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통치의 돌발사건
50년 전 사건을 두고 얼마 전 일대 설전이 벌어졌다. 그 사건은 매번 익숙하게 되돌아오는 5·16 쿠데타. 유력 대선주자는 자신의 아버지와 관련된 이 사건을 두고,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관점을 드러냈었다. 그러자 5ㆍ16쿠데타에 대한 그녀의 이런 인식은 여러모로 문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헌정질서를 무너뜨리고, 인권탄압이 벌어졌던 그 사건을 어떻게 불가피한 것이고,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아해했고, 또 분노했다. 대부분의 여론에서는 5ㆍ16 이후에 대해선 공과가 함께 있지만 쿠데타 자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인 만큼 헌정 수호 의무를 지닌 대통령이 되려는 지도자는 이 같은 문제점을 인정하고, 향후 그 같은 불행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분명히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5ㆍ16은 교과서에 군이 무력으로 합법 정부, 즉 국가를 뒤엎고 찬탈한 쿠데타로 기재돼 있으므로, 5ㆍ16 세력은 반(反)-국가세력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도 했다. 지지율은 급락했다. 결국 이 유력 대선주자는 지지율이 더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 과거사를 사과하고 사태를 수습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나는 이런 소식을 접하고 약간 다른 관점에서 상황을 고심하게 되었다. 분명 나는 유신체제가 불러온 수많은 고통에 공감하고, 그런 고통들이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대통령 선거라는 이른바 “민주적” 절차와 함께 그 사건을 보게 되어서인지, 이를 둘러싸고 공방을 벌이는 이쪽과 저쪽이 모두 같은 프레임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아무리 휘저어도 매번 제자리로 돌아오는 아침 식탁의 된장국물 같은 것이었다. 이미 사라져도 한참 오래전에 사라졌어야 할 이 사건이 기어코 되돌아오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 사라질 것들 뒤에 숨어서 끊임없이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매번 똑같은 사건의 줄을 끌어올리고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하는 망치질 소리 말이다.
쿠데타, ‘국가이성’의 또 다른 현시
푸코는 ‘쿠데타’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한다. 17세기 초에 ‘쿠데타’의 의미는 국가를 그 소유자로부터 압수하거나 몰수한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필요를 위해 법이나 합법성을 빼앗고 중단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보편법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래서 당대 유명한 정치평론가는 이것을 '보편법의 초월'(Excessus iuris communis)이란 장엄한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쿠데타는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쿠데타는 필요한 경우, 어떤 질서나 어떤 사법의 형식도 지키지 않을 수 있도록 허락받은 행동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민주적인’ 인식으로는 참으로 의외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푸코는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쿠데타가 분명히 법에 반하는 행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반드시 ‘국가이성’과 이질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국가이성’이란 무엇일까? 먼저 ‘이성’. 17세기 이탈리아 팔라초(Palazzo)의 정의에 따르면, 이성은 사물 자체의 본질이자 사물의 이치에 대한 인식이며, 의지로 하여금 이 사물의 이치 자체에 따르도록 해주고, 어느 정도까지는 의무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힘(!)이다. 다시 말하면, 사물을 알게 하고 그 이치에 따르게 하는 힘이다. 그것은 일종의 권력인 셈이다. 다음 ‘국가’. 그것은 영역, 관할권, 제도(법, 규칙, 관습 등) 혹은 개인들 신분의 총체이다. 즉 영토와 제도들 그리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위계들을 전부 묶어서 국가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 두 가지를 연결해서 이해해본다면, ‘국가이성’이란 영역, 관할권, 제도, 신분들로 구성된 ‘국가’를 완전히 온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지니고 있어야 할 필요 충분한 힘 같은 것이다.
