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박, 소인(小人)들에 깎여 괴로울수록 선행 한 스푼
䷖ 山地剝(산지박)
剝, 不利有攸往. 박, 불리유유왕.
박괘는 가는 바를 두는 것이 이롭지 않다.
初六, 剝牀以足, 蔑貞, 凶. 초육, 박상이족, 멸정, 흉
초육효, 깎기를 침상 다리에서부터 하니, 올바름을 없애서 흉하다.
六二, 剝牀以辨, 蔑貞, 凶. 육이, 박상이변, 멸정, 흉.
육이효, 침상을 깎아 상판에 이르니, 올바름을 없애서 흉하다.
六三, 剝之无咎. 육삼, 박지무구.
육삼효, 박의 시대에 허물이 없다.
六四, 剝牀以膚, 凶. 육사, 박상이부, 흉
육사효, 침상을 깎아 피부에까지 미치니 흉하다.
六五, 貫魚, 以宮人寵, 无不利. 육오, 관어, 이궁인총, 무불리.
육오효, 물고기를 꿰어서 상구에게 궁인이 총애를 받듯이 하면 이롭지 않음이 없다.
上九, 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상구, 석과불식, 군자득여, 소인박려.
상구효, 큰 과실은 먹히지 않음이니, 군자는 수레를 얻고 소인은 초가지붕을 벗겨 낸다.
옛날 옛적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즈음, 나는 건축가였다. 내가 다니던 회사의 사장님은 누구나 알만한 건물을 많이 설계한 유명 건축가였다. 나를 포함한 직원은 약 15명. 업무는 사장님 서포트. 유명 건축가 밑에서 일한다는 것은 그의 비전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직원들은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진행하거나 다른 방향을 제시할 수 없는 방식으로 회사는 운영됐다. 초반에는 이러한 업무가 나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나는 내 생각이 반영된 건물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커졌다. 그리하여 평소 동경하는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새 회사는 규모부터 달랐다. 건축가만 수백 명. 그들은 여러 부서에서 다양한 팀을 이루었다. 각 팀은 저 윗분들(회사 간부들)의 간섭 없이 팀장의 주도하에 맡은 프로젝트를 자율적으로 진행했다. 나는 이제야 건물 설계가 진행되는 과정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속에서 나에게도 역할이 있다고 느꼈다. 이런 일상을 지내다 보니 나 또한 내 팀을 꾸리게 되었다. 드디어 내가 더 적극적으로 건물을 설계할 수 있는 장이 열렸다!
나는 열 살이 되기 전부터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 건축 설계란 단지 멋지고 안전한 건물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터전을 만드는 일이다. 하나의 건물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기반이 되며 그 삶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건물의 재질, 내부 동선, 외부 환경과의 교류 등등은 사람의 행동과 마음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건축가는 수많은 요소를 고려하며 자신이 설계하는 공간에서 살게 될 사람들의 삶을 상상한다. 여느 건축가처럼 나 또한 건물을 설계하며 좋은 삶의 기반을 만들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이 회사에 오기 전까지 나는 이러한 건물을 혼자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팀장이 되며 깨달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있어야 실현 가능한 것임을. 건물설계 과정에서 프로젝트 팀장은 건축주, 공무원, 다양한 전문 업체와 끊임없이 연락해야 한다. 그렇게 협의한 내용을 팀원들과 나누고 함께 도면에 반영한다. 나는 다양한 사람들과 협력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와 소통하는 지휘자가 된 것 같았다. 아름다운 교향곡을 연주하기 위해 모두의 협력과 조화를 끌어내는 지휘자.
이러한 마음으로 일을 해 나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건축가였을 것이고. 그러나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의기소침해지기 시작했다. 왜냐고? 내가 맡은 프로젝트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어떤 일은 건축주가 건물 짓기를 그만두었다. 어떤 것은 우리 팀에서 하던 일이 다른 팀으로 넘어갔다.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 같지 않은데…. 건물 하나를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하니 성취감을 느낄 수 없었다. 나아가 이대로 가다간 내가 도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생겼다.
회사에서 도태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해고할 수 없어 월급은 지급하지만 일은 주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환영했을 것이다. 월급 받으며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 되니까(^^)! 그러나 당시 나는 그 회사에 다니는 것이 좋았다. 업계에서 누구나 알아주는 회사에 소속된 것이. 내가 그랬듯 이 회사를 동경하며 입사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부러움 대상인 것이. 그런 회사에서 팀장으로 대우받는 것이. 나는 이런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회사에서 요구하는 능력을 힘껏 발휘해야 했다.
