조차 신비주의가 아닐 것이다. 사실 신비주의란 용어 자체가 틀렸다. 그것은 인간의 입장에서만 신비할 뿐이니까. 벌집의 사유, 벌의 사유, 벌침의 사유, 벌침이 공기를 가르는 순간의 사유, 그 순간 몸에 흩어지는 독의 사유, 그 독에 흥청거리는 피부의 사유. 그래서 이루어진 이 모든 사건의 사유. 관점은 매번 바뀐다. 고른판은 이 모든 사유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들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김태희 같은 몸매를 가지려면 나는 몸무게를 빼야해!”라는 하찮은 생각은 더 이상 발생될 틈이 없는 것이다. 살덩이의 사유, 목구멍을 넘어간 음식물들의 사유, 그것을 받아 넘긴 목구멍과 위장, 그리고 항문의 사유, 살에 스며드는 영양분들의 사유……이런 게 황당하지 않아야 한다. 아마도 이 사유들이 전개되면서 사건은 무수히 다른 갈래를 갖게 되고, “김태희-몸매-나-살빼”라는 고정된 선(線)은 무너진다. 급기야 ‘사건’은 다른 아름다움을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건’으로 하여금 사유하게 만들어라. 핵심은 이것이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사유를 통해 이 판의 잠재성을 발견하면, 기존 코드들이 어이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단번에 깨달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욕망은 끊임없이 새판을 짠다. 어쩌면 새판 짜기 자체가 욕망일 터이다. 따라서 욕망은 욕망을 욕망한다. 생(生) 자체가 생(生)을 끊임없이 산출하듯이.
살바도르 달리, <소녀라고 믿었던 6세의 달리>_ "어느 누구도 네게 삶의 강을 건너게 해줄 다리를 세워 주지 않는다. 오로지 너 혼자만이 그럴 수 있다." -『유럽의 붓다, 니체』, 139쪽
들뢰즈는 고른판이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이미’ 있다고 말한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언제나 이미 우리는 욕망이 내는 길들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이를 ‘내재성의 판’이라고도 불렀다. 언제나 이미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우리들의 가능성. 그러나 들뢰즈는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고른판이 없다고도 덧붙인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더불어 분자들의 흐름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그것들을 보지 못하고, 고른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고른판을 구성하지 못한다면 있어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고른판을 구성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존 구도에 갇힌 채 결핍으로만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 고른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욕망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단지 벗어나고만 싶을 뿐.
결국 닥치는 모든 일에 의연하게 마주하고, 그것들로부터 유쾌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내서 사랑할 줄 아는 것. 그것은 고른판을 찾아내고 만들어낼 줄 아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사유할 줄 아는 역량이고, 특히 사건들로 하여금 사유하게 만드는 역량일 것이다. 사건들 자체가 사유하는 것. 공터를 만났는가? ‘사건’을 만들어라! 그들의 사유가 길을 낼 것이다.
_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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