이것은 당시로선 참으로 놀라운 전회였다. 사실 그리스도교가 지배적인 시절,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국가가 ‘영원한 지복’이라는, 현세를 넘어선 목적, 국가를 넘어선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항시 정리되었다. 그러나 팔라초처럼 ‘국가이성’을 정의하게 되자 국가 자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참조하지 않게 된다. 즉 이제는 국가 이외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는 셈이 된 것이다. 국가이성의 목적은 국가 자체일 뿐인 거다. 무언가를 넘어선 완성과 행복, 그리고 지복 등과 같은 것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 자체의 것이었다. 푸코는 이런 국가이성에게 마지막 날은 없다, 그것은 최종점이 없다, 고 마치 천년왕국이 도래하기라도 한 듯이 표현한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 법칙, 심지어 신의 질서도 전혀 참조되지 않는, 그러니까 영원한 정의였던 것이다. 영원히 스스로 지속될 것으로서의 국가.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대관식>
따라서 국가이성은 오로지 국가 그 자체가 무제한적이고 항구적으로 유지, 보존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국가이성은 “법에 따라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법 자체에” 명령하는 것이어야 한다. 오히려 법이 “국가이성”에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법은 국가이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이성이 법에 복종하고 법을 존중하는 이유는 국가이성이 법을 그 자신의 작동요소로 설정하는 한에서, 다시 말하면 법이 국가를 위해 작동될 때에만 법에 복종하고 법을 존중하려 한다. 국가이성은 법이 필요하고 유용하기 때문에 그것을 사용할 뿐이다. 그러나 위급한 사건이 발생하여 더 이상 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순간, ―이른바 ‘구국의 결단’이 필요한 시기!― 국가이성은 법을 배제한다. 그 때는 국가가 신속하고 직접적으로, 규칙 없이, 극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행동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쿠데타’다. 따라서 쿠데타는 A라는 사람들이 B라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국가를 몰수하는 것이 아니다. 쿠데타는 ‘국가 자체의 자기현시’이다. 국가가 스스로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서 무대 위로 올라 선 것이다. 아마도 쿠데타의 현장은 꼭꼭 숨어 있던 국가가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일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법과 제도 같은 온갖 수단들을 제치고, 비극적으로, 그렇지만 긴급하고 재빠르게 무대에 올라선다. 아마 디오니소스의 어머니 세멜레가 제우스를 본래 자태로 보았을 때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쿠데타에서는 구름 속에서 천둥소리가 들리기에 앞서 번개가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쿠데타에서는 조과의 종이 울리기 전에 조과가 불려지고, 선고에 앞서 처형이 이뤄진다. 거기서는 모든 일이 유대 풍으로 이뤄진다....공격하려던 자가 공격을 받고, 자신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자가 죽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자가 공격을 받는다. 모든 일이 밤에, 사물이 불명료한 때에, 이슬과 어둠 사이에서 일어난다."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가브리엘 노데의 말을 푸코가 인용하다
5ㆍ16쿠데타 세력들은 언제나 자신들을 두고 국가를 구원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그들은 “5·16은 구국의 혁명이다”라고 주장한다. 어쩌면 국가 자체의 자기현시인 쿠데타 속에 있던 자들이었으니, 그렇게 주장하는 게 크게 틀려 보이지 않는다. ‘국가이성’을 옹호하고 따르며, ‘국가’를 유지하고 보존하려는 그네들의 영원한 목적을 염두에 둔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을 비판하는, 다시 말하면 이들을 공격하는 자들도 이 국가 프레임에서만 비판하고 공격하게 된다는 아이러니다. 사람들은 5·16 세력을 반-국가세력으로, 헌정질서 파괴세력으로 규정하고 싸운다. 마치 자신들이야말로 국가이성을 대변하는 애국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프레임 위에서는 이 사건을 되돌려 끌어 올리는 그들의 망치질에 도리어 공격당하고 만다. 왜냐하면 이런 싸움의 결론은 국가이성의 편에서 국가를 유지 존속하는데 누가 더 효과적이었는가로 모두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5ㆍ16 이후 경제발전으로 대표되는 ‘성과’ 앞에서 반대편 사람들은 침묵한다. 마치 쿠데타의 피로 물든 길가에서 가능한 모든 변명을 대며 빵을 주는 저들 앞에서 넙죽 빵을 집어 들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형국인 것이다.