팀장들이 하는 능력 발휘란 건물설계를 신속히 완성해 건축주에게 정산받는 것이다. 그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프로젝트로 넘어가기. 이렇게 일을 진행하기 위해 팀장은 건축주가 도면을 바꾸지 못하게 유도해야 한다. 공무원이 딴지 걸지 않도록 그에게 잘 보여야 한다. 무엇보다 협력업체들이 내 프로젝트를 우선시하도록 독촉하고 내 팀원들에게서 일을 최대한 뽑아내야 한다. 회사는 이러한 팀장을 능력 있는 자라 추켜세우며 팀장들끼리 은근 경쟁시켰다. 나 또한 그 요구에 맞추고자 하는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불안감은 더 커졌다.
이 ‘능력 발휘’의 전쟁터에서 나는 자신을 깎아내기 시작했다. 주역에서는 이러한 때를 ‘박(剝)의 때’라고 부른다. 박이란 깎는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말해 박의 때란 깎임의 때이다. 누가? 어떻게? 박의 때의 핵심은 소인(小人)이 군자(君子)를 깎아내는 데 있다. 소인의 입장에선 깎는 것이고 군자의 입장에선 깎이는 것이다.
어떤 상황인지 더 자세히 보자. 박괘를 아래에서부터 전체적으로 보면 음효가 초효에서 5효까지 연속적으로 있고, 상효 하나만 양효이다. 소인을 상징하는 음효들이 양효들을 깎아내면서 그 자리를 차지한 상황이라고 주역은 설명한다. 상효에 있는 유일한 양효만 아직 깎이지 않고 외로이 버티고 있는 군자의 도(道)라고. 소인이 이때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
이는 내가 놓여있던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나는 건축가가 되어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뜻은 내가 인정받아 이 회사에 계속 남고 싶다는 소인의 마음으로 서서히 대체 되었다. 많은 이들을 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오로지 나를 위하는 마음에 의해 깎여나갔다.
우리는 악함을 다른 이를 적극적으로 해하는 행위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자신만을 위하는 일을 할 때 확신한다. 그것은 악함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그러나 우리는 내 것을 조금 더 챙기고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불러온 파장을 여럿 보아왔다. 한 건물이 무너지기 전까지 그것의 설계사와 시공사는 자신의 행위를 악함이라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소인이라는 게, 악이라는 게 별것 아니다. 이것쯤이야 하며 내 것을 더 챙기겠다는 대응. 이것이 소인이다.
박의 때엔 우리 안의 소인들이 판을 치며 악함을 행한다. 이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내 마음속 소인이 커지는 것을 방관하거나 그 일에 적극적으로 합치하다 보면 군자의 도는 어느새 야금야금 깎여 없어져 버린다. 박괘의 효들은 이 과정을 차근차근 잘 보여준다. 이를테면 침상에 누워있는 사람이 위험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식이다. 그만큼 일상 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명심할 것! 내가 지금 깎임의 때에 있다는 것을 깨닫더라도 당황하거나 자책하지는 말자. 우리 안에는 언제라도 튀어나올 수 있는 소인이 있는 만큼, 믿기 어렵겠지만 언제라도 스스로 떳떳하고 싶은 군자도 잠재되어 있다. 이들은 주변 상황이 바뀜에 따라 하나는 더 강해지고, 다른 것은 접힌다. 박의 때엔 소인이 점점 자라나 힘을 얻어 강해진다. 내가 원래 인정 욕망을 쫓는 사람이거나, 항상 군자의 도를 따르는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여러 소인의 마음이 모인 곳에 있다 보니 나 또한 그러한 삶의 방식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된 상황이다.
여기까지 이르자 나는 그 시절 나의 첫 팀장님이 이해되었다. 입사 초반에 그는 친절하고 재미있는 직장상사였다. 나는 후배들에 자상하고 자기 일에 능력 있는 그가 멋있게 보였다. 배우고 싶은 상사였다. 그러나 승진을 해가면서 그는 같이 일하기 싫은(말도 섞기 싫은) 고약한 상사가 되었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이 단지 그동안 숨겨왔던 그의 본 모습이 드러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제 보니 그 또한 깎이고 또 깎이고 있었음을 알겠다.
그가 그랬듯이 나도 그랬다. 나는 회사가 제공하는 것을 계속 누리고 싶었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 안의 소인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순간! 나는 내가 누리는 것을 놓칠까 봐 나서서 회사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자신을 닦달했고 나쁜 결과가 나올까 봐 불안해했다. 주도적으로 내 프로젝트를 하겠다던 사람이 회사에 휘둘리는 사람이 되었다. 변한 내 뜻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악함을 행하는 것임을 부인하며. 이러한 삶은 결국 나의 숨통을 죄어왔다. 단지 힘들다가 아닌 이대로 살다간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대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앞에서 말했지만, 소인들이 득실거리는 박괘에는 하나의 양효가 있다. 맨 마지막 여섯 번째 효인 상구효. 상구효는 소인의 마음으로만 살면 결국 모든 것을 잃는다고 말한다. (소인박려 小人剝廬 소인이 초가지붕을 벗겨 낸다) 무슨 뜻일까? 완전히 망해야만 소인의 마음들이 득세한 사회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말일까? 아니다. 세상일에 완전히 죽으라는 법은 없다. 호랑이에 물려가도 살 길이 있듯 소인들에게 둘러싸여 깎이는 시절에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박괘의 중간, 삼효에 보인다. 박지무구(剝之无咎 박의 시대에 허물이 없다)! ‘허물이 없다(无咎)’는 건 잘못된 것을 잘 보수 한다는 뜻이다. 자신이 행하는 악함을 선한 행동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나를 깎고 있는 소인의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인 셈.