인민, ‘인구-국가’로부터 벗어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런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사실 16세기 말~17세기 초 ‘국가’가 출현한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사태였다. 이른바 ‘국가이성’은 16세기 당시 하나의 발명, 차라리 하나의 혁신이었다. 이에 앞서 발견된 지동설이나, 훗날 발견될 물체의 낙하 법칙과 같이 당시에는 아주 돌발적인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과학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유사하다며, 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던 별들을 보기 위해서 새로운 도구와 렌즈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던 것처럼, 국가이성을 알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적 도구가 필요하다고까지 생각하였다. 국가 자체가 성찰의 대상으로서 하나의 사건이 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 속에 국가를 대단히 중요한 변수로, 아니 결정적인 변수로 도입하게 되었다. 국가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실천에 불과한데도 ― 생각해보라. 그것은 통치행위의 효율화를 위해 구성된 실천들의 총체일 뿐이다! ― 그것은 마치 자동적으로 개인에게 부과되는 존재인 것처럼 인식된다. 아니, 그렇게 인식시키는 작업이 시작된다. 이렇게 인식시키는 힘 자체가 바로 국가이성이었으므로.
국가는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팽창해가는듯 하다.
우리가 이런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려면 현재의 국가이성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야할 것 같다. 과학이 앞으로 나아간 것처럼 국가이성도 스스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국가가 쿠데타와 같은 모습으로 몸소 무대 위에 올라가지 않도록 섬세해진다. 그러기 위해서 국가는 다른 앎과 기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좀 더 세련되게, 좀 더 효율적으로 처리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실 국가이성이 출현하기 전까지만 해도 앎을 구성하는 방식은 신 혹은 자연으로부터 가르쳐진 진실들이었다. 그러나 국가이성은 이제 어떤 누구에게서도 참조하지 않고 스스로 어떤 종류의 ‘진실’을 ‘생산’해야 한다는데 이른다. 그럼 통치하기 위해서 무엇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다름 아니라 주권자에게 필요한 앎은 ‘법에 관한 인식’이라기보다는 ‘사물에 관한 인식’이다. 주권자가 알아야만 하는 사물, 국가의 현실 그 자체인 그 사물은 이 시기에 ‘통계학’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이 통계학이라는 말의 어원 자체가 ‘국가에 대한 인식’이다. 자신의 국가는 어느 수준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통계학은 바로 이런 것들을 질문하고 답하는 앎이다. 즉 국가를 특징짓는 힘과 자원에 관한 인식. 국가가 사용할 수 있는 잠재적 부의 양 ㅡ 국가를 구성한 사람들의 수, 사망비율, 출생비율, 조세 효과, 무역수지의 산정 등등. 이 모든 것은 국가라는 현실을 특징짓는 인식의 총체가 된다. 앞서 말했던 ‘국가이성’의 ‘국가’가 새롭게 정의되기 시작한 셈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혁신을 수행해 왔던 것이다.
그 혁신의 결과로 국가이성이 앎의 대상으로서 구성한 것이 바로 ‘인구’라는 독특한 대상이다. 이 인구 개념은 국가이성을 작동시키기 위해 설치된 국가장치들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것은 지식들을 생산하기에 가장 적합한 계열로서 구성한 개인들의 집합이다. 단순한 개인들의 무리는 적절히 관리, 유지되기 힘들지만, 적당한 목표로 계열화된 무리는 유지, 관리되기 적합하다. 이 계열화를 통해서 국가는 각각 개인들을 개별적으로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 개인들의 계열로서, 유의미한 인구 통계만 대면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면하여도 개별적으로 대면한 ‘효과’를 가져온다.
자, 예를 살펴보자. ‘인구’는 아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예컨대 60세 이상 연금을 받는 노인들의 수, 그 노인들 중 무주택자 비율, 무주택자 중 수도권 거주자의 비율 등등. 국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분할한다. 그리고 ‘국민’들 각각(이들은 개별적이다!)은 그런 분할을 귀로 듣는 순간, 그 분할 구역 중 ‘내’(이들도 개별적이다!)가 속한 구역을 아무런 성찰 없이 단번에 받아들인다(이런 수용도 개별적이다!) 이런 분할을 듣는 순간 이제 ‘나’는 60세 이상 연금을 받는 무주택자이면서 수도권에 살고 있는 노인이 ‘된다.’ 이런 분할은 또 다른 분할과 결합되면서 또 다른 지식이 부가적으로 생긴다. 혹시 수도권 무주택자들은 지역별 구성에 따라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고 해보자.