그렇다면 깎이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한 행동이란 어떤 것일까? 「대상전」에서는 ‘아래를 두텁게 하고 집을 안정시키(厚下安宅)’라고 한다. 아래에 있는 자들(下, 혹은 나의 근본)을 튼튼하게 만들면 자신이 있는 자리(宅, 혹은 자기 존재)를 안정되게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깎여나가는 것 같은 때의 불안감은 내가 이끄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으로, 내 마음과 행동을 바꾸는 것으로 없앨 수 있다는 말이다. 다른 이들을 위하는 것이자 나를 위하는 선한 행동이다.
뜻한 바가 변했을 때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던 나의 마음은 영국 산업혁명 당시 공장장의 마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주변 팀장들이 모두 그러고 있었으니까 나도 그러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함께 일하는 팀원과 협력업체를 다그치다 불현듯 나는 이렇게 하면서까지 일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건물 사용자에게 좋은 삶을 선물해 주고 싶다는 원래의 뜻은 희미하게 잊혀져 버렸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위해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삶을 나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설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좋은 삶을 살지 못하면서 그들이 만든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좋은 삶을 살기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은 건물, 나아가 좋은 삶의 핵심이다! 나는 팀원들을 이용해 회사에서 인정받으려는 마음을 접었다. 그 대신 나는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이 회사에서 최소한 마음이 다치지는 않길 바랐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서 회사의 요구에는 맞출 수 없게 된다는 것. 한쪽을 챙기면 다른 쪽이 피해를 보는 상황이었고, 나는 그 사이에서 이것도 저것도 제대로 버리지 못한 채 점점 괴로워졌다. 결국 나는 회사를 그만두는 것으로 이 상황을 마무리했다.
박괘를 공부하며 깨달았다. 내가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지 내 몸의 고달픔 때문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나는 아래를 두텁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최소한 그 마음이 가시처럼 걸려 있었기에 나는 소인들의 판에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만을 위하는 마음만으로 버텼더라면 오히려 퇴사를 선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회사를 그만둠으로써, 회사를 그만둔 덕분에, 비로소 나는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문득 궁금해진다. 박괘는 왜 3효가 새로운 길을 낼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일까? 보통 괘에서 3효는 하괘의 끝자리에 있으면서 상구효와 응한다. 박괘에서 3효는 음효들에 둘러 싸여있고 자신도 음효이다. 그가 상구효와 응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안에 실낱같을지언정 군자의 도가 힘을 쓰고자 하기 때문이다. 후하안택(厚下安宅)의 도를. 그 도를 발판삼아 그는 양효인 상구효로 뛰어오른다. 상구효는 그의 손을 잡아준다.
다른 괘에서 3효는 하체의 제일 윗자리, 거기에 더해 양의 자리에 있음을 과신한다. 그 자리의 힘을 믿고 그것으로 밀어붙여 상체로 도약하고자 한다. 자신이 그러한 자질이 있는지는 살펴보지도 않은 체 자리의 힘만 믿고. 그렇기에 주역에서 3효는 대체로 올바르지 않고 흉하다. 그 자리에 양효가 와도 문제인데 음효가 올 땐 흉함이 더 심각해진다.
반면 박괘에서 3효, 그것도 음효인 육삼효는 다른 관계를 맺는다. 하체인 곤(坤)의 순종하고자 함은 3효에 이르러 극에 다다른다. 따름(순 順)의 극! 그는 비록 소인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상구효가 드러내는 군자의 도에 순응한다. 주변이 모두 그러니까~라며 그것에 자신을 맡기는 대신 다른 길을 찾아 그 판을 떠난다. (3효 「상전」 실상하 失上下, 위와 아래의 음효들을 잃는다) 3효는 그렇게 무구함을 보여주고, 그 결과로 나는 지금의 공부하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박의 때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소인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모두 군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군자이고자 하면 내 안에서 소인이 쉽게 주도권을 잡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리 안의 군자는 시시때때로 우리에게 어떤 신호를 보낸다. 그것을 놓치지 말자. 내 안에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인 군자의 마음으로 현재 놓인 상황에서 도약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내 삶에 선행 한 스푼을 추가해보자. 어쩌면 그 선행은 우리를 전혀(!) 다른 삶으로 이끌어 줄 마법의 양탄자일지도 모른다.
글_줄 자(글공방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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