예를 들면 강남에 살고 있는 무주택자들은 여전히 보수적이지만, 강북에 사는 무주택자들은 최근 전세가격 동향 때문에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이 높을 수 있다(미안하다. 이건 내 상상의 여론조사다) 이런 여론 조사ㅡ 이도 또한 ‘통계’다ㅡ와 결합되면서 60세 이상 연금을 받는 무주택자로서 강북에 살고 있는 노인인 ‘나’는 구체적인 개별 의지와는 별개로 현 정권에 불만이 높은 주체로 간주된다. 이런 지식 하에서 이들 주체는 다른 지역 동일 범주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다루어지고, 처리된다(이것은 개별적인 동시에 집합적이다!). 통계치 몇 개로 새로운 주체가 뚝딱 탄생한 것이다. 국가이성이 만들어낸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구. 이제 개인들은 인구의 일원이자 한 요소로서 행동하게 된다. 사실 우리가 보아도 우리들은 인구의 요소로서 잘 행동하고 있는듯하다. 국가는 이런 주체를 수십 개, 수백 개, 수천 개 만들어낸다. 아니, 찍어낸다. 이 경우, 국가는 주체 제조기인 셈이다. 국가는 제조된 통계적 주체들을 이용해서, 개인들을 개별적으로 호명하면서도 집단적으로 관리한다. ‘나’라는 개별자는 자발적으로 통계 분할에 들어가며, 국가는 그 분할에 따라서만 관리하면 된다.
우리는 흔히 좌파냐, 우파냐로 정치적 성향을 구분한다.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이가 있는가? 이 그림을 자세히 보고 싶다면 『정보는 아름답다』를 참고하시라!
이렇게 보면 앞서도 말한 것처럼 국가는 우리의 의지에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부과된 절대적인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과연 우리는 빠져나올 수 있기는 할까? 지금에 와서 보면 절대 달아날 수 없어 보인다. 그런데 묘하게도 인구의 발명자들은 그 탄생 시점에 이미 자기 자신을 무너뜨릴 요소를, 해체의 요소를 같이 생산했던듯하다. 마치 자동차가 그 스스로 자동차 사고의 원인인 것처럼 말이다. 푸코는 18세기 아베이유의 입을 빌려 이 요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이들은 인구가 아니라 인민이다. 인구의 관리라는 측면에서, 인구의 수준에서 봤을 때 자신이 집단적 대상 - 주체로서의 인구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자신이 그 외부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인민이다. 그러므로 인민이란 스스로 인구이기를 거부한 채 이 체계를 마비시키는 사람들인 것이다."
─푸코, 『안전, 영토, 인구』
국가이성이 구성해 놓은 인구의 조절에 저항하고 인구를 최적의 수준에서 존재, 유지, 존속시키는 장치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이른바 생산자와 소비자인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주체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구로부터 스스로를 분할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통계적 주체에서 벗어나, 국가가 시도한 분할에서 탈주를 감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어떤 ‘통계치’에도 흔들리지 않고 ― 중산층의 소득과 범위, 고학력자 조건과 같은 숱한 통계치들에 얼마나 휘둘려 왔던가 ― 아니, 무관심하고 그야말로 별일 없이, 태평하게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아마도 18세기 아베이유가 냉소적으로 언급하며 없애버리려 했던 그 ‘인민’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생산해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국가 자체와 싸우면서 그것을 표적으로 만들어줌으로써 오히려 국가를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었는지 모른다. 국가는 통치가 구성한 한낱 실천에 불과한 것임에 불구하고 말이다. 또한 국가의 역사를 떠들어대고, 국가의 발달을 이야기하면서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들이야말로, 국가라는 실체를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었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애국자들이야말로 국가를 만들어가는 작업자인 셈이다. 그래서 애국은 안타깝게도 국가생산의 순간이다. 앞으로 다가올 대통령 선거가 또 다시 이런 실체를 생산하는 일일 뿐이라면, 투표는 또 다시 기만이 될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렇게 될 것으로 의심하지만, 아직 모르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이 괴물같이 서 있는 국가주의자들 앞에서, 국가는 그저 통치의 돌발적인 사건일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저 사건일 뿐이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새로운 길을 낼 가능성이니까.
-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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